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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240화 (240/307)

240화. 번지는 불길

왕칭린 주석이 야심차게 추진하는 동서경제벨트에서 말레이시아는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총 사업비 550억 링깃(약 15조 원)의 85%를 지원하는 동부 해안 고속철도가 완공되면 중국 본토에서 라오스, 태국을 넘어 전략적 요충지인 클랑 항만을 잇는 교통로를 완성할 수 있었다.

팡기텍 총리는 친중파라 전혀 걱정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주석궁의 지시로 관련 부처에 비상이 떨어졌다.

탕분헝이 말레이시아의 정권을 쥔 것에 대한 분석 및 향후 대책을 마련해 당장 내일 아침에 보고해야 했다.

누구도 퇴근을 못 한 것은 당연했다.

날이 밝아 오는 시간.

우핑 부총리의 집무실에서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체 무슨 일들을 이따위로 해!”

“죄송합니다.”

우핑 부총리의 호통에, 허융은 잘못한 것도 없었지만 고개부터 숙였다.

이게 모두가 다 그 빌어먹을 놈에게 함반토타 항만의 운영권을 빼앗긴 탓이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동서경제벨트 사업이 ‘채무 패권주의’라는 의심을 사게 되면서 관련국들이 사업 재검토를 요구해 오고 있었다.

특히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곳에서는 그 현상이 심했다.

지난 지도자의 과실이라며 책임을 떠넘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나라의 시선을 의식해 불만을 표출하는 곳은 비공식적으로 추가 지원을 약속하며 어렵게 사업을 진행시켜 나가는 중이었다.

“외교부에서는 뭐래?”

“팡기텍 총리가 물러난 것은 아쉽지만, 정식 계약이 체결된 데다 화교가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어 우리나라와의 관계에 변동은 없을 거라는 반응입니다.”

허융의 안일한 판단에 우핑의 얼굴이 당장 구겨졌다.

“그런 한가한 생각 때문에 함반토타 항의 공작에 실패했음을 벌써 잊은 거냐?”

“……?”

“탕분헝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우핑은 1990년대 후반 아시아에 불어 닥친 외환 위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 태국 등이 엄청난 타격을 받고 있을 때, 탕분헝은 ‘국제 통화 기금(IMF)의 구제 금융이 너무 가혹하다’며 아시아의 이익을 대변했다.

그는 나아가 말레이시아 링깃화를 고정 환율로 묶어 버림으로써 환투기 세력의 공격을 막아냈다.

당시 홍콩을 관리하던 우핑은 그걸 보고 홍콩 달러의 환율을 고정시키는 방법으로 월가의 늑대들을 쫓아낼 수 있었다.

그 공로로 지금의 자리에 앉게 됐다.

허융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탕분헝 부총리가 미국에 할 말은 하면서 아시아의 이익을 대변했던 아시아 대표 정치인이란 것은 압니다. 하지만 그는 내일 사망 소식이 올라와도 이상할 게 없는 구십이 넘은 고령이라, 신임 총리가 선출될 때까지만 임시로 국정을 맡는 역할 정도일 겁니다.”

“그건 그렇지.”

허융의 냉철한 분석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우핑은 좀처럼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이런 경우에는 다른 곳으로 정신을 돌리는 게 낫다는 것을 알기에 허융이 다른 주제를 꺼내 놨다.

“지난번에 말레이 홀딩스의 자금 관리를 맡았다고 하던 자가 국가안전부에 신변 보호 요청을 해 왔다는 보고를 기억하십니까?”

“참, 그랬지. 어떻게 됐냐?”

“로버트 호라는 자였답니다. 제 발로 본토로 건너왔는데, 정신이 이상한 자였답니다.”

“정신이 이상해?”

“도착했을 때부터 마카오에서 증거와 비자금을 일본 야쿠자에게 빼앗겼다며 반쯤 혼이 나간 상태였답니다. 아무나 붙잡고 찾으면 반을 나눠 주겠다며 애걸복걸하는 게 정상이 아니랍니다. 국가안전부에서 그놈이 일러준 인상착의로 일본 야쿠자 DB를 뒤져 봤는데 그런 자는 없어 헛소리라 치부하고 정신병원에 가둬 버렸답니다.”

“그럼 우리도 그놈에 대해서는 신경 끄고, 당분간은 말레이시아 정국 변화를 주의 깊게…….”

우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며 비서가 뛰어 들어와 소리쳤다.

“큰일 났습니다!”

“웬 호들갑이냐?”

“말레이시아 자인 그룹이 세무 조사를 받고 있답니다. 테홍녠 회장은 긴급 체포돼 압송됐답니다.”

“뭐? 당장 긴급회의를 소집해라! 비상이다!”

우핑이 거의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 * *

불이라도 난 듯 정신없는 중국과 달리 알라딘 그룹은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여유를 찾았다.

-다이리팜 회장님이 직접 전화하셔서 GTH리테일의 조치는 실수였다며 사과하고 중단 없는 업무 협조를 약속했습니다. 회장님께 선처를 바란다는 말씀도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선병식이 전화로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시켜 줬다.

보름 가까이 이어진 고민이 해결되자 진혁은 오랜만에 홀가분한 기분으로 희준과 함께 일찍 퇴근해 외식을 했다.

고기가 익기 무섭게 호호 불어 자기 아들 입에 넣어 주는 희준의 행동에 진혁이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적당히 해라.”

“왜? 우리 세훈이가 고기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자식이 괜히 성질이야. 아아, 우리 집 귀염둥이.”

“이 자식이. 그래도 눈치 없이.”

“놔두게. 자식 위하는 것은 흉이 아니네.”

장모 박연심이 말리자 진혁도 더 화를 내지 못했지만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말과는 달리 박연심의 표정이 밝지 않아서였다.

이 집안의 가장인 김세동은 참석하지 못했다. 사드 배치로 인한 중국의 경제 보복과 개성공단 피해 기업들에 대한 지원 대책을 세우느라 청와대는 연일 야근이었다.

진혁이 술병을 들고 말했다.

“아버님 대신 제가 한잔 따라드리겠습니다.”

“그래. 오랜만에 큰 사위 잔 한번 받아 보세.”

잔을 받은 박연심이 진혁의 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자네가 있어 항상 든든해.”

“저도 아버님과 어머님이 곁에 계셔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분위기가 좋아지려는 순간 옆에서 초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자기두. 아아.”

참 지랄도 가지가지 하고 있다.

* * *

다음 날 아침.

진혁은 김세동을 따라 청와대로 들어가야 했다.

권성일 대통령이 면담을 요청해 왔다.

“동행 한마당 행사의 성공적인 개최를 축하드립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서 회장님 덕분에 제가 숨통이 틔었습니다. 중국의 경제 보복에 대해 아무런 대비도 없이 사드 배치를 받아들였다는 야당의 비난이 쑥 들어갔습니다.”

동행 한마당의 성공을 확인하자마자 청와대는 서둘러 ‘친아세안 정책’을 발표했다.

중국의 경제 보복에 대응해 동남아시아 시장을 노리겠다는 전략이었다.

평소라면 이에 대해 갑론을박이 이어졌겠지만, ‘투게더 페스티벌’로 동남아시아에서 한국 제품의 인기가 확인된 터라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일부 친정부 언론에서는 매우 시의적절한 대책이라며 호평까지 할 정도였다.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까지 그쪽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서 회장님의 예상이 맞았습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 이후로도 권성일의 칭찬은 한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진혁은 전혀 감응이 없었다. 이런 인사치레나 하려고 부른 게 아님을 알기에 목적이 궁금했다.

그 기색을 느끼고 권성일이 본론을 꺼냈다.

“서 회장의 권유대로 이 실장과 ‘리틀 지니’ 매장을 가 봤습니다. 솔직히 많이 놀랐습니다. TV에서 봤던 미래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져 있더군요. 그것도 순수 국산 기술만으로 이뤘다는 것에, 대통령 이전에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더 뛰어난 기술도 많습니다만 이런저런 규제 때문에 적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모든 국무 위원들에게 의무적으로 매장을 방문해 관련 사업을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보고하라고 했습니다. 당장 법 개정이 어렵다면 규제 샌드박스 제도라도 도입할 생각입니다.”

규제 샌드박스는 신산업, 신기술 분야에서 새로운 제품, 서비스를 내놓을 때 일정 기간 동안 기존의 규제를 면제 또는 유예시켜 주는 제도였다.

대통령의 강한 의지에 진혁이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저는 물론 관련 산업 종사자들이 크게 반길 겁니다. 감사합니다.”

“더불어 서 회장님이 그간 제안했던 스마트팜 사업과 스마트 팩토리 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생각입니다.”

눈짓을 받은 이현국 비서실장이 말을 이었다.

“대통령께서는 그 첫 사업으로 개성공단 피해 기업체들 중 국내 잔류를 원하는 업체를 대상으로 우선 지원할 계획이십니다. 담당자를 보내 의견을 물었는데, 다들 환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들이 위험한 북한까지 간 것은 결국 저임금 때문이었습니다. 스마트 팩토리의 최대 장점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기존 사업장에 적용하는 것은 일자리 축소 논란으로 힘들겠지만, 이번은 특수한 경우인 데다 새로운 사업장이라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지 못할 거라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진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정은 이해하지만 경제성보다는 정치적 판단이 먼저였다.

이현국의 말이 이어졌다.

“문제는 스마트팜 사업 확대입니다.”

“……?”

“원하는 곳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간 반대했던 농협마저도 자신들이 하겠다며 여기저기에 로비를 하고 있습니다. 청와대 게시판에 정부 지원을 촉구하는 청원 글이 수십 개나 올라와 있는 실정입니다.”

진혁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스마트 케어팜 농장의 뛰어난 성능과 편리성, 그리고 충분히 수출도 가능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터라 피를 본 승냥이 떼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동행에 사업권을 주면 특혜 시비가 일어날 게 불을 보듯 뻔해 고민이십니다.”

“동행에 안 주셔도 됩니다. 누구든 원하면 할 수 있게 하십시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너무도 쉽게 포기하는 진혁의 결정에 권성일 대통령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크게 반발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다.

“이 나라와 우리 농민들을 위하는 일인데 제 개인적인 욕심을 앞세울 수는 없지요. 제가 양보하겠습니다.”

“먼저 그렇게 말해 주니 정말 고맙습니다. 당장 관련…….”

권성일이 기쁜 마음에 얼른 확정시키려고 했다.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다. 진혁이 바로 치고 들어갔다.

“사업을 추진하기에 앞서 기술 표준부터 세우셔야 합니다.”

“기술 표준을요?”

“현재 스마트 산업 관련 제품은 대부분이 수입품이고, 일부 국내 제품을 만드는 곳은 영세하다 보니 표준화되지 않아 제각각이라 호환성이 떨어집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했다가는 외국기업만 좋은 일 시키고, 국민의 혈세로 산 기계들이 무용지물이 될 소지가 큽니다.”

“……그렇군요.”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한국형 스마트 기술 표준을 먼저 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진혁의 말이 끝났지만 권성일은 바로 답을 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화두인 데다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였다.

“꼭 알라딘이 아니라도 스마트 산업 기술 관련 사업 수행 능력이 있는 곳을 선정하시면 됩니다. 더불어 한 가지 더 제안을 드리자면, 관련 사업을 진행하는 곳은 필히 스마트 공단도 함께 구축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스마트 공단을요?”

“시너지 효과를 위해서라도 스마트 산업 기술 업체들이 모여 있는 게 유리합니다. 그리고 스마트 공단은 이왕이면 지방으로 한정했으면 합니다. 지방 경기 활성화에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될 겁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진혁은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더 이야기해 주고 나머지는 청와대가 알아서 결정하라며 쿨하게 일어나 나왔다.

하지만 김세동은 아니었다. 그는 잔뜩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슨 걱정이 있으신 겁니까?”

“나 때문에 양보한 것인가?”

“예?”

“자네가 스마트 기술 개발을 위해 많은 시간과 자본을 투자한 것으로 아네. 이렇게 그냥 물러나는 게 내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해서 마음이 편치 않네.”

“오해하신 겁니다. 전 물러난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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