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국민차 생산 계획
방글라데시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인천 공항에 도착한 진혁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출국장을 나섰다가 기겁을 했다.
“헉.”
출국장 앞은 기자들은 꽉 차 있었다.
방송 카메라만 해도 수십 대였고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국민들은 지금 진혁을 ‘구국의 영웅’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간 알짜 국내 기업을 인수한 많은 외국계 기업들이 단물만 쏙 빼먹고 막대한 이득까지 챙겨 떠나는 모습만 봤는데, 오히려 더 낮은 가격에 국내 기업을 되찾아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진혁은 어쩔 수 없이 기자 회견을 열어야 했다.
해고자 전원 복직은 물론 대규모 투자도 약속했다.
전기차, 자율 주행차 등 신기술을 개발 부품 공장이 있는 창원 제2공장에 추가 부지를 마련해 R&D 센터를 건립하겠다고 했다.
더불어 국내보다 해외 시장 개척을 우선하겠다는 전략도 밝혔다.
* * *
알라딘 자동차 회장 취임식을 마친 진혁은 하루만 쉬고 다시 출장길에 올랐다.
행선지는 말레이시아였다.
말레이 로직스 지분 인수 계약을 마치고 총리 집무실에서 차를 마셨다.
의욕이 넘쳐 국민차 생산 재개 발표까지 한 터라 탕분헝 총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제 국민차 생산을 서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왕 시작할 것, 판을 좀 더 키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판을 키워요?”
“일전에 말씀하신 인도네시아 정부와 함께 추진하는 게 여러모로 이득일 것 같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쪽은 재정에 여유가 없을 겁니다.”
탕분헝이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양국 모두 저유가와 세계 경기 악화로 경상 수지가 적자 행진을 이어 가고 있었다.
다만 말레이시아는 동서경제벨트 사업 중단, 말레이 홀딩스의 불법 비자금과 관련해 팡기텍과 테홍녠으로부터 압수한 자산이 있어 그나마 여유가 있었다.
진혁이 말했다.
“그 부분은 제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인도네시아 정부가 재정 부담을 덜기 위해 국영 기업의 민영화를 추진 중입니다. 그중에 인니롭이라는 물류 기업이 있는데, 제가 그것을 인수하고 싶습니다. 석회석 광산도 있다면 매입하고 싶고요. 그래도 부족한 자금은 국채를 발행하면 알라딘 홀딩스에서 매입하겠습니다.”
“그런 조건이라면 그쪽에서는 당연히 환영하겠지요. 그럼 공장을 양쪽에 지어야겠군요.”
“그렇긴 합니다만 전 인니 쪽은 오토바이를 생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토바이요?”
“국민차가 꼭 승용차여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인도네시아의 이륜차 시장은 중국, 인도에 이어 세계 3위로 연간 800만 대 이상이 팔리는 거대 시장입니다. 동남아시아는 승용차도 그렇지만 오토바이 역시 일본 제품이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어 아세안 국가들의 재정 적자 해소에 큰 부담이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 서 회장님이 도이에 중공업도 소유하고 있었지요. 그런 사정이라면 인도네시아에서도 충분히 받아들일 겁니다. 더불어 아세안 회의 때 이 문제에 대해 각국의 협조도 부탁하겠습니다.”
진혁의 계획을 이해한 탕분헝이 수긍했다.
다음은 민감한 사항이었다. 탕분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업비는 얼마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까?”
“20억 달러는 있어야 안정적으로 운영될 것 같습니다.”
“이륜차 생산까지 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겠지요. 그러면 지분 구조는 어떻게 가져가는 게 좋겠습니까?”
“그건 총리께서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상의해서 결정하시면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명색이 국민차인데 국민들이 납득하려면 양 국가가 최대 주주 지위를 갖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서 회장이 여러 나라에서 크게 사업을 일으킨 이유를 알겠소. 하하하.”
탕분헝이 호탕하게 웃었다.
어떻게 결정이 나든 진혁이 가장 많은 투자금을 내야 하는 것은 분명했다.
거기에 기술까지 제공하면서도 지분 욕심을 내려놓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 * *
두 나라 정상이 상의하는 동안 진혁은 선병식과 함께 말레이 로직스 인수 작업을 마무리 짓고 함께 인도네시아로 넘어갔다.
퇴근 후 라이꾸두 회장과 약속한 식당으로 가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룸으로 들어서던 진혁이 멈칫했다.
십여 명의 중년 사내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그 모습에 라이꾸두가 얼른 일어나 다가와 말했다.
“죽망 내 화인 사업가들입니다. 회장님을 만난다니 꼭 뵙고 싶다면서 이렇게 다들 찾아왔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진혁이 잠시 굳었던 안색을 펴고 좌중을 향해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알라딘의 서진혁입니다.”
진혁이 자리에 앉자 다들 인사를 했다. 비록 화교들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동남아시아 각 나라 10위권 이내의 사업가들이었다.
소개가 끝나자 라이꾸두가 모두들 대신해서 말했다.
“다들 회장님이 로버트 호의 자료를 함구해 주신 데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업가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였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과 저는 언제든지 경쟁 상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서로 정정당당하게 겨루면 됩니다. 외부의 힘을 빌리거나 상대방의 약점을 공격하는 치졸한 짓을 하는 자는 사업가라 불릴 자격이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모두가 회장님 같은 생각이면 좋은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당장 저만 하더라도 쿤초로 회장님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게 당연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화무십일홍이라 했습니다. 그들이 언제까지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때를 대비해서 스스로 힘을 길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럴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진혁의 말에 라이꾸두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도 그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는 쿤초로 회장님이 계셔서 더 자세히 묻지 못했는데, 중국 본토는 물론 아시아 전역이 커다란 전쟁터로 변할 거라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동남아시아 시장에 큰 변화의 소용돌이가 몰아칠 겁니다. 변화에 적응하면 살아남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겁니다.”
다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요즘 가장 핫하게 떠오르고 있는 알라딘 그룹 회장이며 ‘검은 머리 짐’의 확신에 찬 예언이었다. 허투로 흘려들을 일이 아니었다.
라이꾸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사드 배치 배치에 대한 반발로 중국은 단순히 한국만 생각해 가장 손쉬운 경제 보복 카드를 꺼내들었지만 명백한 오판입니다. 세계가 그 광경을 모두 지켜봤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저런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조성된 거지요. 이는 탈중국화를 가속화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중국은 이미 미국과 견줄 만한 강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2025년에는 미국을 넘어설 거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누군가 하는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의 의사를 표현했다.
욱하려던 진혁의 머리로 김선혁이 했던 충고가 떠올랐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이들은 자신처럼 두 번의 삶을 사는 행운이 없었다. 그때처럼 먼 미래를 이야기해서는 논쟁만 길어질 뿐이었다.
“중국의 미래와는 별개로, 중국을 탈출한 해외 기업들이 다음으로 향할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다들 눈이 커졌다.
그들이 몰려올 곳은 이곳 동남아시아임이 자명했다.
“경제 보복의 직접 피해국인 한국 기업들의 발길이 부쩍 잦아졌음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당장 저부터 여기서 여러분을 이렇게 만나고 있습니다. 자본과 선진 기술로 무장한 세계적 기업들이 여러분의 시장을 빼앗기 위해 달려오고 있습니다.”
“……!”
“과거처럼 죽망이 연합해 그들을 물리치겠다고요? 그럼 전 다국적군을 결성해 여러 국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해 들어갈 겁니다. 함반토타 항을 인수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일은 누구도 감히 ‘NO’라고 하지 못했던 동서경제벨트 사업을 최초로 좌절시킨 일이라 모르는 이가 없었다.
거기에 진혁은 이번에 탕분헝 총리를 도와 말레이시아의 사업마저 막았다.
라이꾸두가 모두의 마음을 대변해 물었다.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득권을 내려놓고 적극적으로 그들을 받아들이십시오. 그 길만이 여러분들이 살아남고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죽망의 원로분들은 변화를 싫어하십니다.”
“글쎄요. 제 생각은 오히려 반대인데요.”
“……?”
“이이제이(以夷制夷). 이 단어는 여러분보다 그분들에게 더 친숙할 겁니다. 그분들은 여러분보다 훨씬 더 먼저 최근의 사태가 미칠 파장과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고민을 하고 계실지도 모르지요.”
다들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사업적인 능력이나 힘은 원로들이 월등히 높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진혁이 말을 이었다.
“신규 투자자 입장이라면 각국의 1위 기업을 택할 거라는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그들이 여러분을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쥐고 있는 작은 것에 집착한 순간 전부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지요.”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했습니다.”
라이꾸두의 선창에 다들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비쳤다.
당장 이 자리에서 결정할 정도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또한 각자 처한 사정이 다르기에 모두가 같은 결론을 낸다는 것은 더더욱 어불성설이었다.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각자의 몫이었다. 그에 따른 책임도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
이어진 식사 자리에서 사업 관련해 이런저런 질문이 계속됐다. 그래도 진혁은 최대한 성의껏 답변을 했다.
식사가 끝나자 진혁이 먼저 일어났다.
자신이 던진 화두 때문에 서로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다.
입구까지 따라 나온 라이꾸두에게 나중에 따로 편하게 한잔하자고 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 * *
두 사람의 술자리는 다음 날 바로 이어졌다.
“어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하도 만나게 해 달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괜찮습니다. 제게도 죽망 내 젊은 사업가분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다들 회장님의 폭넓은 시야에 감탄하며 돌아갔습니다. 그와는 별도로 고민거리를 한 짐씩 짊어졌지만 말입니다.”
“이번에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다가올 미래가 달라질 겁니다.”
초지일관 같은 입장을 취하는 진혁의 모습에 라이꾸두가 정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본토에 문제가 생긴다는 겁니까?”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음…….”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이 기침하면 한국은 감기가 든다는 자조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최소한 중국에 편중된 사업 비중을 분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누구보다도 더 회장님을 오래 지켜봐 왔습니다. 그래서 전 회장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제가 어떤 길을 가야 합니까?”
라이꾸두가 솔직히 물었다.
한때는 자신이 조언하는 입장이었지만, 몇 번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진혁은 무섭게 성장해 저만치 멀리 가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진혁이 말했다.
“리틀 지니 매장을 보셔서 아시다시피 앞으로 편의점도 기술 발달에 따라 무인화, 자동화 시스템으로 변하게 될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인건비 절감으로 회수는 가능하겠지만, 당장은 신규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도 그 점이 고민입니다. 각각의 편의점이 영세하다 보니 가맹점주들은 투자 여력이 크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본사가 그걸 모두 감당하는 것은 부담이 너무 크고요.”
“지금까지는 매장 수를 늘리는 게 우선이었다면 앞으로는 내실을 기하는 방향으로 사업 방향을 전환하셔야 합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부실 매장에 대한 선제적인 정리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공감합니다만…… 주주들은 냉정합니다. 사업을 확대해도 모자를 판에 오히려 축소한다면 반발이 클 겁니다.”
“그래서 새로운 먹거리를 찾으셔야 합니다. 가까운 중국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인건비는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임금에 기댄 노동 집약 산업은 조만간 한계에 직면하게 될 겁니다.”
“알고는 있는데 평생 한 우물만 파 온 터라 다른 사업은…….”
어두운 얼굴로 말끝을 흐리는 라이꾸두에게 진혁이 엄청난 제안을 했다.
“제가 생각하는 사업이 있는데 함께 해 보시겠습니까?”
“회장님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