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각자도생
진혁은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바로 집으로 향했다. 장기간 해외 출장으로 집을 비웠었다.
오랜만에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뒤 혜성이를 재우고 방으로 들어가자 지민이 기다리고 있다가 바로 말했다.
“베트남과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 봤어요.”
“당신은 내가 와서 좋은 게 아니라 사업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게 더 반가운 것 같네?”
“그럴 리가요. 우리 신랑이 제일 반갑지요. 거기에 사업 이야기를 같이 할 수 있어서 더 반가운 거고요. 헤헤.”
속마음을 들킨 지민이 얼른 변명했지만 억지로 변명하는 티가 역력했다.
하지만 진혁은 모른 척 물었다.
“그래. 어떻게 협력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조사해 보니 생각보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들이 많더라고요. 작년 말 기준 2백만 명이 넘는데, 국가별로는 중국이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그다음이 베트남이에요. 그 뒤로 미국, 태국, 우즈베키스탄 순이었어요.”
“베트남이 2위네.”
“결혼 이민자와 그 동반 가족, 유학생이 지속적으로 증가해 미국을 제쳤는데, 아직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해요. 태국도 조만간 미국을 추월할 거라고 하고요. 동남아시아계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어요.”
“그럼 국내 동남아시아인들을 위한 다양한 지원 대책을 마련해야겠네. 법률이나 생활 안정 같은 것 말이야.”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베트남 전문가들을 만나 보니 제일 시급한 게 ‘라이따이한’에 대한 지원이라고 해요.”
“라이따이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들을 부르는 말이래요. 정부 발표로는 5천 명 정도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2만 명이 넘을 거라는 말도 들었어요. 거기에 세월이 흘러 2, 3세까지 합치면 20만가량 된다고 해요.”
생각보다 많은 숫자에 진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이어진 지민의 말은 그보다 더 심각했다.
“전쟁이 월맹군의 승리로 끝난 후 거의 대부분의 라이따이한이 적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는 물론 신랄한 비난에 시달리며 지내고 있다고 해요. 공산주의 사회의 기본 권리인 배급에서까지 차별을 받다 보니 생활고가 대물림으로 이어져 지금도 어렵게 살고 있다고도 하고요.”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내가 그 짝이었군.”
진혁이 입맛을 다셨다.
방글라데시아에서 로힝야를 위해 사업을 펼쳤는데 인근 국가에서 동포 2세들은 고통을 겪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는 자책감이 몰려왔다.
지민이 그런 진혁의 마음을 알고 안아왔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 덮기에 급급했던 정부 탓이 커요. 이제 알았으니 우리가 그들을 도와요.”
“그럽시다. 그들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느끼게 만들어 줍시다.”
진혁도 지민을 껴안은 팔에 힘을 줬다.
* * *
다음 날.
출근한 진혁은 노선기부터 찾았다.
“사모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시고 계십니까?”
“집에 있는데, 왜 그러십니까?”
“이번에 알라딘 복지 재단에서 재외국인들을 위한 사업을 펼치려고 한다는데, 사모님도 함께 동참하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 일이라면 아주 좋아할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서 무료해했는데 잘됐습니다.”
노선기가 오히려 기뻐했다.
그의 처 수시는 기구한 삶을 살아온 인도네시아 이주 여성이었다.
노선기와 일을 마친 진혁은 서둘러 청와대로 들어갔다.
보자마자 권성일 대통령이 덕담부터 건넸다.
“아라칸과 제휴를 통해 미주 시장에 진출하게 됐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이번 일을 백악관에서 주선했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뉴트 보좌관이 도움을 줬습니다.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장하십니다. 지금 같이 정부가 어려울 때 기업이 먼저 나서서 강대국과 관계 개선을 해 주면 큰 힘이 됩니다.”
한국은 지금 경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북한의 도발에 이은 사드 배치로 중국으로 경제 보복을 받고 있지만 미국은 어떤 도움도 주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북한의 벼랑 끝 전술에 카이저 대통령은 콧방귀도 끼지 않고 더욱 북한을 압박하며 한국의 보조를 강요하고 있었다.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도 불안해하며 투자를 꺼리고 있어,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상황을 더욱더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었다.
“여러 경로를 통해 미국에 남북 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지만 묵묵부답이라 답답하기만 합니다.”
권성일의 하소연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정치,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가중되다 보니 고공 행진을 하던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이 계속해서 하락하고 있었다.
진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제가 이번에 미국의 일을 겪으면서 떠올린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뭡니까?”
“각자도생.”
“……?”
“더 이상 미국이 우리를 대변해 줄 거라는 생각은 버리셔야 합니다. 카이저 대통령의 ‘미국제일주의’는 자국을 우선시하는 패권주의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정부 내에서도 그런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북 관계 경색은 미국 입장에서도 득 될 게 없잖습니까?”
“손해도 아니지요. 카이저 대통령에게 한반도 문제는 많은 골칫거리 중 하나일 뿐입니다. 아무 득 될 게 없는데 적극적으로 나서길 바라는 것은 우리의 희망 사항일 뿐입니다.”
신랄할 정도로 냉정한 지적에 권성일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진혁이 말을 이었다.
“우리만의 정책을 펴셔야 합니다. 카이저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은 미국의 도움은 없다고 생각하시는 게 편하실 겁니다.”
“큰일이군요. 중국마저 우리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데 미국까지 믿을 수 없다니.”
“이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G2를 제외한 나머지 나라 모두 공통적으로 갖게 된 고민입니다. 그들과의 협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제가 항상 말씀드리지만 위기는 기회입니다. 이번이 두 나라에 편중됐던 대외 관계를 다변화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거침없는 진혁의 말에 권성일이 배석해 있는 이현국 비서실장을 한번 쳐다보고 말했다.
“다음 달에 비서실장이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할 계획입니다.”
“…….”
진혁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
자신을 부른 목적이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권성일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온 지 벌써 5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올해 연말에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열린다.
“서 회장님이 많이 도와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힘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진혁이 적당히 거리를 두고 말했다.
이현국과의 인연은 결코 짧지 않고 그를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앞장서 도울 수는 없었다.
불가근불가원.
사업가는 정치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다행히 권성일 대통령도 그런 사정을 알고 있기에,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언급을 피했다.
진혁은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누고 일어나 나왔다.
이현국이 말했다.
“대통령님의 말씀에 너무 부담 갖지 마십시오. 그럼.”
인사를 하고 먼저 자리를 뜨는 이현국의 모습에 진혁이 입맛을 다셨다.
“그 양반, 부담 갖지 말라면서 엄청 부담 주시네.”
진혁은 투덜거리며 김세동을 따라 그의 사무실로 갔다.
“대통령님이나 이 실장의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말게. 경선부터 후보 선출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아. 그렇다고 대선에서 이긴다는 보장도 없고. 자네가 할 수 있는 범주에서 성의껏 하면 될 거야.”
“상황이 많이 안 좋은 모양이군요?”
“정치, 경제, 외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으니 국민들이 실망하는 것도 당연하지. 청와대에서 일하는 한 사람으로 면목이 없어.”
“그간 너무 미국과 중국에 의존해서 이렇게 된 겁니다. 지금이라도 한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그렇긴 한데, 정치라는 게 여러 가지로 복잡해서 말이야.”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기에 진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김세동이 물었다.
“혹시 미국에 있을 때 북한 지도자의 형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게 없는가?”
“CIA 지인에게 물어봤는데, 잘 있다는 정도밖에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군.”
“다만 북한에 조만간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말은 들었습니다.”
“큰 변화?”
“자세한 것은 백악관과 CIA 국장에게만 보고되는 특급 비밀이라 본인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일인데 다른 나라에서 벌이고 우리는 묻는 처지라니…….”
김세동이 답답해했지만 어쩔 수 없는 약소국의 비애였다.
진혁은 청와대를 나오면서 다시 한번 각자도생이란 사자성어를 떠올렸다.
* * *
진혁이 ‘동행 한마당’ 행사 준비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낼 때 아세안 10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싱가포르에서 열렸다.
이례적으로 중국의 외교부 부장이 옵서버로 참석했는데, 남중국해에서의 충돌을 방지하고 위기를 관리하기 위한 ‘행동 수칙’을 선언하는 공동 성명을 채택했다고 발표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중국이 지난 15년간 ‘남해 9단선’을 기준으로 영유권을 주장하며 ‘행동 수칙’ 채택을 반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결정이었다.
아세안 10개국 지도자들이 일제히 환영 성명을 내며 중국의 결단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세계 언론은 이런 사실들을 실시간 속보로 내보냈다.
팍!
뉴트가 리모컨의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눌러 모니터의 전원을 껐다. 검게 변한 모니터만큼이나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도 침묵에 휩싸였다.
“어디서 정보가 샌 겁니까?”
“…….”
“CIA는 대체 뭘 한 겁니까?”
“…….”
뉴트의 호통에 제임스는 얼굴만 붉힐 뿐 입을 열지 못했다. 어떻든 대외 정보 업무를 맡고 있는 자신의 책임이긴 했다.
뉴트가 여전히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은 철저히 보안을 유지하며 진행했습니다. 우리 쪽에서 정보가 새나갔을 리는 없습니다.”
“맞습니다. 저희 쪽도 소수의 관련자만 알고 있는 극비 사항이었습니다.”
외무장관의 말에 뉴트가 다시 날카로운 시선으로 제임스를 보고 물었다.
“그자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
“알라딘의 서진혁 말입니다.”
“한국으로 돌아가 다가오는 큰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자가 발설했을 가능성은요?”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우리와 접촉한 이후로 중국 측 인사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서 회장은 중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데, 새로 시작한 사업에 해가 될 일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샜다는 말입니까?”
“…….”
다시 입을 다문 제임스의 모습에 뉴트가 화를 터트리려는 것을 카이저 대통령이 막았다.
“그깟 남중국해 영토 문제로 우리끼리 내분을 일으킬 때가 아니다. 중국을 직접 겨냥하는 조치를 강구해 보라는 것은 어떻게 됐냐?”
“중국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 지적 재산권이란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격할 방안을 세우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중국 문제는 뉴트에게 맡기는 것으로 하고, 제임스 국장, 북한 쪽 일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카이저 대통령의 질문에 제임스는 더 이상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답을 했다.
“은밀히 동조자들을 모으고는 있는데, 워낙 폐쇄된 곳이다 보니…….”
“올해 안에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리세요.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세요. 시리아, 이란 등 중동 문제만으로도 할 일이 태산입니다.”
“알겠습니다.”
“이 일은 남중국해 문제와는 급이 다릅니다. 만일 보안에 문제가 생긴다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청문회에 불려나갈 각오들을 하세요. 그만 나가 보세요.”
다들 일어나서 나가는데 외교 장관이 머뭇거리다가 뉴트에게 물었다.
“환인도양 연합 회의 참석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상황이 이 지경이 됐는데 갈 이유가 없잖습니까. 장관께서 다녀오세요.”
“……알겠습니다.”
물러나는 장관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 * *
‘동행 한마당’ 행사가 열리기 며칠 전 진혁은 베트남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김선혁에 남고 자신이 하노이의 알라딘 타워에서 행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하노이 국제공항에 내려 출국장으로 향하던 진혁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앞에 가는 양복 차림 중년 남자의 뒷모습이 무척 낯이 익었다. 작은 키에 대머리였다.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