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241화 (241/307)

241화. 양보의 기술

“감히 단언하는데, 알라딘의 스마트 기술은 한국은 물론 세계 어느 기업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습니다. 거기에 알라딘은 자본도 충분합니다.”

“……!”

“기술력은 물론 투자 능력도 갖춘 데다 방글라데시의 경제 특구 건설, 스리랑카 함반토타 스마트 항만 운영, 한국의 리틀 지니 매장 등 사업 실적도 훌륭합니다. 이런 알라딘이 선정 안 되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김세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혁이 사업에는 냉정하다고 했던 말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어차피 알라딘으로 선정될 게 뻔해 일부러 양보하는 척했을 뿐이었다.

괜한 기우였다.

홀가분하게 알라딘 사무실로 돌아온 진혁은 당장 대책회의를 열었다.

알라딘 연구소에서 구필준이 넘어왔고 동행에는 우상우, 알라딘 복지 재단에서 고진무가 참석했다.

“정부에서 스마팜과 스마트 팩토리 사업을 전격적으로 시행하겠답니다.”

“와아!”

다들 환호성을 질렀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힘들게 유지했는데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됐다는 기쁨이 몰려왔다.

하지만 이어진 진혁의 말에 그 기분은 바로 분노로 돌변했다.

“알라딘은 두 사업에 모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됐습니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이건 너무합니다. 그동안 고생한 게 얼마인데…….”

“명백한 역차별입니다. 강하게 항의해야 합니다.”

“절대 가만있을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성토에 진혁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무만 보면 안 됩니다. 숲을 보십시오. 알라딘은 두 사업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대신에 그 사업을 지원하는 쪽으로 사업을 펼쳐 나갈 겁니다.”

“……?”

“두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 관련 설비 산업이 크게 성장할 겁니다. 우리가 그걸 먼저 선점해야 합니다. 그 시작은 한국형 스마트 기술 표준화입니다.”

“맞습니다. 지금은 기술을 선점하는 곳이 시장의 지배자가 됩니다. 알라딘은 모든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니 가장 적합한 사업자입니다.”

구필준이 가장 먼저 진혁의 생각을 이해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 서방이 버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번 일이 그 경우에 해당한다.

농장과 공장을 직접 운영하는 것도 좋지만, 그곳에 들어가는 설비를 납품하는 것은 그보다 몇 배 큰 사업이었다.

진혁은 그걸 노리고 있었다.

알라딘은 도이에 중공업의 로봇 기술, 팜스핀의 경영 소프트로 H/W는 물론 S/W까지 갖추고 있었다.

알라딘 연구소는 그 둘을 활용하는 수준을 넘어 더 뛰어난 4차 산업 신기술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기술 표준화 관련해서는 구필준 소장님이, 설비 산업은 고용준 회장님이 맡아서 준비해 주십시오. 나머지 분들은 두 분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대답했다.

다들 맡겨진 일을 처리해야 해서 바삐 나가고 둘만 남자 김선혁이 말했다.

“그동안 말레이시아의 일 때문에 경황이 없어 이야기하지 못했는데, 한국해운이 결국 파산 처리되려는 모양이다.”

“정부에서 오양상선으로 통폐합하기로 했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랬는데 오양상선도 자본 잠식 상태라 난색을 표했나 보더라. 덩치가 너무 크고 해운업 자체가 불황이다 보니 해외 매각도 쉽지 않은 모양이고. 관련 협력체들의 연쇄 부도가 불가피한 데다 또 대량 실업이 발생할 텐데, 큰일이다.”

“음…….”

한국해운은 자본금이 6천억 정도인 반면 부채는 6조가 넘어 부채 비율이 1,000%가 넘는 심각한 부실기업이었다.

거기에 시장 예측을 잘못해 용선료 장기 계약으로 매년 추가 손실만도 2조가 넘었다.

김선혁의 푸념이 이어졌다.

“해외 선주들이 용선료 인하 협상에 미온적인 것은 한국해운을 일부러 파산시켜 알짜 자산인 미국 LA 터미널과 운영사 지분, 그리고 미주, 아시아 노선 영업망을 자신들이 차지하겠다는 계책 때문이라고 하더라. 더 큰 문제는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해운 주권을 잃게 되어 해상 운송망이 글로벌 해운 ‘공룡’들에 의해 좌지우지될 거라는 거지.”

잠시 생각하던 진혁이 말했다.

“우리가 인수하죠.”

“우리가?”

“이번 말레이시아 일을 겪으면서 물류의 중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자체 물류망을 확보하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한국해운은 배보다 배꼽이 더 커. 괜히 우리가 남이 버린 쓰레기를 치워 주는 게 아닌지 걱정이다.”

진혁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라딘이 국제적인 호구가 될 수는 없지요.”

“……?”

“알짜 자산만 인수하고 나머지는 이삭줍기를 해서 새 판을 짜면 됩니다.”

기업 파산 절차는 일반적으로 이렇다.

우량 자산은 매각하여 부채를 최대한 변제한 후 파산 선고를 하면 즉시 파산관재인이 선임된다. 그 뒤 공고를 통해 잔여 재산을 매각하게 된다.

이때 매각가는 거의 헐값에 가까웠다.

진혁이 말을 이었다.

“파산이 결정되면 채무는 물론 기존 계약도 무효가 된다니 다들 노리는 알짜 자산은 인수하고, 나머지는 매각 공고가 나오면 필요한 것만 저가 낙찰 받으면 될 것 같습니다.”

“좋은 방법이다. 내가 추진해 보마.”

“공매는 박이동 실장님이 전문입니다. 도움이 되실 겁니다.”

“알았다.”

김선혁도 나가고 홀로 남은 진혁은 그제야 겨우 여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 * *

한국해운의 인수 작업을 김선혁에 맡긴 진혁은 고용준과 함께 설비 산업 진출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가장 먼저 도이에 중공업의 한국 법인을 별도로 분리해 알라딘에게 예속시켰다.

더불어 로봇 기계에 대한 유지 보수를 맡았던 협력 업체도 함께 인수해 직접 생산의 틀을 갖추었다.

그러면서 구필준 소장의 스마트 기술 표준화 작업까지 지원하다 보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판이었다.

오늘도 바쁘게 외부 일을 보고 사무실로 들어서던 진혁의 몸이 우뚝 멈췄다.

김선혁이 두 사람과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메이왕의 리카렁 회장과 알라마트의 라이꾸두 회장이었다.

냉랭한 분위기에 김선혁이 얼른 말했다.

“인사드리지 않고 뭣 하는 거냐?”

“…….”

“그간 알라딘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분들이시다. 멀리서 찾아오셨다.”

진혁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어려운 걸음 하셨습니다.”

“여러 가지로 죄송합니다.”

리카렁과 라이꾸두는 허리를 더 깊이 숙였다.

자리에 앉고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자 김선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게 먼저 연락을 주셨더라. 네게 미리 말하면 무조건 안 만나도 할 것 같다면서. 그래서 들어오시라고 했다.”

“잘못하신 겁니다.”

“사업은 감정으로 하는 게 아니다.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이득이 된다면 서로 손을 맞잡는 게 사업가의 올바른 자세다. 하물며 이 두 분은 어려운 너를 여러 번 도와주신 분들이다. 은혜를 모르면 그건 짐승이다.”

“……!”

“네가 비록 위기를 넘겼다고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이 두 분의 도움 없이 동남아시아에서 네가 그리는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감정은 감정이고 현실은 현실임을 잊지 말아라.”

김선혁의 따끔한 지적에 진혁은 끓어오르던 분노가 빠르게 식어 감을 느꼈다.

한국말로 나눈 대화라 리카렁과 라이꾸두는 자세한 내용을 몰라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김선혁의 지적은 적절했다.

뇌물 자료를 확보해 목줄을 쥐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말레이시아에 국한된 일일뿐이었다.

리카렁 정도의 영향력이라면 잠시 구설수에 오르내릴 뿐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게 분명했다.

그 대가로 진혁은 말레이시아 하나를 얻은 반면 더 많은 나라에서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 라이꾸두는 자신이 동남아시아에 발을 들여놓은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일등 공신이었다.

딸 마야도 AA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진혁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못난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감수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도움을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전에 주신 도움을 생각하며 이번 일은 잊겠습니다. 그러니 두 분도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진혁은 이 정도에서 적당히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리카렁은 그럴 수 없었다.

죽망의 방주라는 직책이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염치없는 말씀인 줄 알지만 로버트 호의 자료를 넘겨받고 싶습니다.”

“……!”

“마카오가 중국 본토에 속해 있지만 그곳 역시 경제권은 우리 화교들이 쥐고 있습니다.”

진혁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일본인인 척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죽망은 자신이 마카오에서 공작을 벌인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진혁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그 부탁은 들어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번 같은 일은 다시는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우리 내부에서 처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중국 본토에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죽망 망주로서 약속드립니다.”

“회장님은 믿습니다. 하지만 회장님이 언제까지 그 자리에 계실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이후에도 보장해 주실 수 있습니까?”

리카렁이 답을 하지 못했다.

죽망은 협의체라 모든 결정은 전체 회의에서 투표로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망주라도 결국 한 표일 뿐이었다.

리카렁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죽망에게 그 자료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동남아시아 경제계를 장악하고 있는 죽망으로부터 알라딘을 보호할 수 있는 제가 가진 유일한 카드입니다. 죽망이 회장님 같은 믿음을 갖게 해 준다면 가차 없이 돌려드리겠습니다. 그 방법은 스스로 찾으십시오.”

“음…….”

잠시 진혁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보며 생각하던 리카렁이 입을 열었다.

“회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에 앞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탕분헝 부총리께서는 어디까지 알고 계신 겁니까?”

“자인 그룹에 관련된 자료만 넘겨드렸습니다. 저 역시 사업가의 한 사람입니다. 정치가 경제에 깊숙이 개입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죽망을 상대해도 제 힘으로 이길 겁니다.”

“깊은 배려에 죽망 회원 모두를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회장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리카렁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라이꾸두가 따라 한 것은 당연했다.

두 사람이 급히 한국까지 찾아온 것은 진혁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탕분헝에 대한 걱정이 더 커서였다.

그는 강력한 반화교 정책을 폈던 노련한 정치가였다.

진혁이 획득한 자료를 이용해 다른 나라 지도자들까지 선동한다면 죽망은 최대 위기를 맞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가 잘 끝나자 분위기가 한결 풀렸다.

그 틈을 이용해 라이꾸두가 편하게 입을 열었다.

“지난 한 달은 정말 지옥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해외여행을 떠난 것은 마야를 통해서라도 회장님께 이상을 알려 드리려고 그랬던 겁니다.”

“두 분이 주신 정보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스스로 헤쳐나가신 겁니다. 젊은 혈기에 바로 쳐들어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로버트 호를 잡고 탕분헝 총리를 끌어들인 절묘한 계책에 저를 포함해서 다들 혀를 내둘렀습니다.”

진혁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려고 했었다.

적시에 막아 준 김상균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이 느껴졌다.

진혁이 입을 열었다.

“좋은 말씀을 해 주시니 저도 두 분께 한마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이번 일을 겪으면서 죽망의 힘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과찬입니다.”

뿌듯한 표정이 떠오르던 리카렁의 얼굴이 이어진 진혁의 말에 바로 굳어졌다.

“더불어 죽망의 한계도 보았습니다. 얼마 못 가 사라질 조직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번 위기를 모면했다고 우리를 너무 쉽게 판단하시는 것 같습니다.”

“죽망은 호랑이 없는 산의 여우들이었습니다.”

“말씀이 심하십니다.”

진혁에 호의적이었던 라이꾸두마저 불편을 얼굴을 했다.

갑자기 돌변한 분위기에 김선혁만 안절부절못했다. 진혁이 왜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리는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시 서로 눈싸움을 하다가 리카렁 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게 판단하신 연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번 일이 그 단적인 예입니다. 테홍녠 회장은 오만했고, 죽망은 방조했습니다.”

“우리도 그 점은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번 같은 어처구니없는 결정이 내려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죽망이 중국 본토의 지시를 거부할 수 있습니까?”

허를 찌르는 진혁의 질문에 리카렁은 물론 라이꾸두마저 기겁했다.

황쉐인 객가주가 참석한 것은 극비 중에 극비였다. 보안에 심각한 구멍이 생겼다는 방증이었다.

죽망이 최대 위기에 처했다.

진혁이 두 사람의 커진 눈을 보고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