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254화 (254/307)

254화. 주드 모건의 재등장

“아프리카의 이커머스 시장은 ‘블론드’가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하이다르가 ‘블론드’에 대해 들려줬는데, 놀라운 업체였다.

블론드는 아프리카를 상징하는 ‘블랙다이아몬드’에서 따왔다고 한다.

CEO는 움바브로, 열악한 아프리카 이커머스 시장 개척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자금력이 부족한 벤더들에게 대출을 제공하고 교육도 주기적으로 실시했다.

또한, 온라인으로 쇼핑을 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미심쩍어 하는 고객들을 이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이벤트를 열었다.

심지어는 염소를 경품으로 내거는 등 현지에 맞는 다양한 다국적 마케팅 캠페인도 벌였다.

“그런 움바브 회장의 노력으로 현재 서비스 국가만도 14개국이며, 지난 해 매출 총액은 전년도보다 45% 증가한 5억 달러를 기록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 이르기까지, 10만여 벤더들이 상품과 서비스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대단하신 분이군요.”

“그동안 글로벌 투자자로부터 4억 달러의 투자금을 받아 현재 기업 가치는 10억 달러로 평가되고 있습니다만, 아직은 적자 상태라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합니다.”

“투자자를 찾지 못했나 보군요.”

“아닙니다. 투자하겠다는 곳은 많답니다. 알리바마나 아마존에서도 투자 제의가 계속 들어오고 있답니다.”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하이다르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움바브 회장과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입니다. 회장님께 말씀드렸던 쑤피넷을 중동과 아프리카의 아마존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은 원래 블론드와 이루려고 했던 겁니다.”

“그렇군요.”

“움바브 회장은 쑤피넷과 라자다 같은 토착 업체가 아마존이나 알리바마가 같은 온라인 공룡들에게 잡아먹혀 사라지는 것을 보고, 블론드가 그 전철을 밟게 되는 게 아닌지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맞습니다. 회장님에 대해 듣고 제게 오히려 알라딘에서 투자해 줄 수 없는지 물어 달라 했습니다. 블론드와 합작하면 의외로 쉽게 진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사정이라면 당연히 받아들여야지요. 전권을 드릴 테니 회장님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십시오.”

하이다르의 얼굴이 활짝 폈다.

진혁이 쑤피넷의 몰인몰로 시작해서 빠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직접 겪어 본 터였다. 충분히 자신 있었다.

그 후 AF 설립과 블론드와의 합작 사업은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됐다.

진혁의 전폭적인 지원에 하이다르와 움바브의 오랜 인연이 있어서 가능한 결과였다.

* * *

아프리카 일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후 중국에서는 독신절 행사가 열렸다.

11월 11일 0시부터 24시간 동안 진행된 이번 행사는 지난해보다 32% 증가한 약 21조 원을 기록했다.

이는 알라딘의 ‘동행 한마당’의 19조 5천 억 원을 뛰어넘는 신기록이었다.

“직원들이 많이 아쉬워했다. 그때 좀 더 준비를 철저히 했더라면 우리도 그 이상은 했을 것이라면서…….”

“내년 행사 때 제대로 보여 주면 되죠.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하세요.”

허탈해하는 김선혁과 달리 진혁의 표정은 오히려 밝았다.

하윤 회장의 건재를 확인할 수 있었고, 이런 식의 선의의 경쟁을 통해 서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게 기뻤다.

거기에 이번 행사에 참여한 한국 기업들의 매출이 일본과 미국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이 고무적이었다.

중국 정부의 경제 보복과는 상관없이 값싸고 좋은 제품은 얼마든지 팔린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 * *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는 200미터 이상 초고층 빌딩 24개를 보유한 세계 9위의 ‘마천루 도시’였다.

그 중심에 쌍둥이 빌딩으로 세계 1위인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가 있었다.

한해가 마무리되는 12월 31일.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아세안 모터스가 생산한 말레이시아 국민 전기차 ‘프론볼트’가 세상에 공개됐다.

탕분헝 총리를 비롯한 정재계 관계자들이 전부 참석했고, 내외신 기자들이 빼곡히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말레이시아 국민들 대부분이 가정에서 생중계된 화면을 시청할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다.

산업부 장관이 직접 ‘프론볼트’를 소개하고 있었다.

“회장님이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말레이시아 국민들의 염원이 담긴 뜻깊은 자리입니다. 그들이 기쁨을 맘껏 느끼게 해주는 게 우리의 역할입니다.”

철저히 보조자로 행동하는 진혁의 모습에 텡 로제 사장이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프론볼트’의 성공적인 생산에 진혁의 역할이 제일 컸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며칠 전부터 인터뷰 요청이 끊이질 않았지만 그는 모두 거절하고 모든 공을 말레이시아 정부에 돌리며 자신의 존재는 최대한 드러내지 않았다.

텡 로제는 GTH 리테일을 나와 지금은 아세안 모터스 판매 회사 말레이시아 법인 사장이 되어 있었다.

그 시각, 인도네시아에서도 비슷한 행사가 열렸다.

인도네시아 국민 모터사이클 ‘이노볼트’의 신차 시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알라딘 그룹의 대표로 참석한 김선혁 역시 진혁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아웃사이더로 행동했다.

연단 밑에서 행사장을 지켜보는 김선혁의 옆에서 라이꾸두 회장이 말했다.

“서 회장님은 접하면 접할수록 놀랍습니다. 이런 자리를 마다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말입니다.”

“명예를 얻으려 했다면 정치인이 되었어야지요. 상인에게는 실리가 우선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텡 로제 사장님을 중용하는 모습에 저는 물론 화인 기업가 전체가 크게 탄복하고 있습니다.”

진혁은 약속대로 동남아시아의 각국 법인 사장 선정을 라이꾸두 회장의 의견에 따랐다.

하지만 유독 한 곳, 말레이시아만 의견을 내놓았는데 그의 선택은 텡 로제였다.

그런 결정에 주변에서는 다들 우려를 나타냈다.

비록 그룹의 지시라고 하지만 지난번 자인 그룹 테홍녠 회장의 공격에 가담했던 이력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말했었다.

‘처음 동남아시아에서 사업을 시작해 어려울 때 조건 없이 도와주신 분입니다. 그 고마움은 한 번의 실수로 상쇄될 정도로 작은 게 아니었습니다.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는 게 맞습니다. 잘해 내실 겁니다.’

진혁의 속 깊은 결정에 더 이상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그 사건 이후로 죽망 내 신진 그룹인 화인 기업가들이 진심으로 진혁을 대하게 됐다.

* * *

외국에서 열린 중요한 행사로 연말연시를 가족과 보내지 못한 미안함 때문에 진혁은 시무식만 참석하고 바로 외국 여행을 떠났다.

양가 부모님들도 모시고 오려고 했는데 젊은 사람끼리 다녀오라고 해서 희준이네만 함께 왔다.

이번 여행지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였다.

사막에 세워진 인간이 만들어낸 화려한 카지노 도시와 신이 만들어낸 광활한 예술의 광장인 그랜드캐니언을 돌아볼 계획이었다.

시내 관광을 마친 진혁이 가족들과 함께 카지노에서 게임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인근 최고급 호텔 내 회장실에서 이상한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회장님께서 투자만 해주신다면 미래의 세상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백인 노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이는 스톰 브레인의 주드 모건이었다.

인공 지능의 우수성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는 주드 모건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는 셀든 슈왑이었다.

세계 최대 카지노 운영 기업 중 하나인 ‘카지노 월드’의 회장으로 이곳의 주인이기도 했다.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자이며 카이저 대통령의 당선에 가장 큰 지원을 해준 인물로도 유명했다.

설명을 끝낸 주드 모건이 뜨거운 눈으로 말했다.

“이곳 카지노만 해도 스톰고의 팁러닝 기술만 적용하면 당장 20%의 매출 신장을 이룰 자신이 있습니다. 또한 각 기계의 확률 시스템을 분석 개선하면 배당률의 조정을 통해…….”

“그런 뛰어난 기술이라면 투자자들이 줄을 설 것 같은데?”

“……그게 사정이 좀 있습니다.”

바로 핵심을 찌르고 들어오는 슈왑 회장의 날카로운 물음에 모건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진혁과의 일을 털어놨다.

“놈의 농간에 넘어가 지분의 40%와 관련 기술을 헐값에 넘겨주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 다른 투자자들이 투자를 꺼리고, 일부는 그런 약점을 이용해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지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

“놈에게 넘겨준 기술은 아주 초보적인 것일 뿐입니다. 지금도 우리 연구진이 더 뛰어난 기술 개발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투자가 조금만 더 이루어진다면 몇 년 안에 몇 배나 뛰어난 기술을 보여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많은 투자자들 중에 나를 선택한 이유는 뭔가?”

“기술 개발은 자신 있습니다. 하지만 서진혁이란 자를 상대하는 데 회장님만 한 분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놈은 사업가로 포장했지만 하는 짓은 갬블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놈은 투자자를 가장한 사기꾼입니다. 그런 자는 세상에서 반드시 제거되어야 합니다.”

주드 모건이 심한 분노에 치를 떨며 진혁과의 바둑 내기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다.

한참을 심각한 표정으로 듣던 슈왑 회장이 말했다.

“재미있는 자군. 이야기는 잘 들었네. 생각하는 동안 잠시 쉬고 있게.”

“……알겠습니다.”

미적거리는 모건을 데리고 나간 엠마가 돌아오자 슈왑이 말했다.

“서진혁이라면 일전의 비밀 회합에서 거론됐던 한국인이 아니냐?”

“맞아요. 알라딘 그룹의 회장이에요.”

“이거…… 일이 상당히 재미있어지겠는걸.”

“그럼 방금 그자의 제안을 받아들이실 건가요?”

“스톰 브레인도 우리의 영입 리스트에 들어 있었다. 서진혁이 먼저 알맹이를 차지하는 바람에 제외했던 것인데, 이렇게 제 발로 찾아와 내놓겠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알겠어요. 그렇게 준비할게요.”

“이번 일은 네가 맡아서 진행해 봐라.”

“제가요?”

엠마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엠마는 슈왑 회장이 늦게 얻은 딸로 경영 수업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너도 이제 독립할 때가 됐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 * *

“역시 좋아. 아주 좋아.”

카지노 내부를 둘러보며 연신 감탄을 터트리는 희준의 모습에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세계 최고 카지노니 시설이 좋을 수밖에.”

둘은 관광하면서 아이들을 챙기느라 녹초가 되어, 가족들이 게임을 즐기는 동안 잠시 쉬고 있는 중이었다.

“시설 말고 여자들 말이야. 서빙하는 애들도 모델이다, 모델.”

“으이그.”

예상과 전혀 다른 답변이 돌아오자 진혁이 혀를 찼다.

개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그때 갑자기 희준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와우! 지금까지 본 중에 최고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애들한테 가 보자.”

“그래. 눈요기 실컷 했으니……. 어? 이쪽으로 오는데?”

진혁의 눈이 희준으로 시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하얀 피부에 금발, 작지만 균형 잡힌 몸매에 에메랄드 눈동자. 희준이 왜 감탄사를 터트렸는지 알 수 있는 미모였다.

모델이 워킹 하듯 흐트러짐 없는 발걸음으로 다가온 엠마가 말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희 카지노 월드를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진혁 회장님.”

“……가족 여행을 왔습니다. 신경 안 써 주셔도 됩니다.”

“스톰 브레인과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스톰 브레인?”

“주드 모건 씨가 와 계십니다.”

엠마가 연이어 예상치 못한 말을 꺼내자 진혁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시면…….”

“그건 곤란하겠습니다.”

“……?”

“말씀드린 대로 가족 여행을 와서요. 사업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싶군요. 가자.”

“어.”

희준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얼른 진혁의 뒤를 따랐다.

황당한 표정을 짓는 엠마와 충분히 떨어졌다고 생각한 희준이 물었다.

“주드 모건이라면 스톰고를 만든 사람이잖아?”

“맞아.”

“그 사람이 왜 여기 있어? 저 여자는 누구고?”

“나도 모르지.”

천연덕스러운 진혁의 답변에 희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무슨 일인지 좀 물어보기라도 하지, 뭘 그렇게 서둘러 자리를 뜨냐?”

“일 때문에 늦어진 가족 여행이야. 여기서 또 사업에 매달릴 수는 없지.”

“그건 그렇다. 즐기러 왔으니 일은 잊고 그냥 즐기자. 아자, 아자.”

그러나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였던 희준은 진혁의 다음 말에 바로 고개를 떨구어야 했다.

개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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