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베이징의 승부
“내가 처음 총리가 됐을 때 가장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사업 중 하나가 국민차 생산이었습니다. 부가 가치가 높고 고용 증대 효과도 뛰어날 뿐 아니라 수출 증대와 무역 수지 개선도 가능한, 이점이 많은 사업이지요. 하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 중국 업체에 넘어갈 처지가 됐습니다.”
탕분헝 총리의 주도로 1980년 중반 세워진 말레이 자동차는 동남아에선 유일하게 자동차 자체 개발 능력을 갖춘 업체였다.
한때 말레이시아 자동차 시장의 74%를 차지했으나 시장 개방 등의 영향으로 지금은 시장 점유율이 10%대로 내려앉아 있었다.
구제 금융으로 연명하며 매각을 추진해 우선 협상 대상자로 중국 업체가 선정된 상황이었다.
진혁이 침을 삼키고 물었다.
“……그걸 제게 주시겠다는 겁니까?”
“아직 계약을 한 게 아니니 못 할 이유가 없지요. 문제는 국제 입찰까지 붙여 정한 것을 일방적으로 바꾼 것에 대한 국제 사회의 비난입니다. 중국 업체가 먼저 포기하는 게 가장 모양새가 좋긴 한데…….”
“중국행에 동행하겠습니다.”
진혁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바로 승낙했다.
동행 한마당 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끈 알라딘 연구소의 뛰어난 4차 산업 기술을 보면서 진혁은 보람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다.
이에다 회장을 몰락시키면서 닛뽄 자동차의 전기차와 무인 자율 주행차의 핵심 기술 관련 자료를 확보했었다.
당시에는 자동차 산업에 욕심이 없어 태후 자동차에게 넘겨줬던 것을 크게 후회하고 있었다.
도이에 중공업에서 이를 일부 활용한 모터사이클 신모델이 크게 히트 치는 것을 보니 그 마음이 더 커졌었다.
탕분헝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하신 결정입니다. 우리나라는 6억 5천만 명의 거대 경제권인 아세안 회원국이라 무관세로 차량을 수출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말라카 해협을 이용해 수송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도 갖추고 있고요.”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총리 취임식에 직접 와 주신 인도네시아 대통령께서 국민차 생산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더군요. 함께 생산해 보자는 제안까지 하셨습니다.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면 큰 성과를 거두실 겁니다.”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진혁이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탕분헝이 왜 아시아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불렸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주변을 활용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 도움이 되게 일을 추진하면서 상대방이 적극적으로 돕게 했다. 자신이 추구하는 ‘동행’ 정신과도 일맥상통하고 있었다.
중국 정부도 그걸 알기에 왕칭린이 서둘러 불러들인 것이다.
진혁은 적극적으로 도우면서 탕분헝의 이런 능력을 배우겠다며 의지를 다졌다.
* * *
탕분헝 총리 일행이 베이징에 도착한 것은 늦은 밤이었다.
외교 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직접 공항까지 나가 영접할 정도로 중국 측 의전은 각별했다.
탕분헝의 마음을 붙잡기 위한 총력전을 펼칠 태세였다.
덕분에 총리 특별 자문관이라는 급조된 직책으로 함께 온 진혁도 호사를 누리게 됐다.
최고급 호텔에 최고급 식사.
어딜 가도 극빈 대접을 받았다.
다음 날은 베이징 관광을 하며 쉬었다가 인민대회당을 방문했다.
의장대를 사열하고 마주한 이는 중국내 서열 2위인 후타오 총리였다.
왕칭린 주석과의 면담에 앞서 민감한 사항에 대해 사전 의견 교환을 하며 입장을 정리하려고 만든 자리였다.
“정세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중국의 대 말레이시아 우호 정책은 변함이 없습니다.”
“말레이시아의 새 정부 역시 대중 우호 정책을 이어가고, 이번 방중 역시 중국과 협력을 한 단계 더 강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초반은 의례적인 인사들이 이어졌다.
후타오와 탕분헝은 물론 배석한 다른 각료들도 서로 덕담을 하는 모습이 마치 그저 친목이나 다지자고 만난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가 있었는데, 바로 진혁이었다.
중국의 만만디 전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가 심했다.
지루해하고 있을 때 낯이 익은 이가 눈에 들어왔다.
우핑 부총리.
함반토타 항을 인수할 때 미얀마에서 만난 적이 있어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안면이 있는 인물이었다.
눈길이 마주치자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네려고 했다.
“저기…….”
하지만 우핑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에게 진혁은 절대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였다.
“흥!”
그가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터져 나온 코웃음이라 그 파장이 컸다.
모두의 시선이 우핑에게 쏠렸다.
갑자기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자 우핑이 뭐라 변명하려는 순간 탕분헝이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아, 이분이 우핑 대인이셨군요. 듣던 대로 생기신 것도 호인이십니다. 꼭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
탕분헝의 갑작스런 칭찬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우핑이었다. 처음 만난 사이라 이런 칭찬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의아한 표정을 하고 있는 후타오 총리에게 탕분헝이 말했다.
“여기 우핑 대인께서는 스리랑카의 성난 민심을 고려해 이미 공사 중인 항만 건설 프로젝트를 중단한 것은 물론, 항만 운영권도 다른 나라가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넓혀 주셨습니다. 대 중국의 위상에 걸맞는 대인의 행동을 직접 실천하신 분이지 않습니까?”
“아……. 예.”
“현재 말레이시아의 현실도 스리랑카와 다르지 않습니다. 동서경제벨트에 대한 이런저런 악소문으로 국민들의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젝트를 강행했다가는 그때처럼 폭동이 일어날 겁니다.”
그제야 다들 탕분헝이 왜 우핑에게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스리랑카의 선례를 내세워 양보를 얻어내려는 전략이었다.
중국이 가장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후타오가 얼른 그런 분위기를 차단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탕분헝의 말이 더 빨랐다.
“서 회장님은 뭐 하십니까?”
“……?”
“은인을 만나면 감사 인사를 하는 게 인간의 도리입니다.”
“아……. 대인의 통 크신 양보에 그때나 지금이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이미 지난 일이니 괘념치 마시오.”
우핑이 최대한 짧게 답하며 얼른 분위기를 돌리려 했지만 진혁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왕 돕기로 나선 일이니 확실히 하는 게 나았다.
“대인께는 수많은 일 중에 아주 작은 일일지 몰라도, 제겐 목숨을 구해 준 큰일이었습니다. 그때의 도움으로 이렇게 살아나 다시 뵙게 됐는데 어찌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일부러 길게 말하며 분위기를 확실히 이쪽으로 끌어오는 진혁이었다.
탕분헝이 흡족한 표정을 짓고는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후타오에게 말했다.
“동서경제벨트 사업의 참여국은 60여 개 국이 넘습니다. 사업비만도 1조 4천억 달러가 넘는 아주 큰일입니다. 그중 말레이시아의 일은 아주 소소한 부분일 뿐입니다.”
“말레이시아의 동부 해안 고속철도는 우리만 이득을 보자고 계획됐던 사업이 아닙니다. 낙후된 동부 해안 지역에 혜택이 돌아간다고 판단해 팡기텍 전 총리도 승낙하신 일입니다.”
“동부 해안이 개발된다면야 좋지요. 그런데 팡기텍이 화교의 꼬임에 넘어가 국고를 탕진하는 바람에 국가 부채가 250억 달러로 불어나는 등 재정이 말이 아닙니다.”
“저희가 부담금 비율을 높일 용의도 있습니다. 이자율도 대폭 낮추고요.”
“총리께서는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레이시아의 저력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 정도 자금은 당장이라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저자세로 일관하던 이전과 달리 탕분헝이 허리를 꼿꼿하게 하고 꾸짖듯이 말하자 장내의 분위기가 일순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얼굴이 붉어진 후타오를 노려보던 탕분헝이 진혁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서 회장님이 인도에 다녀온 일을 말씀해 주십시오.”
“만길라 총리께서는 말레이시아와의 경제 협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시겠다고 했습니다. 원하신다면 FTA는 물론 대규모 투자도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이를 논의할 실무 협의체 구성도 제안하셨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방글라데시와 알라딘도 사업 참여를 희망합니다.”
다시 후타오에게 시선을 돌린 탕분헝이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경제성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계획된 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자는 겁니다. 귀국이 국제관례를 내세워 배상금을 요구한다면 드리지요. 도와주겠다는 곳은 많습니다. 그걸 원하십니까?”
“아닙니다. 처음 말씀드린 대로 우리 정부는 말레이시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그런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욕심을 내려놓는 일이 먼저 선행되어야겠지요. 그 점을 주석께 잘 전달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후타오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사전 만남은 완벽한 패배였다.
상대는 이미 사전에 완벽한 준비를 해 놓고 이 자리에 나온 반면, 자신들은 그걸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번 만남을 준비한 우핑을 바라보는 후타오의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홀가분한 표정으로 인민대회당을 나온 탕분헝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내일 일정이 어떻게 되지?”
“항저우 등 저장성 일대의 자동차 공장 등을 둘러보는 산업 시찰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안내는 창펑 자동차 회장이 직접…….”
“알리바마 방문을 추가해.”
“예?”
외교부장이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일정은 이미 오래전에 양국 실무자들이 이동 경로, 경호 등을 고려해 협의된 것이었다.
쉽게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외교적으로도 큰 결례였다.
탕분헝이 재차 말했다.
“중국은 공산당이 지시하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사회야. 내가 알리바마를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하면 밤새서라도 준비할 거야. 걱정 말고 전하기나 해.”
“……알겠습니다.”
떨떠름한 반응을 무시한 탕분헝이 곁에 서 있는 진혁을 보고 말했다.
“좀 전에 아주 잘해 준 것에 대한 보답입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게 제일 빠른 길이지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잘 보고 배우겠습니다.”
진혁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답했다.
탕분헝이 일부러 만들어 준 귀한 기회였다. 최대한 얻어내야 했다.
* * *
“빌어먹을 자식.”
전화기를 내려놓는 허융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갑작스런 시찰지 변경 요청으로 한순간도 쉬지 못했다.
난색을 표하는 알리바마는 공산당의 힘으로 누르면 되니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경호를 담당한 안전기획부와 업무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감정이 좋지 않은데 오늘 만남으로 우핑이 곧 쫓겨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상황이었다.
주석궁에서 영접에 만전을 기하라는 지침이 하달된 것을 내세워 어렵게 허락을 받아냈다.
사정이 그러다 보니 호텔에서 편히 쉬고 있을 진혁에게 이가 갈리는 것은 당연했다.
* * *
중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여행지인 항정우에 위치한 알리바마는 계열사의 여러 건물이 모여 거대한 타운을 형성하고 있었다.
공개한 건물 내부는 깔끔하면서도 동선을 최소화하여 미래 지향적으로 지어져 있었다.
안내는 부회장이 했다.
출발하기 전 중국 외교부장이 하윤 회장이 해외 출장 중이라고 해서 실망하고 있는 중이었다.
각 층마다 직원들의 휴식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각기 특색이 있었다.
미술관, 음악 감상실, 영화관, 심지어 게임방이 설치된 곳도 있었다. 직원들의 다양성을 최대한 존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진혁은 핸드폰 메모장에 그 내용을 빠짐없이 적었다.
좋은 것은 배운다.
한 가지 더 눈에 띄는 점은 오가는 직원들 중 양복을 입은 이는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
편한 차림에 노트북을 펼쳐 놓고 회의하거나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심지어 안내를 맡고 있는 부회장도 청바지에 가벼운 티셔츠 차림이었다.
고령인 탕분헝을 고려해 중간층에 마련된 휴게실에서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진혁은 한쪽 벽면 앞에 서 있었다.
글로벌 기업답게 다양한 나라의 언어로 벽면이 채워져 있었는데, 모두 같은 문장이었다.
즐겁게 일하고 열심히 살자.
하윤의 어록 중 하나였다.
한국어도 보였다.
그때 갑자기 옆에 누군가 다가와 서는 기척에 무심코 시선을 돌렸던 진혁은 기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