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전기차 배터리
“감비아 영사 다르보입니다.”
비서실장 오희준의 안내로 들어온 이는 서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감비아의 영사였다.
“며칠 전에 대통령께서 이집트를 방문하셨는데, 회장님이 압델 대통령께 선물한 ‘빅 코뿔소’를 보고 감탄하셨답니다. 열 대 정도를 구매하시겠다며 저 보고 상담을 해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하셨습니다.”
“아, 예.”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감이 풀린 진혁이 조금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답했다.
“알라딘 그룹이 직접 진출하지 않은 국가는 이집트의 알트라드 씨에게 판매를 맡기는 것으로 계약했습니다. 연락처를 주고 가시면 그쪽에서 전화드려 상담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잘됐군요. 비서실 연락처를 드리겠습니다. 그쪽과 직접 이야기하는 게 서로에게 편할 것 같습니다.”
다르보는 큰 짐을 덜었다는 듯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연락처를 적어 주고 돌아갔다.
배웅하고 돌아온 희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감비아는 최빈국 아니야?”
“맞아. 거기에 현 대통령이 유혈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후 23년간 철권통치를 이어 오고 있기도 하고.”
“헐……. 결국 자신의 정권 연장을 위해 우리 차를 사다가 뿌리겠다는 거네?”
“그런 나라는 감비아만이 아니야. 알트라드 씨가 알아서 하겠지.”
진혁은 일부러 말을 짧게 했다.
썩 유쾌한 거래는 아니라 그 후 알트라드에게 알려 주고 잊어버렸다.
하지만 결국 그 거래는 성사되지 못했다.
얼마 후 열린 감비아의 총선에서 야당 후보가 당선되고 현 대통령의 철권통치가 막을 내리면서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알트라드는 아쉬워했지만 찜찜함을 털어낸 진혁은 오히려 홀가분했다.
* * *
알라딘 연구소로 가자 구필준 소장과 플로테크의 최상민 사장이 다른 두 명의 중년 남성과 기다리고 있었다.
“파워넷의 권길영 사장님과 이브젠의 김동성 사장님이십니다.”
“서진혁입니다. 바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큰 도움을 주신 분인데 당연히 와야지요.”
“회장님 덕분에 어려운 고비를 넘겨 기술 개발을 완료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회사 모두 진혁의 스타트업 투자 혜택을 받은 곳이었다.
파워넷은 전기차 충전기를 만드는 회사였고, 이브젠은 전기차용 자동 변속기를 제작하는 업체였다.
진혁이 먼저 용건을 꺼냈다.
“추가 투자금이 필요하시다는 보고는 받았습니다.”
“저희 회사가 이번에 여러 모듈을 연결한 블럭 방식의 대용량 충전기를 개발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가 고장 나도 문제없이 충전기를 이용할 수 있고, 한 번에 여러 대의 전기차를 충전하는 것도 가능하게 됐습니다. 거기에 기존 충전기보다 충전 속도도 일곱 배나 빠른 제품이라 해외 여러 업체로부터 공급 요청이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회장님이 투자해 주신 자금은 개발비로 소진되어, 생산 설비를 확충할 자금이 필요합니다.”
권길영 사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김동성 사장이 입을 열었다.
“저희도 이번에 전기 자동차에 적합한 획기적인 자동 변속기 모터를 개발했습니다. 기존 변속기는 유압 장치를 사용하는 방식이라 부피가 크고 무거웠는데, 저희가 개발한 제품은 변속기와 모터를 일체화시켜 각각의 차량 바퀴에 직접 장착하는 방식입니다. 부피와 무게를 기존의 10분의 1 이하로 소형, 경량화했습니다.”
“효과가 상당하겠는데요?”
“맞습니다. 세계 최초로 개발한 것으로 주행 거리가 최대 두 배까지 늘어나는 게 확인됐습니다.”
“엄청나군요. 사장님도 역시 생산 설비 증설 자금이 필요하신 겁니까?”
“아닙니다. 회장님이 회사를 인수해 주셨으면 합니다.”
“회사를 파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진혁이 놀라 물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기술 개발을 완료해 놓고 그것을 내놓겠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김동성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대신 제가 계속 기술을 개발할 수 있게만 해 주십시오.”
“……무슨 사연이 있으신 겁니까?”
“여기 상민이랑은 대학 동기입니다. 회장님은 단순히 기술만 빼앗아 가는 게 아니라 함께 공존하고 상생하는 경영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최 사장님이 절 너무 좋게 보신 겁니다. 꼭 알라딘 그룹으로 들어오시지 않더라도 지원은 충분히 하겠습니다.”
진혁의 배려가 오히려 김동성의 결심을 더욱 굳게 했다.
“제가 유압 장치 없는 자동 변속기 개발을 시작한 것은 2011년부터입니다. 모든 일을 접고 이 연구에만 매달렸습니다. 개발 비용만도 전 재산인 30억을 다 날릴 정도로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습니다. 주변에서는 그런 저를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까지 했습니다. 그사이 처와 가족들도 떠났고요.”
“그렇게 힘들게 키운 회사니 더 굳건히 지키셔야지요.”
“제가 이번에 개발한 것은 최종 제품이 아닙니다.”
“……?”
“변속기 모터 기술은 모터와 제어 장치, 냉각 장치 등 핵심 파워 트레인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시킬 수 있습니다. 제가 계획한 대로만 된다면 배터리를 포함한 차량 무게가 300킬로 정도 가벼워지고 소비자 판매가도 천만 원 초반대로 낮출 수 있습니다.”
“엄청난 기술이군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돈 때문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개발은 제가 할 테니 회사 운영은 회장님이 맡아 주십시오. 가볍고 값싼 전기차가 대중화되는 모습만 보여 주시면 됩니다.”
너무도 간절해 보이는 김동성의 표정에서 진혁은 그의 말이 진심임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파워넷은 추가 투자를 하고, 이브젠은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잠시 후 최상민에게 두 사람을 접대하게 하고 진혁은 구필준을 만나러 왔다.
“솔직히 아직도 이브젠 인수를 받아들인 게 잘한 결정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잘하신 일입니다. 김동성 사장은 기술자라 회사 운영을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원하는 대로 기술 개발을 할 수 있게 됐으니 서로에게 좋은 일입니다. 그간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만 제대로 해 주시면 됩니다.”
“소장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진혁은 불편한 마음을 털어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국민차 생산을 준비하면서 겪어 보니, 완성차 생산이라는 게 생산 기술만 보유한다고 될 일이 아니더군요. 우수한 협력 업체를 얼마나 확보하느냐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잘 보셨습니다. 산업이 고도화될수록 협업이 중요합니다. 혼자서 전부를 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협력 업체에 대한 투자를 늘리려고 합니다. 두 회사 말고도 전기차 관련 기술을 보유한 유망 중소기업을 계속 발굴해 주십시오.”
“자금 사정이 어려운 중소기업들이 대부분이라 다들 기뻐할 겁니다.”
“단순히 투자만이 아니라 해외 시장 개척을 원한다면 그에 대한 지원도 해 주겠다고 하십시오. 아무래도 현지에서 직접 생산하는 게 여러모로 유리하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구필준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말씀해 보십시오.”
“이번 일을 조사하면서 국내 자동차 산업의 협력 업체 구조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떤 점에서 말입니까?”
“자동차는 수많은 부품들이 필요한 구조라 자동차 회사뿐만 아니라 부품 업체의 역할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은 자동차 회사와 부품 업체가 서로 협력하며 성장해 왔습니다.”
“그렇겠지요.”
“그런데 한국은 수직적 하청 관계로 이루어져 부품 업체의 어려움이 크다고 합니다. 3차 협력 업체의 경우 착수금은 5개월 어음에, 잔금은 1년 반 뒤에나 줄 정도로 불공정 거래가 심하다고 합니다.”
“설마 저희 쪽도……?”
“저도 듣기만 해서 정확한 것은 모릅니다만, 일부 그런 부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진혁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그건 자신이 추구하는 ‘공생과 상생’의 지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동이었다. 절대 묵과할 수 없었다.
“제가 철저히 조사해서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자기 말만 하고 서둘러 나가는 진혁의 모습에 구필준이 얼른 전화기부터 들었다.
알라딘 빌딩에 도착한 진혁은 바로 김선혁의 사무실로 쳐들어갔다.
“회장님!”
“흥분하지 마라. 이미 알라딘 자동차에 조사 지시를 내렸다. 네가 이럴 것 같다며 구 소장이 걱정되어서 전화했었다.”
맥이 탁 풀린 진혁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러니 이번 일은 나한테 맡기고 넌 해외 일에 집중해라. 내가 반드시 개선하마.”
“알겠습니다. 회장님만 믿겠습니다.”
진혁이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국내 일은 김선혁에게 맡기겠다고 약속했던 터였다.
“잠시 할 말이 있다.”
일어나려는 진혁을 막은 김선혁이 말을 이었다.
“전기차는 차량 가격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배터리의 비중이 높다는 건 알고 있지?”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배터리 관련 원자재 가격이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다.”
“그래요?”
“그 때문에 세계 메이저 기업들은 배터리 생산 기술력 확보 경쟁을 벌이면서 배터리에 들어가는 광물에 대한 집중 투자를 해 오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한참이나 뒤진 상황이라 잘못하면 문제가 커질 수 있다.”
김선혁이 조사한 내용대로 원자재 가격이 급격히 상승하고 있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당장 대책 회의를 열어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지시해 놨다. 내일 오전 중에 관련 발표회를 갖기로 했으니 너도 참석해라.”
“고생하셨습니다.”
진혁은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김선혁을 영입한 여러 이유 중에 하나가 세계적인 흐름을 읽고 스스로 미래를 준비하는 능력을 높이 산 것도 있었다.
그 후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온 진혁도 나름대로 전기차 배터리 시장 흐름에 대해 조사를 했다.
조사를 하면 할수록 김선혁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잔뜩 굳어져만 갔다.
* * *
다음 날.
소회의실에서 열린 발표회장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각 부서에서 조사한 배터리 시장 상황에 대한 보고를 들을수록 진혁은 자신이 너무 안일했음을 크게 후회했다.
왕칭린 주석의 동서경제벨트는 단순히 물류망 확보에 국한된 게 아니었다.
천연 자본의 보고인 아프리카 대륙을 노리고 이미 집중 투자해 놓은 상태였다.
동서경제벨트의 물류망은 그곳에서 생산된 자원을 이동시키는 수단에 불과했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중국의 급성장이 단순히 인구가 많아서만이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번 발표회의 책임을 맡고 있는 기획실장 한상국이 최종 보고를 했다.
“우리가 배터리 생산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다고 판단했습니다.”
진혁 역시 그 의견에는 찬성했다.
기술력 확보라는 게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관련 업체를 인수한다고 해도 끊임없는 연구 개발이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고도 성공 확률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배터리는 이미 경쟁이 치열한 레드 오션이 되어 있었다.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시업에 특별한 기술 없이 뛰어드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 알라딘의 주력 사업이 전기차 생산이 아니라는 점도 배터리 생산에 직접 참여할 필요성을 현저히 낮췄다.
“……경쟁이 치열하다 보면 수년 안에 공급 과잉에 직면하게 될 게 분명합니다. 그 와중에 경쟁력에서 뒤지는 업체는 도태하게 될 겁니다.”
“그럼 다른 대책은 있습니까??”
“전기차 배터리에 들어가는 자원을 확보하는 것으로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한상국의 결론에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한상국의 보고가 이어졌다.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급성장으로 이차 전지의 소재 중 하나인 리튬, 코발트, 니켈, 망간의 가격이 급등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지금이라도 자원을 확보해야만 합니다.”
“장기적인 확보 방안은 있습니까?”
“코발트는 전 세계 매장량의 60%, 망간은 약 40%, 니켈은 10%, 흑연은 20% 이상이 아프리카에 매장돼 있습니다. 콩고는 전 세계 매장량의 56%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 최대 코발트 매장국이며, 망간과 니켈은 남아공과 마다가스카르에 풍부하게 매장돼 있습니다.”
“…….”
“반면 리튬은 세계 매장량의 70%가 남미의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의 리튬 삼각지에 매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광산 개발권 대부분을 미국, 스위스, 중국, 일본계 다국적 회사들이 확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엔지니어 출신인 한상국의 장점을 여실히 보여 줄 정도로 철저하고 세밀한 조사 결과였다.
문제는 필요한 자원이 대부분 남의 손에 있다는 것이었다.
진혁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으음, 자원을 확보하는 게 쉽지는 않겠군요. 우리가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좋을지 계획은 세우셨습니까?”
“예, 회장님.”
“말씀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