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중국 정부의 고민
“내가?”
“그럼 회장인 내가 하리?”
“그건 그렇지만…… 여긴 아무것도 없잖아? 나중에 한국에 가서…….”
“전화 뒀다 어디에 쓸 건데? 김상균 실장에게 사정 이야기하면 금방 찾아낼 거야.”
“그건 그렇긴 한데…….”
“수고해. 가족들은 내가 챙길 테니까 걱정 말고.”
희준은 어깨까지 두드려 주고 떠나는 진혁의 등을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한편 혼자 가족을 찾아가는 진혁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가족 여행을 내세워 사업 이야기를 막은 것은 느낌이 좋지 않아서였다.
정체를 알 수 있는 불안감이 밀려오고 있었다.
가족들을 독려해 일찍 게임을 끝내고 호텔방으로 돌아오자, 희준이 화상전화를 연결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의 김상균이 먼저 말했다.
-여자분은 엠마 슈왑으로 밝혀졌습니다.
“슈왑?”
-‘카지노 월드’ 셀든 슈왑 회장의 모델 출신 세 번째 부인에게서 난 딸입니다. 최근에는 비서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주드 모건이 이곳에 온 이유는 파악이 됐습니까?”
-시간이 촉박해 다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BLC 빈센트 사장님 말씀으로는 최근 투자자를 찾아 여러 사람과 접촉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인공 지능과 카지노는 상당히 어색한 조합인데요?”
-저도 그래서 빈센트 사장님께 여쭤봤더니, 회장님이 내기로 취득한 지분과 기술 이전을 해준 것 때문에 투자자들로부터 거절을 당했답니다. 어쩔 수없이 거기까지 간 것 같습니다.
“음……. 알아보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계속 조사해 주시다가 뭔가 찾으면 연락 주십시오.”
-잠시만요, 회장님.
김상균이 전화를 끊으려는 진혁을 급히 막고 말했다.
-제가 즉시 건너가겠습니다.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으실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이미 항공권도 예약했습니다. 최대한 빨리 건너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진혁이 수긍하고 끊었다.
자신만 있다면 당연히 반대했겠지만 가족이 함께 있었다. 조금의 위협이라도 철저히 대비해야만 했다.
* * *
다음 날은 원래 그랜드캐니언을 구경하기로 했는데 일정을 바꿔 시내 여행을 하루 더 했다.
오후 늦게 호텔로 돌아오자 김상균이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제 일이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보다, 조사하다 보니 최근 스톰 브레인의 연구원 중 일부가 이탈한 게 확인이 되었습니다.”
“음…….”
“원래부터 성격이 괴팍했는데 한국에서 바둑에서 패한 후에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고 합니다.”
“겨우 한 판 진 거잖아요? 승리는 네 판을 이긴 스톰고가 한 건데.”
옆에서 듣고 있던 희준이 오히려 따졌다.
“저도 같은 생각인데, 구필준 소장님은 천재들의 사고는 일반인과 다르다고 하시더군요. 승패를 떠나 그들은 자신의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왔을 때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고 하셨습니다.”
“천재라고 다 좋은 건 아니네요. 인생이 엄청 피곤할 것 같네요.”
“구 소장님이, 지금 그자의 정신 상태가 굉장히 불안할 거라면서 조심히 대응하라고 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쉬면서 서로 고민해 봅시다.”
진혁은 그 정도에서 대화를 끊었다.
그가 기억하는 과거 속에서 주드 모건은 한 번의 패배를 오히려 자극으로 받아들여 거대 IT 기업의 품으로 들어가 인공 지능 연구에만 매진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자신의 개입으로 미래가 틀어져 버린 것 같았다.
* * *
다음 날.
미뤘던 그랜드캐니언 관광에 나섰다.
헬기를 타고 돌아본 그랜드캐니언은 장관이라는 말이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로 대단했다.
특히 혜주가 가장 신나 했다.
지민이 위험하다며 말리는데도 창에 얼굴을 붙인 채, 6백만 년 동안의 지질 활동이 만들어낸 웅장한 사우스 림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다들 구경하느라 바쁠 때 진혁의 표정은 어두웠다.
주드 모건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관광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가족들을 쉬게 하고 희준과 함께 로비로 내려오자 김상균이 다가왔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하 바로 가자 주드 모건이 혼자 자작하고 있었다.
진혁이 앞에 앉으며 말했다.
“투자금이 필요하시면 절 찾아오시지 그러셨습니까?”
“흥. 또 내기를 걸어 나머지 지분까지 다 뺏어 가시게?”
“이 사람이…….”
공격적인 말에 희준이 화를 내려다가 진혁의 눈짓에 겨우 멈춰야 했다.
“이번에는 어떤 조건도 걸지 않고 순수하게 투자를 하겠습니다. 그 좋은 기술이 겨우 카지노 그룹을 위해 쓰인다는 게 안타까워서 그렇습니다.”
“당신과의 거래에서 유일하게 얻은 게 있소. 기술 개발보다 더 중요한 게 베팅이라는 것을. 난 이곳에서 그 한계를 극복하고 말겠소. 그다음에 당신에게 다시 도전해 반드시 내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 것이오.”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자신을 좌절시킨 진혁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의 인생 목표가 인공 지능 개발에서 복수로 바뀌어 있었다.
진혁이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시오?”
“더 이상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마시오.”
“그러지. 그 여자에게 날 찾아오라고 해.”
진혁이 망설임 없이 일어났다.
주드 모건은 더 이상 천재 과학자가 아니었다. 꼬여도 한참이나 꼬인 열등아일 뿐이었다.
* * *
엠마를 다시 만난 것은 다음 날 오전이었다. 지민 자매는 아이들을 데리고 쇼핑을 갔다.
약속시간보다 늦은 데다 사과도 없이 앞에 와 다리를 꼬고 앉은 엠마가 말했다.
“가족 여행이라 사업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나…….”
“그걸 원하면 그렇게 해 주지.”
괜히 허세를 부리려던 엠마가 당장이라도 일어날 듯한 진혁의 태도에 당황했다.
“아니에요. 이야기하세요.”
“얼마를 내놓을 생각이지?”
“지분 40%를 2억 달러에 매수하셨더군요. 다섯 배면 충분할 것 같은데요?”
“열 배.”
“그건 곤란합니다.”
“그럼 이번 거래는 없던 것으로 합시다. 어차피 그 지분은 내겐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으니. 다시 보지 맙시다.”
진혁이 이번에는 진짜 일어났다.
채 열 걸음도 가지 않았을 때 엠마가 소리쳤다.
“좋아요. 20억 달러!”
진혁의 눈짓에 희준이 엠마와 마무리를 짓기 위해 돌아갔다.
혼자 돌아온 진혁을 가족들이 있는 쇼핑몰로 안내하며 김상균이 물었다.
“엠마가 잡을 줄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 정도로 물러설 거라면 애초에 이번 일에 끼어들지도 않았겠지요.”
“그럼 더 세게 베팅하셔도 됐잖습니까?”
“바로 받아들인다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주저하면서 좀 더 조사하다 주드 모건이 빈껍데기만 남은 걸 알아 버리면 곤란해지거든요.”
“……사업도 쉬운 게 아니네요. 그런데 큰 수익을 거두셨는데도 표정이 밝지 않으십니다.”
“유쾌한 승부가 아니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진혁은 입을 닫았다.
수익보다도 한 천재의 몰락이 안타까웠다.
* * *
휴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진혁에게 반가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알라딘 홀딩스 야맘 사장이 전화했다.
-이치가 나스닥 상장 첫날 대박을 터트렸습니다, 회장님.
“아, 벌써 날짜가 그렇게 됐군요. 얼마에 끝났습니까?”
-공모가 대비 40.5% 급등한 26.7달러로 마감했습니다.
곽양으로부터 나스닥에 상장하기로 했다는 전화를 받았었다.
-시가 총액이 285억 달러로, 절반을 가진 곽양 사장은 단숨에 중국 15대 부호에 올라섰습니다. 회장님도 15%의 지분으로 42억 달러 가치가 되었습니다.
야맘 사장의 목소리가 한껏 들떠 있었다.
아이디어 사용료를 포함해 1,500만 달러를 투자해 2년 만에 13배가 넘는 수익을 얻었다.
한편, 희희낙락하는 두 사람과 달리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 이들도 있었다.
중국 정부 청사 내 경제부총리실.
우핑이 허융이 조사해 온 자료를 내려놓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우리 정부가 그간 그놈 좋은 일만 시킨 거네.”
“저도 조사하고 놀랐습니다. 100위권 내 유니콘 기업에 그자의 투자금이 안 들어간 곳이 없습니다.”
“대체 그동안 우린 뭘 했다는 말이냐?”
“비상장 기업들이라 공시 의무가 없다 보니 당에서 미리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경쟁이 치열해서 기업들로서는 누구 돈이건 투자해 준다면 무조건 받고 보는 상황이라 제어는 불가능합니다.”
우핑의 어금니가 저절로 물렸다.
진혁을 생각하면 치가 떨릴 정도로 미웠지만 지금은 냉정할 때였다.
허융에게 물었다.
“넌 우리가 어떻게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제가 감히 무슨 생각이 있겠습니까. 지시하시면 그대로…….”
“지금 나보고 그렇게 주석께 보고드리라는 말이냐?”
“……!”
허융의 눈이 커졌다.
단순히 우핑이 시킨 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연이은 실책으로 왕칭린의 눈 밖에 난 무역부였다. 우핑의 실각은 시기의 문제일 뿐 이미 기정사실화되고 있는 분위기였다. 여기서 한 번 더 삐끗한다면 우핑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위험했다.
허융이 머리를 쥐어짜서 대안을 내놓았다.
“서진혁에 대한 우리의 기존 입장을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 말이냐?”
“지금까지는 그자의 능력을 과소평가해 채찍으로 다스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놈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난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여러 나라 지도자들과도 유대가 깊고, 최근에는 죽망 내 신진 그룹들로부터 신망까지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끌어안아서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보느냐?”
“우리나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주변 국가를 복속시켜 가며 성장해 왔습니다. 그곳 오랑캐들을 교화시켜 국가에 충성하는 국민들로 만들어 온 저력이 있습니다. 서진혁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나 일개인입니다. 당근을 제시하면 거절하진 못할 겁니다.”
“썩 괜찮은 방법 같다. 그렇게 보고하도록 하자.”
우핑은 허융이 내놓은 안을 가지고 왕칭린에게 가서 보고를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서 서진혁에 대해 기존의 강경 정책 대신 유화 정책으로 포용하는 게 최선이라는 판단입니다.”
“……알겠소. 그만 나가 보시오.”
우핑이 나가자 왕칭린이 배석해 있던 이를 보고 말했다.
“아무래도 광잉 자네가 나서 줘야겠네.”
“겨우 일개 사업가 하나를 상대하라고 내게 그런 부탁을 하다니, 실망이네.”
리광잉은 왕칭린의 50년 지기로, 막후에서 그간의 경제 정책 및 개혁 방안을 설계한 경제 브레인이었다.
“그자 때문이 아닐세. 카이저가 문제야.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라 우핑이 상대하기는 역부족이네.”
“그렇긴 하지. 하지만 방금 전 우핑의 보고는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네. 전쟁을 앞두고 여기저기 적을 만드는 것은 좋지 않아.”
“그자 일은 자네에게 일임하도록 하지. 그보다 북한 쪽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있어.”
“또?”
리광잉의 인상이 당장 찌푸려졌다.
충분히 설득했다고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북한의 무모한 핵 실험 때문에 많은 계획들이 틀어져 버렸다.
아직은 미국과 직접 부딪히는 것은 피한 채 힘을 길러야 하는데, 북한의 도발에 이은 사드 배치로 중미 관계가 최악을 치닫고 있었다.
거기에 카이저라는 복병까지 나타나 미국과의 관계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됐다.
그런데 북한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계륵 같은 존재였다.
왕칭린이 말을 이었다.
“국내가 아니라 외국에서 모종의 작전을 수행하려는 모양이야. 보위성 소속의 특수 요원들이 가짜 여권을 사용해 빠져나간 정황이 포착됐네.”
“미친……. 이건 무조건 막아야 해. 국내도 아니고 외국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사태가 더욱 악화돼.”
“나도 같은 생각이네. 북한의 새 지도자는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너무 겁이 없어. 그래서 이번 기회에 자신들의 위치가 어떤지 깨닫게 해 줄 생각이네.”
“좋은 생각이야. 지금은 최대한 미국을 자극하지 않아야 해.”
두 사람은 이후로도 한동안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를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리광잉이 신임 경제 부총리가 되어 첫 방문지로 미국을 택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