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베트남 공략
“중국은 당연히 자신들의 영토라고 줄기차게 주장하는 반면, 다른 나라들은 어떤 지도자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그 입장이 오락가락합니다. 현 시점 기준으로는 대만, 베트남은 강경파이고, 필리핀은 친중, 말레이시아와 브루나이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필리핀이 친중으로 돌아선 이유는 뭡니까?”
“신임 대통령이 취임 이후 중국으로부터 수십억 달러 규모의 통상과 투자 등을 끌어들이는 대가로 친중 행보를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조사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일단 남중국해는 그 정도로 하고, 다음은 동흥 그룹에 대해 보고해 주세요.”
이번에는 한상국이 답했다.
“동흥 그룹은 건설, 리조트, 테마 파크, 유통, 백화점, 병원, 학교 등 베트남의 많은 영역에서 비즈니스를 하고 있으며, 급격하게 성장하는 베트남 시장에서 단연 독보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대기업입니다. 시가총액은 30억 달러로 국영 기업을 제외하면 베트남 1위 기업입니다.”
“다양한 분야의 사업을 펼치고 있군요.”
“회장인 응우옌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 하노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럽에 유학을 다녀온 이후로 부동산 개발업자로 변신해 부를 축적하며 사업을 키워 왔습니다. 재산은 31억 달러 정도로 추산됩니다.”
“지분 구조는 어떻게 됩니까?”
“응우옌 회장의 동흥 그룹 지분은 30%이고, 외국인 지분율은 약 15%인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진혁이 모두를 보고 말했다.
“이번 일은 투 트랙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김상균 실장님과 유전 개발 문제를 맡을 테니, 김선혁 회장님은 한상국 실장님과 국민차 생산을 맡아 주십시오.”
“알았다.”
“그럼 모두 수고해 주십시오.”
진혁의 말에 다들 서둘러 일어났다.
또 다시 전쟁이 시작됐다.
각자 맡겨진 일을 처리하느라 바쁠 때 진혁은 테헤란로에 위치한 ‘JHC 엔터테인먼트’ 사무실을 찾아갔다.
천진홍 사장이 급히 일어나 맞았다.
“갑자기 찾아오신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그동안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아서 들렀습니다.”
자리에 앉은 뒤 비서가 커피를 가져다 놓고 돌아가자 진혁이 물었다.
“자우하리 양은 잘하고 있습니까?”
“그럼요. 자우하리뿐만 아니라 참여한 ‘와일드걸즈’의 인기가 계속 올라가고 있습니다. 조만간 2집 앨범을 발표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혹시 와일드걸즈에 베트남 출신도 있습니까?”
“키오친이 하노이 태생입니다.”
“잘됐군요. 이번 2집 앨범 발표는 물론 앞으로 모든 활동에 대해서도 알라딘에서 전부 지원하겠습니다. ‘와일드걸즈’를 최고로 만들어 주십시오.”
“저야 그러면 감사하지만…… 갑자기 왜?”
“동남아시아, 그중에서도 베트남에 집중 투자할까 생각 중입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프로의 세계는 실력을 겨루는 곳이지,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곳이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와일드걸즈를 최고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천진홍의 확답을 받아낸 후에야 진혁의 얼굴이 풀어졌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온 진혁은 아이들과 놀아 줬다.
혜주는 동생이 생기자 의젓해져 혼자 스스로 알아서 했지만 혜성은 아니었다. 사내자식이라서 그런지 장난이 심해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겨우 씻겨 재우고 돌아오자 지민이 침대에 누워 책을 보고 있었다.
진혁이 옆에 누우며 말했다.
“베트남 총리로부터 부탁을 받아 당분간은 그쪽 일에 매달려야 할 것 같아.”
“집 걱정은 마세요. 제가 아이들에게 더 신경 쓸게요.”
“이번 일은 함께 해 보는 게 어때?”
“함께요?”
지민이 놀라 물었다.
그녀는 알라딘 복지 재단이 설립될 때 이사장을 맡았었지만, 혜성을 가지고 전문 경영인에게 넘겨줘서 현재는 육아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진혁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알라딘의 동남아시아 사업은 무슬림 국가인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 편중되어 있다는 한계가 있어. 나는 그것을 이번 베트남 사업을 통해 뛰어넘으려고 해.”
“베트남이 신흥국 시장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기사는 봐서 잘 알고 있어요. 그룹 내에 뛰어난 분들이 많은데 제가 얼마나 도움이 되겠어요?”
“내 사업을 도와달라는 게 아니야. 당신은 다른 부문에서 베트남과 협력방안을 모색해 봐.”
“다른 부분요?”
“아직은 개도국이라 복지 관련해서는 많이 열악할 거야. 그쪽으로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어요.”
지민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그렇지 않아도 따분함을 느끼던 참이었다.
* * *
한국을 떠난 진혁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말레이시아였다.
관련국 지도자 중 가장 우호적이면서도 능력이 있는 이가 탕분헝 총리였다.
국민차의 성공적인 생산에 대한 이례적인 대화가 오간 후 진혁이 말했다.
“얼마 전 베트남 총리께서 연락을 주셔서 만나 뵀습니다.”
“그래요?”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도발을 막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서 회장이 나를 도와준 것을 보고 부탁한 모양인데,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도 그래서 고사했는데 국민차 생산을 제게 맡기겠다고 하셨습니다.”
“허허. 그 양반, 로열티도 안 내고 거저먹으려고 하네.”
탕분헝이 헛웃음 지으며 어이없어 하다가 이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남중국해 영토 분쟁은 그 역사가 오래됐습니다. 그간 많은 지도자들이 해결하겠다고 나섰다가, 성과는커녕 정권교체라는 뼈아픈 실패만 맛보고 물러났습니다. 그래서 나도 지난 방중 때 일부러 그 문제는 언급하지 않은 겁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이미 승낙했습니다.”
“성급한 결정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찾아뵙고 물리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탕분헝이 진심으로 우려를 나타냈다.
진혁의 능력을 알지만 사업가인 그가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혹여라도 이번 일로 진혁이 타격을 입는다면 어렵게 시작한 국민차 생산에 큰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우려도 있었다.
진혁이 침묵하자 탕분헝이 말을 이었다.
“아세안 국가들은 중국으로부터 여러 번 침략을 받아 항상 위기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중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입니다. 화교가 득세하는 게 다 자본의 필요성 때문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세안 국가들 대부분에서 중국이 주요 수출입 상대국 1~2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왕칭린 집권 이후 동서경제벨트 사업으로 중국이 이 지역에 막대한 원조 투자를 감행하면서 영향력을 급격하게 키워 온 터라, 대중국 의존도는 한층 올라가 있는 상황이고요. 필리핀의 신임 시마투 대통령이 친중으로 돌아선 것은 그런 경제적인 현실 때문일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중국해 영토 분쟁을 꺼내는 것은 득보다 실이 큽니다.”
탕분헝의 냉철한 판단에 진혁은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하지만 자신은 이미 약속했고, 그걸 타파할 비책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역시 총리님과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변했습니다. 지금이 오히려 해묵은 남중국해의 영토 분쟁을 해결할 적기라고 생각합니다.”
“적기요?”
“그렇습니다. 미국 카이저 대통령의 당선이 아세안 국가에 기회를 줬습니다.”
“자세히 말해 보시오.”
탕분헝이 마침내 관심을 보였다.
“아시다시피 카이저 대통령의 정책은 ‘미국제일주의’로 요약됩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G2로 급부상한 중국에 대한 견제로 나타날 겁니다.”
“음…….”
“필리핀의 대미 관계는 안보를 기본 축으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또한 미국은 필리핀의 최대 교역 상대국인 동시에 주요 투자국입니다. 미국에는 400만 명의 필리핀인이, 필리핀에는 25만 명의 필리핀계 미국인 등이 체류하고 있으며, 매년 약 40만 명 내외의 미국인이 필리핀을 방문하고 있을 정도로 두 나라 관계는 돈독했습니다. 그런데 신임 시마투 대통령의 친중 노선으로의 전환은 카이저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입니다.”
“이 일에 미국을 끌어들일 생각이오?”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적대하는 인도는 물론 사드 배치로 경제 보복을 당하고 있는 한국, 남중국해로 해상 운송을 해야 하는 일본 등 동서경제벨트로 외환 위기에 직면한 국가들 모두를 어우를 생각입니다.”
“……!”
상상하지 못한 큰 그림을 계획하는 진혁의 모습에, 탕분헝은 그저 입만 딱 벌린 채 놀라워했다.
“말레이시아뿐만 아니라 직접 관련국들은 중국과의 교역 문제로 전면에 나서기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제가 주변국이 먼저 나설 수 있게 준비하겠습니다. 그때 함께 동참할 수 있도록 나머지 국가들의 지도자들을 설득만 해 주십시오.”
“그 정도라면 당연히 해 드려야지요.”
탕분헝이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승낙했다. 자신들로서는 손도 안 대고 코풀 수 있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자 진혁이 다른 용건을 꺼냈다.
“전기차 충전 시설 설치가 예상보다 늦어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설치비의 70%까지 보조금으로 지급하겠다며 독려하고 있는데도 신청하는 곳들이 많지 않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이제 막 생산하기 시작한 차종이라 성공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전기차의 성공을 위해서는 인프라의 구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압니다만 예산이란 게 한정적이다 보니 더 이상의 지원은 어렵습니다.”
“제가 정해진 예산 내에 전기 충전 시설을 획기적으로 늘릴 방안을 마련해 봤습니다.”
진혁이 가방에서 준비한 사업 계획서를 꺼내 탕분헝에게 건네주고 말했다.
“현재 말레이시아 정부에서 선정한 충전 설비는 가정용 소용량인 데다 단일 모듈로 되어 있어 한 번에 한 대만 가능합니다. 게다가 충전 시간이 길고 고장에 취약하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한국의 업체가 병렬 블럭 방식의 대용량 충전기를 개발해 이런 단점을 모두 극복할 수 있게 됐습니다.”
파워넷 권길영 사장이 개발한 전기차 충전기에 대해 들려줬다.
탕분헝이 물었다.
“한국 제품도 보조금 지급 대상에 포함시켜 달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이윤을 최소화해서 최대한 낮은 가격에 납품하겠습니다.”
“음…….”
탕분헝이 바로 답을 하지 않았다. 좋은 제품인 것 같지만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추가하는 것은 원칙에 배치되는 일이었다.
그런 마음을 알고 진혁이 말했다.
“포함만 되면 최소 만 곳 이상의 신청서를 받아 오겠습니다.”
“헉……. 만 곳이나요?”
탕분헝이 놀라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올해 목표가 3만 곳인데 현재 오천 곳을 겨우 넘길 정도로 인기가 없었다.
“총리님과 마찬가지로 국민차의 성공은 저에게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 제품의 납품으로 이득을 볼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저 하루빨리 인프라 구축을 바라는 마음일 뿐입니다.”
“서 회장님의 각오가 그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알겠습니다. 관련 부서에 지시해 서둘러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드시 성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중요한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두 사람은 이후 점심 식사까지 같이 하며 편하게 앞으로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총리실을 나와 시내에 위치한 ‘아세안모터스’ 말레이시아 법인 사무실로 갔다.
텡 로이 사장이 인도네시아에서 건너온 라이꾸두 회장과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총리님과 말씀은 잘 끝나셨습니까?”
“예. 잘 끝났습니다. 그 일 때문에 두 분을 뵙자고 한 겁니다.”
진혁은 우선 파워넷의 대용량 전기차 충전기에 대해 들려줬다.
“탕분헝 총리께서 감사하게도 해당 제품을 보조금 대상 제품에 추가시켜주시기로 했습니다.”
“아……. 예.”
텡 로이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진혁의 얼굴이 굳어지자 라이꾸두의 머리에 경고등이 켜졌다.
그간 지켜본 진혁은 사고의 끝을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자신들의 사업과 무관해 보이지만, 그런 일에 자신을 이곳까지 오게 했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뭔가 다른 뜻이 숨어있는 게 틀림없었다.
생각을 마친 라이꾸두가 얼른 입을 뗐다.
“그게 우리가 하는 사업과 연관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진혁의 확신에 그제야 텡로이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