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261화 (261/307)

261화. 은밀한 거래

“……?”

“아라칸 주식을 다른 곳에 매각해 버리면 여러 가지로 곤란해질 것 같아서요.”

“……그러지요.”

싸늘하게 말하고 나가 버리는 뉴트의 행동에 한상국이 분통을 터트렸다.

“건방진 자입니다.”

“힘이 있으니까요.”

“아무리 그렇더라도 도움을 주신 회장님께 저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 대가로 거대 미국 시장에 무혈입성할 수 있다면 이런 대접은 몇 번을 받아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권력은 유한하지만 기업은 영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뉴트는 자신이 지금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오래지 않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도록 한 실장님이 각별히 신경 써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당장 한국에 전화해서 최고의 인수팀을 꾸려 넘어오게 하겠습니다.”

의지를 다지는 한상국에게 진혁은 잠시 쉬겠다며 일어났다.

진혁이라고 자존심이 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하 직원 앞에서 그런 감정을 그대로 표출할 수는 없었다.

축 처진 어깨로 방으로 들어서는 진혁의 등을 바라보는 김상균의 눈에는 안쓰러움이 묻어 있었다.

이건 비단 진혁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국력이 미국에 못 미쳐서 발생한 일이었다.

* * *

존 지크 회장과의 만남은 JK모건에서 이루어졌다.

배석자는 스미스였다.

“이렇게 검은 머리 짐을 보게 되는군요.”

“회장님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은 내가 영광이지요. 냉정한 하윤 회장이 칭찬의 말을 여러 번 했습니다.”

“하윤 회장님께는 제가 여러 번 도움을 받았습니다.”

“서 회장님이 아라칸에 투자할 줄 알았다면 주식을 정리한다고 하는 게 아닌데. 내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습니다.”

지크 회장은 말뿐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악관의 청만 아니었다면 번복하거나 가격을 크게 올렸을 게 틀림없었다.

그 때문에 진혁이 굴욕을 참아 가며 뉴트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결국 지크 회장은 애초에 약속한 대로 50억 달러에 아라칸 주식 전체를 넘기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중요한 선약이 있어 떠나야 한다는 게 아쉽습니다.”

“이곳에서 사업을 시작했으니 가끔 들를 겁니다. 그때 미리 전화 드리고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좋은 결과 얻으시기 바랍니다.”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떠나는 지크 회장을 배웅하고 돌아온 스미스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호재가 있어서 요 며칠 아라칸 주가가 요동을 쳤군요. 미리 언질이라도 주시지…….”

“짐작하시겠지만 백악관이 관여된 일이라 보안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에 확정된 것도 아니었고요.”

“아무튼 회장님이 직접 투자하고 함께 사업까지 펼친다면 아라칸이 기사회생하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 우리도 비중을 늘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진혁은 며칠 전에 알라딘 홀딩스의 야망 사장에게 전화해 아라칸 주식을 매입하라는 지시를 내린 상태였다.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하마드가 도착해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이야기를 들었는지 잔뜩 흥분된 얼굴로 하마드가 인사부터 건넸다.

뒤늦게 합류해 한국만 담당했던 한상국과 달리 하마드는 처음부터 알쇼핑을 맡아 함께 시장 개척을 해 온 터라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세계 제일의 강국인 미국 시장에 진출하게 됐다는데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진혁이 자리에 앉더니 말했다.

“아라칸과 신설 온라인 유통 법인의 사장을 우리 쪽 사람으로 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전 그 자리를 하마드 사장님이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요?”

하마드가 놀라 물었다. 그만큼 역할이 큰 자리였다.

물론 피터 회장이 처음부터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알라딘이 강점을 가지고 있는 온라인이고, 지분과 회사 이름을 양보했는데도 자리까지 욕심낸다면 제휴를 철회하겠다는 배수진까지 쳐서 겨우 승낙을 받아냈다.

한상국에게 맡길까도 생각했지만 그는 전체를 총괄해야 해서 하마드가 낙점됐다.

“이미 훨씬 전부터 독자적인 사업을 맡으셨어야 합니다. 너무 늦게 기회를 줬다고 투정부리시면 안 됩니다.”

“제가 어찌 감히……. 감사합니다. 회장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최고의 매출로 보답하겠습니다.”

“믿습니다.”

진혁은 두 눈이 벌게진 하마드의 손을 잡아 다독거려 줬다.

* * *

아라칸 이사회의 승인이 나자 다음 날 바로 아라칸-알쇼핑 법인이 설립되었다.

한국에서 급히 결성된 인수팀이 건너오자 한상국과 하마드에게 맡기고 진혁은 말레이시아로 건너왔다.

탕분헝 총리가 반갑게 맞으며 물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하겠다는 확답을 받았습니다.”

“큰일을 했습니다. 미국이 나선다면 중국도 함부로 도발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건 그렇지만…….”

말끝을 흐리는 진혁의 모습에 탕분헝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

“곰을 내쫓으려다가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감이 들었습니다.”

“……?”

의아해하는 탕분헝에게 진혁이 뉴트와의 일을 들려주고 말했다.

“카이저 대통령의 미국제일주의도 왕칭린 주석의 동서경제벨트처럼 패권주의라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힘이면 모두 할 수 있다는 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번 일을 위해 환인도양 연합을 움직이겠다고까지 하더군요.”

“음…….”

“저야 사업가니까 이득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의 굴욕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길 수 있지만, 각국 지도자분들은 그럴 수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미국이라도 내정까지 간섭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지요.”

“그래서 걱정이 되어 총리님께 먼저 찾아온 겁니다.”

한참동안 고민하던 탕분헝이 물었다.

“서 회장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아세안이 어느 국가에 좌지우지되는 것은 옳은 방향이 아닙니다.”

“그건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한 곳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니오?”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무슨 복안이 있는 것이오?”

“두 나라의 최종 목표는 상대이지, 이곳이 아닙니다.”

“서로 싸움을 붙이자는 말이오?”

“두 나라 지도자 모두 패권주의를 표방하는 강경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괜히 거기에 끼어 피해를 볼 이유가 없습니다. 당장 한국만 해도, 미국의 사드 배치를 받아들여 중국으로부터 경제 보복을 당해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탕분헝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생각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자칫 잘못 선택했다가는 나라 경제가 파탄이 날 수도 있었다.

탕분헝의 생각이 길어지자 진혁이 먼저 입을 뗐다.

“제게 한 가지 복안이 있기는 합니다.”

“뭡니까?”

“미국의 움직임을 중국에 알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중국에 알리자고 하신 겁니까?”

탕분헝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다시 물을 정도로 의외의 제안이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G2로 급성장한 중국이라지만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 남중국해 관련국들도 자원 개발을 하자는 것이지, 당장 중국을 몰아내자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미국의 개입을 알려서 중국을 압박해 양보를 받아내자는 계획이군요.”

“맞습니다. 더불어 중국에 빚을 지우는 부수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서 회장의 생각은 정말 그 끝이 없군요. 지금으로서는 가장 적절한 대책인 것 같소.”

탕분헝이 자신의 계획에 동의하자 진혁이 말했다.

“중국에 알리는 것은 총리께서 해 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말이오?”

“아무에게나 함부로 알릴 수 없는 중요한 사안입니다. 제가 그 정도 인사를 만나면 CIA가 금방 알아챌 겁니다. 위험 부담이 너무 큽니다.”

“알겠소. 중국에 알리는 것은 내가 맡도록 하지요.”

진혁은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누고 총리실을 나왔다.

그 뒤 호텔로 바로 돌아간 진혁은 뜨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며칠간 긴장 속에 생활했더니 피로가 극에 달했다.

* * *

하루 푹 쉰 진혁은 미국으로 건너가 진행 사항을 체크한 후 나머지 일은 하마드에게 맡기고 한상국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제2회 동행 한마당 행사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알라딘 그룹으로 가자 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은 진혁이 좌중을 둘러보고 말했다.

“보고해주십시오.”

“이번 행사는 국내외 15만 개 브랜드의 1,700만 개 상품 판매를 목표로 계획을 세웠는데, 목표 달성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매출 목표액은 지난해에 대비 33% 증가한 26조 원으로 책정했습니다. 이는 지난 독신절보다 5조 원 높은 금액이긴 합니다만, 회장님이 미국 시장 진출을 성사시켰으니 대폭 늘려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견들이 많습니다.”

“이번 행사에 아라칸-알쇼핑은 참여하지 않습니다.”

“예?”

“동행 한마당은 올 한 해 하고 말 행사가 아닙니다. 괜히 서두르다 실수하면 부정적인 이미지만 주게 됩니다. 제대로 준비해서 내년에 멋지게 시작하는 게 맞습니다.”

“그건 서 회장의 말이 맞다. 올해 행사는 미국을 제외하고 진행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워라.”

김선혁도 같은 생각이라 동의했다.

이후 행사 관련 여러 보고를 받은 후 진혁은 김선혁과 따로 자리를 가졌다.

“남중국해 문제는 어떻게 됐냐?”

“미국이 적극 나서 준다고 했습니다.”

진혁은 미국에서의 일을 들려주었다.

“큰일을 해냈다.”

“제가 했다기보다는 뉴트란 자가 괜히 자존심을 내세웠다가 떠안게 된 겁니다. 덕분에 손쉽게 아라칸과 제휴를 맺을 수 있게 됐던 거고요.”

“어디건 갑자기 권력을 얻게 되면 분위기에 휩쓸려 똥오줌 가리지 못하는 놈들이 있지.”

“맞습니다. 문제는 그게 세계 제일의 강대국인 미국이란 겁니다. 세계 중심을 잡아 줘야 할 국가가 오히려 혼란을 부추기고 있어서 걱정입니다.”

“그렇지. 거기가 기침만 해도 한국은 감기가 걸릴 테니까. 아무튼 중국의 공작을 탕분헝 총리에게 넘긴 것은 잘한 일이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일은 멀리하는 게 좋다.”

한국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 정권에 유착됐던 기업들이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동흥 그룹과 협력해서 국민차 생산하는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진혁이 물었다.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아 보인다.”

“왜요?”

“동흥 그룹의 응우옌 회장은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해 급격히 사업을 넓혔다. 유통, 교육, 의료까지 영역을 확대했는데 이번에 자동차까지 손을 뻗히려는 것 같다.”

“그렇겠지요. 그래서 메콩 자동차 인수 의향서를 제출했겠지요.”

당연한 것 아니냐고 묻는 진혁의 모습에 김선혁이 이마를 잔뜩 찌푸리고 말했다.

“직접 만나 봤는데, 총리실로부터 연락을 받았는지 협력해서 잘해 보자고 하더라.”

“그럼 다 된 거잖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조사 과정에서 이상한 게 튀어나왔다.”

“……?”

“동흥 그룹은 다낭에 ‘동흥 테마 파크’를 조성 중인데 총 공사비가 1조 달러라고 하더라. 완공은 2년 후고.”

“……!”

진혁의 눈가에도 주름이 잡혔다.

이건 좋지 않다.

동흥 그룹의 시가 총액은 30억 달러였다. 그런데 30배가 넘는 1조 달러 건설 공사를 한다?

물론 투자자를 모집해 자금을 조달하면 가능은 했다. 하지만 그런 대규모 사업을 하면서 다른 사업 진출까지 한다는 것은 무리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한국의 대기업들이 경제 성장기에 문어발식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 온 길을 답습하는 것 같다.”

김선혁의 지적은 정확했다.

덩치만 키우다가 경제 위기가 닥치자 많은 기업들이 그 후유증으로 사라지거나 계열사 헐값 매각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었다.

진혁이 물었다.

“파트너를 바꿔야 할 것 같습니까?”

“그게 또 쉽지 않아. 베트남 정부에서 동흥 그룹을 전략적으로 성장시키고 있다. ‘동흥 테마 파크’의 공사비를 조달할 수 있었던 것도 베트남 정부의 보증이 있어서 가능했던 거였다. 동흥을 배제하고 우리가 단독으로 국민차를 생산하는 것은 총리가 허락하지 않을 거야.”

“그렇겠지요. 일단 알겠습니다. 저도 대책을 생각해 볼 테니 회장님도 더 고민해 봐 주십시오.”

“알았다.”

일어나서 나가는 김선혁이나 남은 진혁이나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다된 밥에 코 빠트린다고, 가장 어려운 남중국해 문제를 해결했는데 의외의 곳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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