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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244화 (244/307)

244화. 거인과의 만남

“결국 이렇게 만나는군요. 일행 중에 서 회장님이 포함되었다고 해서 급히 돌아왔는데도 좀 늦었습니다.”

하윤 회장이었다.

진혁이 얼른 인사를 했다.

“일전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서 회장님을 위해 한 일이 아닙니다. 멋진 경쟁 상대가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웠을 뿐입니다. 기대보다 훨씬 더 잘해 주셔서 제가 오히려 더 감사합니다. 투게더 페스티벌의 성공은 우리 직원들의 경쟁심을 일깨워 줬습니다. 이번 독신절 행사는 예상치를 훌쩍 넘을 겁니다.”

“기대하겠습니다. 그럼 전 내년에 그걸 뛰어넘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 죽어라 달려야겠군요.”

“하하하.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군요. 맞습니다. 경쟁은 결코 나쁜 게 아닙니다. 서로의 의욕을 끌어올려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가져옵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그런 선의의 경쟁이 불가능합니다. 그게 안타깝습니다.”

하윤의 거침없는 표현에 놀란 진혁이 빠르게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진혁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빠른 경제 성장으로 중국에는 수많은 갑부들이 속출해 국민들이 그들을 선망하거나 추종하게 되는데, 중국 공산당은 그걸 위기로 받아들인다.

우상은 자신들만의 전유물이어야 한다는 아집 때문이었다.

어느 수준까지의 성장은 인정하지만, 자신들이 정한 기준을 넘기면 각종 누명을 씌워 제거해 버리는 일들이 조만간 일어난다.

하윤도 그렇게 사라지는 인물 중 하나였다.

진혁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도움을 받았으니 갚는 게 도리였다.

“외람되지만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방금 같은 말씀은 앞으로 자제하셨으면 싶습니다. 아무리 친한 상대라도 말입니다. 그래야 저랑 오래오래 선의의 경쟁을 펼칠 수 있습니다.”

하윤이 날카롭게 변한 시선으로 진혁을 노려봤다. 그 시선이 얼마나 강렬한지 바위라도 뚫을 기세였다.

모두를 굴복시킨 하윤의 힘이었지만 진혁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 시선을 받아냈다.

눈에 힘을 푼 하윤이 시선을 벽면으로 향하며 말했다.

“아실지 모르지만 전 시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힘든 경제 사정으로 공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보면서 지식 전달보다는 경제 성장이 우선이라고 생각해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지크캐피탈의 존 회장님의 도움으로 그 꿈은 거의 이뤘습니다. 때가 되면 멈췄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다시 할까 합니다.”

“회장님.”

하윤의 처연한 음색에 진혁은 그가 이미 자신에게 닥칠 미래를 예상해 준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비범한 인물이었다.

“서 회장님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이 나라 스타트업에 투자를 많이 해 놓으신 것으로 압니다. 그들을 국가가 아닌 능력만으로 평가해 주십시오. 제가 언제 떠날지 모르지만 그게 제일 걱정입니다.”

“그 점은 걱정 마십시오. 저도 회장님처럼 정치와 사업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능력만 있다면 설혹 북한 기업이라 해도 머리 숙여 모실 겁니다.”

“하하하. 아주 멋진 답변이었습니다. 이제 안심해도 될 것 같습니다.”

만족한 하윤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데 그게 문제가 됐다.

쉬고 있던 이들이 모두 이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이런. 아무래도 다음 안내는 제가 직접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즐거운 만남이었습니다.”

“저도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서로 마주 보고 깊숙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존중하는 상대에 대한 배려였다.

이후 하윤은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편한 얼굴로 안내를 맡아 했다.

그에 반해 진혁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알라바마를 나와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면서 탕분헝 총리가 물었다.

“알리바마 회장과의 대화가 안 좋게 끝난 건가?”

“아닙니다. 서로에게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런 건가?”

“갑자기 인생이 덧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하하하하. 서 회장이 농담도 잘하는 구려.”

크게 웃는 탕분헝에게 시선을 돌린 진혁은 고개를 돌려 저 멀어져 가는 알리바마 건물을 바라봤다.

저곳 어디선가 하윤 회장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다음에 도착한 곳은 창펑 자동차 공장이었다.

느끼하게 생긴 창펑 회장은 아무에게 보여 주지 않는 극비라며 너스레부터 떨었다.

하지만 말레이 자동차 인수로 한 가족이 됐다며 4차 산업 기술이 도입된 일부 공정과 개발 중인 자율 주행차까지 보여 줬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진혁은 아니었다. 이보다 더 뛰어나면서도 이미 완성된 기술을 보유한 터라 감흥이 없었다.

시찰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탕분헝이 뜬금없이 물었다.

“자신 있습니까?”

“저 정도는 애들 장난입니다. 더 멋진 제품을 보여 드리지요.”

“자신감 넘치는 그 모습이 부럽구려. 기대하지요.”

말레이 자동차 공장 인수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음 날 열린 왕칭린 주석과의 만찬은 이례적으로 배석자 없이 진행됐다.

둘 다 영어가 능숙해 편하게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자는 뜻이라고 했지만, 진혁의 참석을 막으려는 의도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 다음 날.

세계 언론의 뜨거운 관심 속에 탕분헝의 기자 회견이 열렸다.

“나는 중국의 동서경제벨트 사업을 적극 지지하고, 앞으로도 지속적인 참여를 바라고 있습니다.”

예상과 전혀 달리 백기 투항하는 발언에 기자들이 술렁거렸다.

“다만, 말레이시아 새 정부의 재정이 극도로 열악해 계획된 프로젝트를 수행할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을 왕칭린 주석도 이해해 주셨습니다. 이에 두 나라 간 논의됐던 프로젝트는 말레이시아 경제 사정이 좋아질 때까지 중단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상입니다.”

탕분헝은 쏟아지는 질문을 무시하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B22

기내에서 관련 장관들과 후속 대책을 논의하고 혼자가 된 탕분헝이 진혁을 따로 불렀다.

“이번에 서 회장의 도움이 컸습니다.”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중국이 위약금 청구와 경제 보복을 하지 않는 대신에 ‘전면 폐기’를 ‘잠정 중단’으로 발표해 달라고 해서 받아들였습니다.”

“이해합니다.”

명분보다는 실리가 우선이라는 건 자신도 같은 생각이었다.

탕분헝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날카로운 시선으로 물었다.

“팡기텍의 스캔들을 조사하는 과정에 알게 되었는데, 해외 비자금 대부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더군요.”

“그렇습니까?”

“그래서 중국 정부에 로버트 호의 신병 인도를 요청했는데 그쪽에서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

“그자가 중국으로 들어오기 전에 마카오에서 비자금을 빼앗겼다고 주장하는데, 그게 서 회장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더군요.”

“치졸한 이간질입니다. 총리님과 저의 신뢰를 깨려는 얄팍한 수단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자신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자를 넘겨줘서 조사하게 하면 되는데 감춘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지요.”

진혁은 최대한 버텼다.

리카렁 회장은 본토에 보고하지 않았다고 했다.

최악의 경우 로버트 호의 신병을 넘겨준다고 해도 비자금 탈취는 흔적도 없이 이뤄진 일이었다.

빈센트와 BLC의 기술을 믿었다.

이렇게 말로만 떠드는 게 어느 곳에서도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탕분헝이 눈빛을 풀고 말했다.

“정신이 이상해져 정신 병원에 가뒀다고 하는데, 아마 놈들이 강압적인 방법으로 자백을 받아내려다가 실패해서 그런 것 같소. 그 돈만 있으면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이 되는 터라 잠시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이해해 주시오.”

“국가부터 생각하셔야 하는 자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사라진 비자금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그 이상을 투자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 시작은 말레이 자동차가 될 겁니다. 왕칭린 주석과의 합의 내용에 그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인 진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말레이시아에 도착한 탕분헝은 기자들을 불러 방중 결과를 알렸다.

모든 동서경제벨트 프로젝트의 무기한 연기와 더불어, 멈췄던 국민차 생산을 재개하겠다는 경제 개발 계획도 함께 발표했다.

이에 서방 언론들은 일제히 동서경제벨트가 좌초됐다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중국 언론들은 ‘잠정 중단’이라며 애써 평가 절하했다.

그와는 별도로 창펑 자동차 회장이 그룹 효율화 작업의 일환으로 말레이 자동차 인수를 중단하기로 했다는 기사를 짤막하게 내보냈다.

그 시각, 진혁은 인도로 건너가 만길라 총리를 만나 탕분헝 총리의 방중 결과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번에도 중국의 야욕을 멋지게 분쇄시켰군요.”

“탕분헝 총리께서 하신 일입니다. 총리께서는 인도 정부의 협조에 감사드린다며, 약속한 FTA와 투자 협정에 대한 실무자 회의를 조속히 시행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참 반가운 소식이긴 한데……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도 듭니다.”

“……?”

예상치 못한 반응에 진혁이 긴장했다.

“방글라데시는 우리보다 먼저 알아서 그렇다고 하지만, 내가 그렇게 부탁했는데도 다른 나라 일만 챙기시니 하는 말씀입니다.”

“오해십니다. 그동안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실행을 못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마침 적당한 것을 찾았습니다.”

“그래요? 뭡니까?”

“스마트 시티입니다.”

“그거 반가운 소리입니다.”

만길라 총리가 당장 반색하며 화답했다.

그는 2년 전 극심한 도시 밀집 현상으로 인해 심각한 교통 체증과 대기 오염 등 많은 도시 문제를 해결하고자 스마트 시티 건설 계획을 발표했었다.

올 초에 1단계 사업지 스무 곳을 발표해 신청을 받았는데, 절반 가까운 곳에서 신청자가 없는 참혹한 성적표를 받았다.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은 예산 부족으로 참여 기업의 초기 재정 부담이 크고, 중앙 정부가 아닌 각 지방 정부가 주도하는 사업이라 행정 처리가 복잡하다는 단점 때문이었다.

“남부 벵갈루루 스마트 시티를 맡겨 주시면 최고의 신도시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거기에 추가적으로 다른 스마트 시티의 주택 건설 부문에도 참여하고 싶습니다.”

만길라 총리의 눈이 번들거렸다.

벵갈루루 스마트 시티 사업비만도 1조 루피, 즉 100억 달러였다. 게다가 그중 절반가량은 선정된 사업자가 책임져야 했다.

먼저 자기 자본으로 건물을 짓고 분양해서 수익금을 회수하는 방식이었다.

5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겠다는 말이었다.

거기에 다른 곳에도 투자해 준다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서 회장님의 통 큰 투자 결정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부가 도울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이번 일을 도우면서 탕분헝 총리께서 제게 따로 부탁하신 일이 있습니다.”

“……?”

“중단된 국민차 생산을 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약속은 했는데 자동차 생산기술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지요.”

“그래서 적당한 기업을 인수하는 게 낫겠다 싶어 조사하다가 하나 찾았습니다.”

“우리나라 기업을 인수하겠다는 겁니까?”

만길라 총리의 눈이 이전과 달리 날카롭게 변했다.

스마트 시티 건설과 자동차 회사 매각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아니, 오히려 자동차 산업의 중요도가 훨씬 더 높았다.

인도 정부가 집중 육성 사업으로 지정해 전략적으로 성장시키는 중이었다.

절대 넘겨줄 수 없는 산업이었다.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한국 기업이니 안심하십시오.”

“휴. 다행입니다. 그런데 한국 기업 인수를 왜 제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회사 소유권을 현재 메흐타가 가지고 있습니다.”

진혁은 극동자동차에 대해 들려줬다.

극동자동차는 한국의 SUV 전문 자동차 업체로 국내는 물론 중동 등 해외에서 더 호평 받을 정도로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기업이었다.

하지만 IMF 파고 앞에서는 그런 명성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모그룹의 경영 위기로 워크아웃에 들어갔다가 중국 업체에 피인수됐지만 기술만 빼앗긴 채 다시 인도의 메흐타 자동차로 팔려 가는 비참한 신세였다.

만길라 총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메흐타 자동차가 소유하고 있는 극동자동차를 넘겨 달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음……. 제가 아무리 총리지만 민간 기업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업을 함부로 넘겨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오히려 소개해 준 걸 총리님께 고마워하며 얼른 넘기려고 할 겁니다.”

예상과 전혀 다른 말에 만길라 총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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