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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242화 (242/307)

242화. 탕분헝의 노림수

“내부 배신자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믿기 힘듭니다.”

“제가 그렇게 짐작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도네시아는 물론 망주마저 반대하는 공작이 승인된 데에는 외부의 강력한 힘이 개입됐을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고맙게도 방금 두 분이 그걸 증명해 주셨고요.”

그제야 두 사람은 진혁의 격장지계에 당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레짐작으로 한 말에 스스로 인정해 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리카렁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죽망과 화교, 그리고 본토는 한 뿌리입니다. 그걸 부인하면 우리는 정체성을 잃습니다.”

“인정 못 합니다. 회장님께는 고향일지 모르지만, 여기 라이꾸두 회장님에게는 반쪽짜리이고, 그 후손들은 지금 사는 곳이 모국입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지금 죽망은 중국 공산당에게 용병일 뿐입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시겠지요. 사업의 대부분이 본토에 예속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말입니다. 그 사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는 순간에도 본토 타령만 하실 겁니까?”

“우리는 그간 수없는 위기를 맞았지만 서로 합심해서 극복해 왔습니다. 죽망의 결속력은 그 어떤 조직보다 강합니다.”

“지금까지의 위기를 합심해서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순차적으로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은 다를 겁니다. 중국 본토는 물론 아시아 전역이 커다란 전쟁터로 변할 겁니다.”

리카렁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대화는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제가 좋은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가시지요.”

김선혁이 얼른 진혁의 말을 막고 리카렁 회장을 데리고 나갔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따라가며 라이꾸두는 자꾸 뒤를 돌아봤다.

얼마 후 돌아온 김선혁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어떻게 된 놈이 무조건 네 성질대로만 하려고 하냐?”

“위기가 닥쳐오는데 고향 타령만 하고 있으니 답답하잖습니까.”

“그럼 너는 외국 친구가 한국 망한다더라 하면 그걸 덥석 믿겠냐?”

“그거랑 이거랑은…….”

“그건 네가 아니라 듣는 상대가 판단할 문제라는 거란 말이다, 이 벽창호 같은 놈아!”

김선혁의 호통에 진혁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스승 같은 존재였다.

“나도 솔직히 네 말을 백 퍼센트 믿지는 못한다. 하물며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조건 윽박질러서 될 일이 아니다. 의미 없는 일로 싸워 봤자 득보다 실이 많아. 여전히 저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다.”

“압니다.”

“모든 일이 그렇듯 큰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전조 증상이라는 게 나타난다. 오늘은 이쯤 하고 그때 다시 한번 이야기하는 것으로 해라. 그게 서로를 위해 좋다.”

“회장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네놈 때문에 내가 늙는다, 늙어.”

“아직 정정하신데요, 뭘. 그나저나 두 분은 어떻게 하고 돌아오신 겁니까?”

“오 실장 맡겨서 시설 견학을 시켜 드리라고 했다.”

“잘하셨습니다. 고생하셨는데 좀 쉬십시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다. 몸이 예전 같지가 않아.”

김선혁이 앓는 소리를 하고 돌아갔다.

그렇게 잠시 헤어졌던 두 사람은 퇴근 시간에 다시 만나 한국 호텔로 갔다.

손님들의 숙소가 그곳이었다.

진혁은 눈길이 마주치자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는 희준을 싹 무시하고 리카렁 회장에게 물었다.

“구경은 즐거우셨습니까?”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리틀 지니 매장을 보고 아주 놀랐습니다. 메이왕 매장도 그렇게 꾸미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가로수 길의 ‘리틀 지니’는 내외국인 할 것 없이 명소가 되어 있었다. 입장하기 위해 길게 줄을 늘어설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빠른 시간에 알려진 것은 SNS의 힘 덕분이었다.

진혁이 웃으며 답했다.

“모양만 요란할 뿐 실속은 없습니다. 신기술을 구현하느라 시설비가 엄청 들어갔습니다. 아마 평생을 운영해도 다 뽑지 못할 겁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그렇다고 너무 걱정은 마십시오. 제가 따로 준비하는 것도 있고, 기술은 날로 발전하니 조만간 보급형 설비가 개발될 겁니다. 그때는 두 회장님 매장에 가장 먼저 설치해 드리겠습니다.”

“회장님만 믿겠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리카렁에 이어 라이꾸두도 다시 한번 부탁을 했다.

유통 매장을 운영하는 사업가가 리틀 지니를 보고도 욕심을 내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이후 네 사람은 이런저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사무실에서 나눴던 민감한 주제는 서로 피해, 헤어질 때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로비에서 작별 인사를 했다.

“좀 더 머무르시다 가시면 좋을 텐데 아쉽습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지요. 좋은 구경에 잘 대접받았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대접하지요.”

“시간을 내서 꼭 한번 들르겠습니다. 제가 내일 배웅해 드려야 하는데 중요한 일정이 잡혀서……. 죄송합니다. 대신 여기 오 실장님이 편하게 공항까지 모셔다 들릴 겁니다.”

뒤에서 서 있던 희준이 얼굴이 이전보다 더 심하게 구겨졌다.

* * *

큰 손님을 치르고 진혁은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왔다.

개성공단 피해 기업의 대체 공단 부지는 파주로 정해졌고, 스마트팜 기술단지는 나주, 스마트 팩토리는 오송으로 확정됐다.

비효율적으로 지역이 나눠진 것은 정치권의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외부 입김이 가장 많이 작용한 것은 스마트 기술 표준화 사업자 선정에서였다.

경쟁이 과열되자 권성일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공정한 심사를 촉구할 정도였다.

분위기가 그러니 기술력에서 가장 앞선 알라딘 연구소가 사업권을 따낸 것은 당연했다.

그사이 한국해운도 알라딘의 품으로 들어왔다.

* * *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의 중앙에 위치한 푸트라 광장은 관광 명소였다.

광장 정면에 ‘페르다나푸트’라는 민트색 돔으로 이루어진 멋진 건물이 총리 집무실이었다.

진혁이 그곳을 방문했다.

“감축드립니다.”

“서 회장의 도움이 컸소.”

탕분헝이 웃는 낯으로 진혁을 맞았다.

총선 전까지 한시적 총리 권한 대행만 맡고 물러날 거라는 세간의 예상을 깨고, 탕분헝은 직접 총선에 나가 새 총리로 선출됐다.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진혁에게 전화해 들어오라고 하기에 방문한 것이었다.

집무실 소파에 앉아 비서가 내놓고 간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탕분헝이 진혁의 얼굴을 한동안 쳐다보다 말했다.

“그때는 갑작스러운 만남이어서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는데, 조사하면 할수록 서 회장은 참 대단한 사람이더군요.”

“과찬이십니다.”

“아니요. 오히려 내 표현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서 회장이 그간 이룬 일에 탄복을 하고 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나즈마 총리가 귀인 모시듯이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탕분헝의 칭찬에 진혁은 오히려 더 긴장했다. 그가 대체 어떤 요구를 하려고 이러는지 궁금증만 커졌다.

“내가 이번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팡기텍의 권력 남용과 세계 최악 수준의 비리에 분노한 민심의 영향이 컸습니다.”

“신문 기사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에 못지않게 국민들은 중국의 대규모 투자에 공포심을 느껴 왔습니다. 스리랑카 등 제3세계에 투자하면서 빚을 지워 주권을 빼앗으려는 좋지 못한 전례가 있었던 데다, 자국에서 노동자들을 데려와 일을 시키는 행태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탕분헝은 선거 공약의 최우선 순위로 ‘동서경제벨트 전면 폐기’를 내걸었다.

다른 후보자들이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 경제를 장악한 화교의 눈치를 보며 ‘재협상’ 정도로 표현한 것보다 훨씬 강력했다.

국민의 60%가 넘는 말레이시아계가 탕분헝에게 표를 몰아 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탕분헝의 말이 이어졌다.

“온갖 방해 공작에도 내가 당선되자 다급해졌는지 왕칭린이 특사까지 보내 날 초청했소.”

“……!”

“날 설득해서 동서경제벨트 전면 폐기를 뒤엎으려는 게지요. 이 나라 화교는 서 회장이 준 자료로 목줄을 쥐고 있지만, 중국은 지금의 내 힘만으로는 상대하기 벅찬 상대요.”

탕분헝의 솔직한 표현에 진혁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화교에 경제권을 장악당한 것은 단순히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들 사업 대부분이 중국에 편중되어 있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중국이 경제 봉쇄라도 하면 말레이시아 경제가 파탄 날 것은 자명했다.

“서 회장이 날 조금만 더 도와주시오.”

“……?”

“만길라 총리에게 내 뜻을 전해 주시오.”

“인도 정부의 힘을 빌리실 생각이십니까?”

“그렇소. 중국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유일한 국가이지 않습니까. 인도 역시 중국의 동서경제벨트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으니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진혁이 말끝을 흐리며 즉답을 피했다.

맞는 이야기였지만 이건 정치적인 문제였다.

사업가인 자신이 타국 간의 정치 싸움에 깊숙이 개입하는 게 맞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사업적으로 어떤 이득이 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진혁의 마음을 눈치챈 탕분헝이 준비한 미끼를 던졌다.

“조사해 보니 테홍녠이 엄청나게 해먹었더군요. 자인 그룹 자산 대부분이 국가에 예속될 겁니다. 그중 원하는 것을 하나 넘겨드리지요.”

“알겠습니다.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진혁이 바로 승낙했다.

자인 그룹은 말레이시아 제1의 기업으로 이 나라 알짜 산업은 모두 쥐고 있었다. 단기간에 입지를 다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 * *

진혁이 탕분헝 총리 집무실을 다시 찾은 것은 일주일 후 늦은 오후였다.

사정을 들은 만길라 총리는 바로 승낙했다. 중국 동서경제벨트 야욕을 막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서남아시아로 넘어간 김에 방글라데시까지 다녀오느라 늦었다.

진혁이 봉투 두 개를 내밀었다.

“만길라 총리와 나즈마 총리의 친서입니다. 두 분 모두 적극 협조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서회장이 내 부탁을 들어주셨으니 나도 약속을 지켜 드리지요. 뭘 원하시오?”

탕분헝 총리의 화끈한 성격에 진혁이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사전에 전화로 보고를 했다고 하지만, 기다렸던 친서를 받아 보지도 않고 약속부터 지키겠다고 하고 있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동안 한국에서 김선혁이 자인 그룹을 낱낱이 파악해 보고서를 보내 왔었다.

“말레이 로직스를 직접 운영하고 싶습니다.”

“말레이 로직스를요?”

“그렇습니다.”

의외라는 표정으로 묻는 탕분헝에게 진혁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재확인시켜줬다.

말레이 로직스는 육상 운송, 해상 항공 국제 운송, 물류 센터 운영, 통관, 항만 하역 등 종합 물류 서비스를 제공하는 아시아 최대 물류 기업이었다.

말레이시아 전역에 걸쳐 약 30만 평방미터, 축구장 43개 면적과 맞먹는 대규모 물류 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베트남과 싱가폴,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 대부분에 거점을 갖추고 있었다.

“난 서 회장이 유통업을 한다고 해서 그쪽을 선택할 줄 알았는데 의외군요.”

“판매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물류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에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한국에서 해운사도 하나 인수했습니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이 아닌 것 같구려. 좋습니다. 말레이 로직스를 넘겨드리지요.”

탕분헝의 결정에 진혁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함반토타 항과 한국 해운 인수에 이어 말레이 로직스까지 품에 안으며 마침내 원하던 물류망을 완성시켰다.

그 뒤 탕분헝 총리의 제안으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서로 원하는 것을 얻은 터라 식사 자리가 한없이 부드러웠다.

하지만 탕분헝이 툭 던진 말로 분위기가 일거에 긴장 모드로 변했다.

“중국 방문이 삼 일 후로 결정됐습니다. 서 회장님도 함께 가 줬으면 합니다.”

“제가 왜요?”

진혁의 입에서 즉시 볼멘소리가 나왔다.

난데없는 요구였다.

이건 단순히 말만 전해 주는 차원을 넘어 전쟁터에 직접 뛰어들라는 요구였다.

“사업과 정치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서 회장님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알라딘 정도 되면 원하지 않더라도 각국의 정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성장하면 할수록 연관성이 커지면 커졌지, 작아지지 않을 겁니다.”

“압니다만, 이런 식은…….”

“서 회장은 이미 함반토타 항 인수로 중국의 야욕을 막은 전적이 있습니다. 한 번 더 나선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지요. 게다가 투게더 페스티벌까지 열었으니 중국과 경쟁 관계의 길에 들어선 겁니다. 중국을 상대해야 한다는 점에서 서 회장과 내가 가는 길은 같습니다.”

탕분헝의 말은 반만 맞았다. 그는 중국 정부와 싸우지만 진혁은 알리바마와 경쟁 관계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당시는 심해항이 필요해 나선 일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러나 막 진혁이 거부 의사를 밝히기도 전에 탕분헝이 먼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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