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뉴트 특별 보좌관
진혁이 말을 이었다.
“전 이번 제품은 유통 매장을 상대로 신청서를 받을 생각입니다.”
“매장에요?”
“각 매장이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막대한 홍보비를 지출하며 출혈 경쟁까지 하고 있음은 저보다 더 잘 아실 겁니다. 제품의 성능을 개선했다지만 충전에 승용차 기준 평균 두 시간가량 소요된다고 합니다. 그 시간 동안 손님들이 뭘 할 것 같습니까?”
“……!”
두 사람의 눈이 바로 커졌다.
충전되기를 기다리는 손님이 할 일은 딱 한 가지뿐이었다.
쇼핑!
“쇼핑하면서 충전하는 게 아니라 충전을 위해 쇼핑하는 시대가 도래할 겁니다.”
“당장 저희 매장부터 설치하게 해 주십시오.”
“다이리팜 회장님과 바로 면담을 잡겠습니다.”
라이꾸두와 텡 로이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그들도 이제 진혁이 가져온 게 얼마나 큰 파급력을 지녔는지 깨닫고 있었다.
진혁이 텡 로이를 보고 말했다.
“다이리팜 그룹을 상대하는 것은 제가 아니라 사장님이 하십시오.”
“제가 말입니까?”
“사장님은 이제 알라딘 그룹의 일원이 되셨습니다. 이 정도의 일에 제가 직접 나서는 게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텡 로이가 바로 머리를 숙이며 인정했다.
“다이리팜 그룹을 만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총리께서 예산이 한정되어 있다고 하시더군요.”
“맞습니다. 올해는 3만 대까지만 보조금 지급이 가능하다는 발표를 봤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전기차 판매지, 충전소 설치가 아닙니다. 그러니 작은 인연에 연연하지 말고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곳부터 우선 설치할 수 있도록 안배를 잘하셔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선전하겠습니다.”
텡 로이와 용건이 끝나자 이번에는 라이꾸두를 보고 말했다.
“회장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알라마트에만 너무 집착하시면 더 큰 것을 잃으실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쿤초로 회장님과 상의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진혁의 말에 라이꾸두가 어금니를 물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도네시아 화교의 우두머리는 여전히 쿤초로였다.
잔뜩 굳은 라이꾸두의 표정을 보고 진혁이 말했다.
“제가 다른 일 때문에 인도네시아에는 들르지 못할 것 같습니다. 회장님께서 대신 대통령을 만나 주십시오.”
“대통령을요?”
“탕분헝 총리께서 전화를 하신다고 했으니, 가서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보조금 나올 수 있도록 처리해 주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라이꾸두가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화교를 대표해서 대통령을 만나는 것도 언제나 쿤초로였다.
대통령과의 독대는 겨우 충전소 설치 매장 배분에 비할 바가 아닌 큰일이었다.
* * *
동남아시아의 일을 마친 진혁은 미국으로 건너갔다.
워싱턴의 한 호텔로 들어선 지 얼마 후 CIA 잭슨이 찾아왔다.
“우리를 비서 부리듯이 아무 때나 불러 일 시키는 것은 미스터 서가 유일할 거야.”
“비서라니요. 친구라 자그만 도움을 청한 것뿐입니다. 이번 일이 잘되면 제가 거하게 한잔 사겠습니다.”
“지난번에도 그 약속은 했던 것 같은데…….”
잭슨에 날카로운 지적에 진혁은 속으로 뜨끔했다.
함반토타 항 인수 작업 때 도움을 주어 감사의 표시로 술 약속을 했었는데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지키지 못했다.
“이번에는 넉넉하게 시간을 빼서 왔으니 걱정 마시고 잘 부탁드립니다.”
“하는 것 봐서. 곧 도착할 거야.”
잭슨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람이 들어왔는데, 역시 함반토타 항 인수 때 만난 적이 있는 윌슨 재무부 차관과 국방부의 베이커 대장이었다.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은 진혁은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 거론했다.
“함반토타 항과 마찬가지로 남중국해는 인도양 길목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중국이 장악하게 되면 해상 물류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 심각한 위협에 처하게 됩니다.”
“우리도 그 때문에 대책을 마련 중에 있습니다. 필리핀 신임 대통령이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때릴 줄은 몰랐습니다.”
“동남아시아에 대한 중국의 경제적 지배력이 생각보다 깊습니다. 중국의 야욕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경제 원조의 필요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협조하거나 침묵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윌슨의 질문에 진혁은 베이커 대장을 보고 말했다.
“함반토타 항 때와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의 영토 확장에 반대하는 세력을 규합해서 이번 일도 풀 생각입니다. 이미 동서경제벨트가 채무패권주의라는 사실이 알려졌으니 그때보다는 수월할 겁니다. 미국이 앞에 서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보고 드리고 동참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 역시 중국의 야욕에 대한 우려를 하고 있던 터라 이견이 없었다. 거기에 진혁의 능력을 직접 확인하기까지 한 터라 믿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먼저 나가고 잭슨마저 저녁때 연락하겠다며 떠나자 혼자 남은 진혁은 잠시 생각하다 핸드폰을 들었다.
스카이라운지로 가자 JK모건의 스미스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회장님이 오셨다는데 당연히 인사드려야지요. 마침 워싱턴에 볼일이 있었습니다.”
스미스의 태도가 정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 브렉시트를 정확히 예상한 진혁이었다.
그때 투자를 반대했던 임원들은 지금도 혹독한 대가를 치루고 있었다.
본사에서 극진하게 대접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것은 당연했다.
스미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앞으로 EU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낼 겁니다. 경제 공동체로 묶여 있지만 각국이 처한 상황이 다 다릅니다. 영국의 사례가 선례가 되어 각국의 개별적인 요구가 거세질 겁니다.”
“그렇군요.”
어두운 표정으로 변한 스미스를 보며 이번에는 진혁이 질문을 했다.
“미국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카이저 대통령이 당선될 당시는 극심한 혼란이 올 것 같았는데 의외로 빨리 안정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한 여러 정책들이 국민들에게 먹혀들어가고 있습니다.”
카이저 대통령의 행보는 파격적이라는 말로 부족할 정도로 과격했다.
세계기후조약에서 탈퇴하고 FTA 협약을 파기하는 것은 물론, 신규 이민은 막고 불법 이민자들을 강제 추방했다.
그것으로 모자라 멕시코 국경에는 장벽을 설치하는 등, 후진국 독재자가 저지르는 국수주의를 방불케 하는 이기적인 행보를 보였다.
약한 나라에게는 굴복을 강요하는 협상을 벌이면서, 해외에 있는 미국 기업에 대해서도 미국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관세 폭탄을 퍼붓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단기적으로는 일자리가 생기고 경기가 호전되겠지만, 그 기간은 오래가지 않을 겁니다.”
“저희도 같은 판단입니다. 하지만 보수층의 지지를 확인한 카이저 대통령은 힘을 앞세우고 국제적인 질서를 무시하는 국수주의적 자세가 자국을 위한 정책이라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현재 중국이 주변국으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듯, 미국 역시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왕칭린이나 카이저 역시 힘의 논리를 앞세운 강력한 정책을 펼치고 있어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불확실성이 커진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투자의 최대의 적은 최악이 아니라 불확실성이었다. 방향성을 정할 수 없으니 장기 투자는 금물이었다.
답이 없는 이야기라 스미스가 화제를 돌렸다.
“미국에는 어쩐 일입니까?”
“동남아시아 사업 관련으로 정부 관계자와 상의할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러시군요…….”
스미스가 일부러 말끝을 흘리며 눈치를 봤지만 진혁은 모른 척했다. 큰 문제는 없겠지만 아직 확정된 게 아니니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스미스도 그런 사정을 짐작하고, 그 일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다른 용건을 꺼내 놨다.
“알라딘 정도면 이제 유럽이나 미국시장에 직접 진출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 막 아프리카 시장 진출을 시작했습니다. 그게 안정되면 그때 천천히 고민해 볼 생각입니다.”
“아무튼 회장님은 여러 가지로 다른 사업가들과는 다르십니다.”
일반적으로는 가장 큰 시장에 먼저 진출하는데, 진혁은 정반대의 길을 걸으며 성장해 오고 있었다.
“능력과 자금력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는 이곳에도 알라딘 사무실이 생기겠지요. 서두를 생각은 없습니다.”
진혁의 느긋한 태도에 오히려 믿음이 갔다.
그 시각, 백악관 대통령 집무동에서는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비서실장 닉 메도스가 보고를 했다.
“국방부와 재무부 모두 남중국해 영토 분쟁에 적극 개입하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그자가 말레이시아 탕분헝 총리를 도와 동서경제벨트 사업을 취소시켰다고?”
“맞습니다. 그전에 스리랑카 함반토타 항 인수 작업도 성공시켰습니다.”
“재미있는 자야. 나중에 기회가 되면 중국을 상대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겠어. 이번 일을 승낙하면서 한번 자리를 만들어 봐.”
“알겠…….”
“이런 식으로 바로 승낙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말을 자르며 끼어든 것은 뉴트 특별보좌관이었다.
카이저가 물었다.
“남중국해 문제에 나서는 걸 반대하는 것이냐?”
“그건 아닙니다. 당연히 중국의 야욕은 막아야지요. 하지만 그 또한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뉴트는 카이저 대통령의 장남으로 숨은 실세였다.
카이저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대통령에 당선된 데는 캠프 운영을 맡은 뉴트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일부에서는 카이저가 최고 경영자라면 뉴트는 최고 운영 책임자라고 평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막강했다.
카이저가 물었다.
“무슨 생각이 있느냐?”
“서진혁과 알리딘 그룹에 대해 조사해 봤는데, 능력이 상당했습니다.”
“그렇겠지. 그러니 이렇게 큰 계획을 만들어 왕칭린을 계속 곤혹스럽게 만들었겠지.”
“곧 있을 중국과의 무역 전쟁을 위해서라도 이자를 우리 편으로 잡아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말이냐?”
카이저가 관심을 보이며 다시 물었다.
“서 회장은 사업가입니다. 중국의 야욕을 막는다는 이유를 댔지만 결국 이득을 보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함반토타 항을 인수해 심해항을 소유하게 됐고, 탕분헝 총리를 돕는 대가로 국민차 생산을 받아냈습니다. 이번 일도 분명 뭔가 이득을 볼 게 있어서 나선 것일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카이저 질문을 받은 제임스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카이저 정부가 들어서면서 CIA 국장이 되었다.
“서진혁의 행보가 급박해진 것은 베트남 총리를 만나고 난 다음부터입니다.”
“쯔엉을?”
“그렇습니다. 예정 없던 방문이었는데, 그다음 말레이시아로 건너가 탕분헝 총리를 만나고 바로 이곳으로 왔습니다.”
“결국 쯔엉 총리와 무언가 밀약이 있었다는 말이군.”
“그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만 정확한 것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최대한 빨리 알아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카이저가 다시 뉴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 계획을 말해 봐라.”
“쯔엉 총리로부터 이번 일을 해결하면 사업적인 이득을 주겠다는 언질을 받아서 나선 것이 분명합니다. 그걸 이용해 놈을 묶어 두었으면 합니다.”
“방법은?”
“현재 우리나라 유통 업체들은 심각한 경영난에 빠져 있습니다. 아마존과 알리바마라는 거대 온라인 유통 강자의 등장으로 시장의 대부분을 빼앗겼습니다. 대형 신발 할인 판매 체인점인 슈즈몰이 파산 보호를 신청했습니다. 아라칸마저 심각한 경영 위기를 겪고 있다고 합니다.”
“상황이 심각하군.”
카이저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라칸은 작은 점포에서 출발해 반세기 가까이 미국 유통업계 1위를 지켜 온, 20세기를 풍미한 유통 공룡이었다.
미국인의 소비 패턴을 바꾼 기업이란 평가를 받을 정도로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였다.
세계 28개국에 진출해 있고, 종업원 수만 200만이 넘는 초유의 대기업이었다.
무엇보다 본사가 있는 아칸소 주는 공화당의 텃밭이었다.
카이저가 다시 물었다.
“그자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느냐?”
“최소한 답은 찾아낼 거라고 봅니다. 특이하게 서 회장은 온오프라인 사업 모두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이자를 잡아야 한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좋다. 이 일을 네게 맡기마. 한번 해결해 봐라.”
“감사합니다.”
두 사람만의 결정으로 인해 배석한 비서실장 닉과 CIA 국장 제임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카이저의 결정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참모들의 의견은 참고 사항일 뿐, 모든 걸 아들 뉴트 생각을 듣고 결정했다.
문제가 있는 국정 운영 방식이었다.
* * *
잭슨이 찾아온 것은 늦은 저녁이었다.
“함께 식사하려고 했는데 일이 많으셨나 봅니다.”
“나가지.”
잭슨을 따라 밖으로 나가자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달려 시내를 벗어나 인적이 뜸한 곳의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진혁이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