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자동차 산업 진출
“메흐타가 극동자동차를 인수한 것은 SUV 기술이 필요해서였습니다. 그간 그 기술은 충분히 빼냈고, 지금은 생산 기지 정도로 여기고 있어 한국 내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거기에 해고자 복직 문제까지 걸려 있어 골치깨나 아파할 겁니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잘못되면 한국 국민들에게 인도 기업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지겠군요.”
“맞습니다. 극동자동차뿐만 아니라 그 당시 외환 위기로 외국계 기업에 넘어간 한국 내 자동차 기업이 두 개나 더 있어 선택의 폭은 넓습니다. 이 나라를 생각해 먼저 제안한 것일 뿐, 반드시 극동자동차일 이유는 없습니다.”
“아닙니다. 그런 사정이 있다면 제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드려야지요. 최대한 빨리 결정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너무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자동차 시장도 경쟁이 치열해서 매물로 나온 기업은 많습니다.”
진혁은 마지막까지 여차하면 다른 기업을 인수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여 주고 나왔다.
호텔로 가자 모두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오희준 비서실장과 한상국 기획실장이 건너왔고, AA 선병식 회장도 와 있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은 여러분이 더 많이 하셨지요. 한국에서 제때 조사해서 자료들을 보내 주는 바람에 일이 잘 흘러갔습니다. 먼저 현재까지의 진행 상황부터 보고해 주세요.”
선병식이 먼저 보고를 했다.
“자인 그룹이 보유하고 있던 말레이 로직스의 지분은 32% 정도인데, 450억 원 정도에 매수하는 게 적당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제안하겠습니다. 극동자동차는 어떻습니까?”
이번에는 한상국과 오희준이 차례로 보고를 했다.
“메흐타가 지분 75%를 5억 달러에 인수했습니다만, 당시 약속한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아 여전히 적자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기술 먹튀’가 아니냐는 논란에 휩싸여 있습니다.”
“거기에 노사가 합의한 해고자 전원 복직도 진행율이 30%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라 노사 관계가 굉장히 좋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극동자동차를 인수하는 게 맞는지 의문을 제기한 이가 더 많았습니다.”
“조사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하지만 전 여러 가지 악조건에 불구하고 극동자동차를 인수할 생각입니다.”
실무자들의 의견을 우선적으로 채택하던 평소의 모습과 다른 진혁의 결정에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가 극동자동차를 선택한 것은 특화된 SUV 전문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서입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극동자동차가 생산한 SUV 차량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인기가 높습니다. 특히나 사막 등 주행 여건이 좋지 않은 중동에서 더 그렇습니다. 알라딘의 주 시장이 그곳이라 시너지 효과가 클 겁니다.”
그제야 다들 눈이 커졌다.
진혁은 국내가 아니라 세계 시장을 노리고 있었다.
“또한 극동자동차는 메흐타에 기술을 빼앗긴 것만이 아닙니다. 단순 생산 기지 역할이었지만, 덕분에 상대적으로 뒤떨어지던 승용차 관련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닛뽄 자동차로부터 획득한 기술을 더한다면 말레이시아의 국민차 생산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듣고 보니 회장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저희가 시야가 좁아 국내만 보다 보니 큰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극동자동차 인수 준비에 박차를 가하겠습니다.”
한상국의 생각에 진혁이 제동을 걸었다.
“그건 아니지요. 여러분은 극동자동차는 잊고 다른 업체를 인수하는 작업을 해 주십시오.”
“……?”
모두 표정이 다시 한번 의아하게 변했다. 이야기의 전후가 전혀 달랐다.
진혁의 웃으며 말했다.
“극동자동차 인수에 대해 만길라 총리와 대화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쪽은 제가 여기서 오희준 실장과 단둘이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한 실장님은 한국에 돌아가 김선혁 회장님과 인수가격을 낮출 수 있게 분위기만 조성해 주십시오. 선 회장님은 말레이 로직스 인수 작업을 해 주시고요.”
“아…….”
그제야 다들 이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업체를 인수할 수도 있다는 행동을 보여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다음 날.
예상대로 만길라 총리가 연락을 줬다.
메흐타 자동차에서도 반응이 긍정적이라며 만나 보라고 했다.
그러나 협상은 쉽지 않았다.
한 푼이라도 더 받아 내려는 메흐타와 가져간 기술료와 적자 구조, 거기에 해고 복직 문제까지 거론하며 가격을 대폭 낮추려는 진혁.
어느 한쪽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때 한국에서 지속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알라딘 그룹.
자동차 산업 진출 선언.
이후 김선혁 회장이 국내 다른 자동차 업체와 연쇄적인 만남을 가지며 인수 협상을 벌였다.
만남이 이루어질 때마다 해당 업체의 주가가 크게 출렁거렸다.
결국 다급해진 메흐타 자동차가 먼저 손을 들었다.
보유하고 있던 지분 전부를 인수가의 절반인 2억 5천만 달러에 넘겨주는 데 합의했다.
* * *
인도의 일을 마무리한 진혁은 방글라데시로 넘어갔다.
새로 개항한 소나르 공항에 도착하자 손민한이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남부 경제 특구는 이제 완전한 공업 도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대규모로 들어선 공단에서는 기계가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고, 외곽으로는 경전철이, 넓은 도로에는 친환경 수소 전기차가 쌩쌩 달리고 있었다.
고층 빌딩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고, 한쪽에 새로 지어 산뜻하게 생긴 아파트 사이로 모스크와 십자가가 보였다. 병원과 학교도 보였다.
“최남단 매립지에는 인도네시아 시멘트 공장에서 직접 제작한 케이슨의 설치가 완료되었습니다. 랑가마티의 산사태 복구 작업도 시작해서 매립에 필요한 흙은 즉시 반출이 가능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후 손민한이 이런저런 보고를 했는데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사무실로 가자 알라딘 건설의 한인갑 사장과 이영석 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부장님이 잘 조사해 준 덕분에 벵갈루루 스마트 시티 건설 사업과 다른 곳의 주택 건설 사업에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알라딘 건설에서는 관련 전담팀을 구성해 준비에 만전을 기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한인갑에게 진혁이 물었다.
“장 부사장님이 맡았던 모듈러 자재 생산 준비는 완벽하게 된 겁니까?”
“전혀 문제없다면서 언제 시작하는지 오히려 성화입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동서남아시아는 이제 막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어 주택 건설 수요는 무궁무진합니다. 수주는 걱정 마시고 기술 축적에 전념해 주십시오.”
“그래서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저희도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회장님이 한 번씩 가져오시는 사업이 워낙 덩치가 크다 보니 지금의 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건설이라는 게 완공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한 사업인데, 진혁이 신규 수주를 받아내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수주한 사업들도 한결같이 신도시 건설 같은 대형 프로젝트다 보니 알라딘 건설만으로는 벅찬 게 현실이었다.
진혁이 물었다.
“한 사장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현재 한국 건설 업체들은 국내외 경기 하강으로 실적 악화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구조 조정 작업 중이라 우수한 인력들이 쫓겨나고 있습니다. 그들을 받아들였으면 싶습니다.”
“필요한 인력이라면 얼마든지 채용하십시오. 하지만 제 계획이나 건설 경기가 예상과 다를 수 있으니, 일부 사업은 국내 건설사와 컨소시엄을 구성하든지 해서 부담을 줄이는 방안도 함께 고민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얼마간 더 AS 사업 전반에 대해 대화를 나눈 진혁은 알라딘 복지 재단 분소를 찾아갔다.
길게 자란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서류를 들여다보던 김연희의 놀란 눈을 보고 말했다.
“커피 한잔 얻어먹으러 왔습니다.”
“잘됐네요. 저도 마침 커피 생각이 나던 참이었거든요. 나가요.”
“어딜요?”
“제가 아주 맛있는 커피를 내리는 가게를 알고 있거든요.”
김연희가 야릇한 미소를 머금으며 안내했다.
밖으로 나와 얼마쯤 걸어가자 번가가가 나왔는데 길 양옆으로 이런저런 가게들이 들어서 있었다.
김연희가 그중 ‘CAFE’라는 간판이 걸린 가게로 들어갔다.
“나 왔다.”
“어서 와요, 언니……. 흑.”
커피를 내리던 젊은 아가씨가 반갑게 인사를 하다가 뒤따라 들어온 진혁을 보자마자 눈물부터 흘렸다.
김연희가 얼른 다가가 안으며 달랬다.
“왜 또 바보같이 울고 그래?”
“너무…… 너무 고마……. 으앙.”
이제는 아예 대성통곡을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진혁은 놀라 어쩔 줄 몰라 당황했다.
한참만에 울음을 그친 아가씨를 다독여 떼어 놓고 김연희가 돌아왔다.
“아직까지 서 계시네요. 앉으세요.”
“왜 저러는 겁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진혁이 물었다.
“회장님께 고마워서 그렇지요.”
“……?”
“조르와는 미혼모예요. 미얀마 군인에게 성폭행을 당해 아이를 낳았어요. 그 때문에 로힝야족 내에서도 따돌림을 받아 어렵게 살고 있다가 나를 만나게 됐어요.”
딱한 사정을 들은 김연희가 이 가게를 차려 장사를 하게 도와줬다.
“그럼 소장님께 고마워해야지, 왜 저를 보고 그런답니까? 사람 당황스럽게.”
“건물도 지어 주고 임대료도 받지 않게 해 주신 게 회장님이시잖아요. 제가 지원해 준 자금도 결국 회장님이 사재를 털어 마련해 주신 거고요. 조르와만이 아니에요. 로힝야 모두가 회장님께 감사하고 있어요.”
김연희의 칭찬에 진혁은 속으로 뜨끔했다.
사재를 털었다는 것은 오해였다.
진혁은 헐값에 사들인 땅을 개발해서 일부를 비싼 값에 되판 덕에 훨씬 더 많은 이득을 보고 있었다.
“모두가 합심해서 이룬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다른 이야기를 합시다.”
진혁은 이야기가 길어지면 속마음을 들킬 것 같아 얼른 화제를 돌렸다.
이후 김연희가 이런저런 로힝야의 고충을 들려줄 때마다 진혁은 주저 없이 지원해 주라고 했다. 고개가 끄덕이는 모습에 김연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무조건 지원하시다가 부도나시는 거 아니에요?”
“망하면 로힝야에게 얹혀살면 되지요. 자금은 내가 알아서 준비할 테니까, 김 소장님은 도울 방안만 강구하세요.”
진혁이 호탕하게 말했다.
최남단의 매립지가 황금의 땅으로 개발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진혁은 제일 큰 식당을 빌려 직원들 전체를 불러서 회식을 했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술자리가 끝나 돌아가는 길에 술이나 깨고 가자고 해서 조르와의 카페에 다시 들렀다.
서진혁, 이영석, 김연희, 샤물, 아노아르. 우연찮게 초창기 멤버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모이니 처음 이곳에 왔을 때가 생각납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회장님을 처음 뵀을 때만 해도 뭐 이런 무모한 사람이 있나 했습니다.”
이영석의 말에 진혁이 손사래를 쳤다.
“무모한 거로는 여기 김 소장님이 한 수 위지요. 무조건 찾아와 학교를 도와달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땐 정말 절박했단 말이에요.”
김연희도 지지 않고 대들었다.
이후 다들 과거사를 늘어놓으며 웃고 떠들었다. 장과 사람은 묵을수록 가치가 있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진혁은 오랜만에 편한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이렇게 웃으며 힘든 과거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영석이 샤물에게 물었다.
“회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지 않았냐?”
“제게요?”
진혁의 시선을 받은 샤물이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업을 하고 싶습니다, 회장님.”
“사업을?”
“허락해 주시면 하이퍼마켓 같은 유통 매장을 운영하고 싶습니다.”
샤물도 그간 재산을 상당히 모았다.
진혁은 방글라데시의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에 따라 이곳 땅을 사들일 때 샤물네 가족들의 명의를 빌렸었다.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이익금의 일부를 그의 몫으로 할당해 준 덕분에 모인 돈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진혁이 말했다.
“남자가 하고 싶은 건 해야지. 해 봐라.”
“감사합니다, 회장님.”
“시작했으면 끝을 보는 게 남자의 행동이다. 책임감을 갖고 최선을 다해야 할 거다.”
“회장님이 실망하시지 않게 꼭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샤물은 물론 아노아르까지 고개를 숙이고 나자 김연희가 투덜거렸다.
“남자 엄청 찾네. 지금 말씀 남녀 차별 발언인 건 아시지요?”
“여긴 방글라데시잖습니까.”
“흥이네요.”
“하하하하.”
“호호호호.”
김연희의 토라진 모습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무거웠던 분위기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