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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263화 (263/307)

263화. 라이따이한

걸음을 서두른 발걸음 덕분에 진혁은 사내를 앞지를 수 있었다.

진혁이 고개를 돌리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 회장님!”

“감독님!”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놀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혁이야 이제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그가 알아보는 게 당연했다.

반면 진혁은 상대를 보는 순간 머릿속으로 과거의 기억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와 무의식중에 아는 체를 해 버렸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안근석 감독이 황송한 표정으로 말했다.

“회장님 같은 분이 저를 알아봐 주시고, 영광입니다.”

“감독님 같은 분을 몰라본다면 그건 한국인이 아니지요. 감독직 때문에 오신 겁니까?”

“그걸 회장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

안근석의 질문에 진혁이 찔끔했다.

미래에 벌어질 일인데 너무 서둘러 말해 버렸다.

이상한 눈초리로 바로 보는 안근석에게 얼른 변명을 했다.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을 다그치고 계셔야 할 분이 이렇게 차려입고 이 먼 곳까지 오셔서 짐작한 것뿐입니다.”

“뛰어난 사업가라 역시 보시는 눈이 다르시네요. 한국에서는 불러 주는 데가 없어서 이곳까지 오게 됐습니다.”

안근석은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 축구 대표팀 수석 코치로 한국 4강 신화를 쓴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그 덕에 국가 대표팀 감독까지 맡았었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축구 협회와의 불화설 속에서 몇 개월 만에 경질된 후 프로 리그 몇 팀을 맡다가 밀려 실업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야기를 나누며 출국장 밖으로 나오자 선병식이 기다리고 있다가 얼른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행사 준비로 바쁘실 텐데 직원을 보내시지…….”

“회장님을 직원들에게 맡길 수는 없지요. 차가 기다리고 있으니 가시지요.”

“잠시만요.”

서두르는 선병식을 놔두고 진혁은 한 걸음 뒤에 서 있는 안근석에게 다가갔다.

“함께 타고 가시지요.”

“아닙니다. 전 택시를 타고 가도 됩니다.”

“어차피 저도 시내로 나갈 겁니다. 함께 가시지요.”

진혁은 머뭇거리는 안근석의 캐리어를 반강제로 빼앗아 끌고 함께 차에 탔다.

호텔에 도착해서도 마다하는 안근석에게 방까지 잡아줬다.

“이렇게 해 주시지 않아도…….”

“2002년에 저도 광화문 광장에서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대한민국을 목청껏 외쳤습니다. 골이 들어갈 때 보여 주신 멋진 어퍼컷 세레머니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좋은 추억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 인사입니다.”

“회장님 같은 국민들의 열띤 응원이 있어 이룩해 낼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감사는 오히려 제가 드려야 하는데…….”

“그럼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뭐든 말씀하십시오.”

“며칠 후 제가 큰 행사를 엽니다. 그 일 때문에 왔는데, 감독님이 참석해 주셔서 자리를 빛내 주셨으면 합니다.”

안근석이 주저하다가 물었다.

“회장님이 직접 주제하시는 행사라면 중요한 행사일 텐데, 저 같은 퇴물 감독이 가면 오히려 민폐가 되지 않겠습니까?”

“퇴물이라니요. 제 가슴 속에는 영원한 국가 대표팀 감독님이십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회장님이 괜찮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면접 잘 보시고, 정확한 일정은 직원을 통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쉬십시오.”

“그럼 나중에 행사장에서 뵙겠습니다.”

안근석 감독이 떠나자 선병식이 물었다.

“예전에 축구 프로 리그팀을 맡았다가 성적 부진으로 경질됐던 사람 아닙니까?”

“아마 맞을 겁니다.”

“그럼 별 볼 일…… 아니,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회장님이 너무 정중히 대하시는 거 같아서 여쭙는 겁니다.”

“베트남 사업에 큰 역할을 해 주실 분입니다.”

“……?”

궁금해 하는 선병식의 표정에도 진혁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미래의 일이고, 최근 자신이 기억한 과거와 다른 일들을 겪어서 확신할 수가 없었다.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저쪽과는 약속이 됐습니까?”

“저녁때 만나기로 했습니다.”

“잘됐군요. 그때까지 좀 쉬지요.”

룸에서 휴식을 취한 후 날이 어두워지자 동흥 메가몰로 갔다.

면적만도 5만여 평의 지하 쇼핑몰로 베트남 최대 실내 아이스링크가 있는 유명한 관광 명소였다.

응우옌 회장은 작은 키에 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알라딘의 서진혁입니다.”

“응우옌이오.”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자 응우옌이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즘 한국인 사업가들이 이 나라를 많이들 찾고 있습니다.”

“성장 가능성이 풍부한 나라니까요.”

“맞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공산주의 체제의 한계 때문에 국민들의 시장 경제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았습니다. 그걸 제가 깨우치면서 사업을 키워 왔습니다.”

응우옌은 이후 사업 초기의 어려웠던 점과 자신이 그런 악조건에서도 어떻게 사업을 발전시켜 왔는지 영웅담처럼 떠들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는 베트남의 부동산 개발 기업에도 혹독한 시기였습니다. 많은 기업이 나가떨어졌지만 난 내 조국의 가능성을 믿고 끝까지 버티며 점유율을 높여 나갔습니다. 그 결과 베트남 부동산 시장에서 매출 기준으로 70%가 넘는 점유율을 기록할 수 있게 됐습니다.”

“대단하십니다.”

“동흥 테마 파크의 공사비도 도이체방크를 비롯한 세계적인 투자 은행들이 서로 투자하겠다고 해서 어렵지 않게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계속 이어지는 응우옌의 자기 자랑을 진혁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버렸다.

일반인들이 들으면 감탄할 내용이었지만, 진혁은 방글라데시에서 대규모 특구를 외부의 도움 없이 자기 자본으로 직접 건설하고 있었다.

계속 뒀다가는 언제 본론을 꺼낼지 몰라 진혁이 먼저 말했다.

“나머지 말씀은 천천히 듣도록 하고, 우선 국민차 생산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아, 국민차 생산이 있었지요. 총리께 전화는 받았습니다. 내가 메콩 자동차를 인수하고, 거기에 서 회장님의 알라딘 자동차 기술을 더한다면 생산에는 큰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만, 자동차라는 게 수만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져서 관련 부품 업체에 대한 대책도 있어야 하고, 전기차의 경우 정부 차원에서 보조금을 지급하고 인프라를 구축을 해야 하는 등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신경 쓰는 것이야 모든 사업이 마찬가지지요. 서 회장님이 이미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 국민차 생산을 성공시키셨으니 그쪽 일은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회사 설립에 따른 비용과 지분율은 어떻게 가져가실 생각이십니까?”

“메콩 자동차 인수 예상 비용이 오천만 달러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국민차 생산을 위해 설립된 아세안 모터스의 자본금이 20억 달러입니다.”

“그건 나도 알아봤는데, 국민차를 전기차로 생산하는 바람에 비용이 크게 증가했더군요. 기존에 메콩 자동차가 생산했던 내연 기관으로 하면 추가 비용도 얼마 들지 않고 굳이 정부에 손을 벌일 필요가 없게 되니 일석이조 아닙니까?”

진혁이 답을 하지 못했다. 어이가 없어서였다. 이건 그냥 자동차 생산을 한다는 생색만 내겠다는 의도였다.

김선혁이 왜 난감해했는지 이해가 됐다.

진혁이 화를 누르고 억지로 입을 열어 말했다.

“회장님과 제 생각이 좀 다른 거 같습니다. 좀 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투자하겠다는 곳은 많습니다. 총리께서 직접 전화까지 하신 터라 알라딘에게 우선권을 드린 것뿐입니다.”

“…….”

“제가 휴대폰 사업에 관심 있어 했더니 한국의 태후 그룹에서 합작을 제의해 왔습니다. 그쪽에서도 자동차를 생각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초청장을 보냈는데,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며칠 후 알라딘 타워에서 투게더 페스티벌이 열립니다. 그 행사가 끝난 다음에 말씀을 나누시지요.”

“그럽시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날 뵙겠습니다.”

진혁은 정중히 인사하고 나왔지만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뉴트 때와는 또 다른 불쾌감이 잔뜩 느껴졌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선병식이 대신 분통을 터트렸다.

“아주 웃기지도 않은 작자입니다. 겨우 30억 달러밖에 안 되는 조그만 그룹을 운영하면서 어디서 감히.”

“그건 우리 기준이고, 베트남의 민간 기업 중에서는 1위입니다. 이곳에서 사업하려면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방금 전 태도는 국민차 생산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도 그 점이 제일 걱정입니다. 어렵게 얻은 기회인데…….”

남중국해 영토 분쟁을 해결해 주는 조건으로 쯔엉 총리가 내놓은 대가였다. 그 때문에 미국에 가서 뉴트에게 굴욕까지 당했다.

물론 아라칸과의 제휴로 미국 시장 진출이라는 더 큰 대가를 받아냈지만 그건 별개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진혁이 입을 열었다.

“총리실 방문은 행사 이후로 미뤄야겠습니다. 이런 상태로 찾아뵙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남은 시간 동안 일정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호치민에 다녀왔으면 싶습니다. 그쪽에 볼일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그 후 술 생각이 나서 안근석 감독이 묻는 룸에 전화를 했는데 어딜 갔는지 받지 않았다.

결국 선병식, 김상균과 함께 술을 마시며 불쾌한 기분을 털어냈다.

* * *

베트남 남부에 위치한 호치민은 남베트남의 수도로 사이공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베트남 전쟁이 월맹군의 승리로 끝나자 공산 정권은 수도를 하노이로 옮기고 명칭도 바꿔버렸다.

시내에 위치한 KOTRA 호치민 무역관으로 가자 이진용 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본사의 손기성 본부장님은 물론 방글라데시의 이영석 부장님도 전화를 주셨습니다. 김연희 전 소장님하고는 르완다에서 함께 일하기도 했습니다.”

“고마운 분들이고 모두 애국자들이십니다.”

이리저리 인연이 겹쳐서 그런지 이진용 관장의 태도는 정중했다.

이진용은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물었다.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서 온 겁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베트남은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나라입니다. 이미 한국은 물론 세계적인 기업들이 ‘포스트 차이나’라며 이곳을 최적지로 지목하고 대규모 투자를 감행하고 있습니다.”

“…….”

“베트남 체류 한인은 10만 명이 넘어 아세안 국가 중 1위이고, 한해 찾아오는 한국관광객도 240만 명을 넘을 정도로 양국간 교류가 급격하게 확대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회장님은 오히려 늦은 편에 속하십니다.”

“늦은 만큼 공격적으로 투자를 진행해볼까 합니다.”

진혁의 말에 이진용의 눈이 반짝였다.

코트라 내에서 진혁은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손기성과 이영석을 통해 그가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다른 어느 곳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실 것 같아서 필요한 자료를 모아 봤습니다.”

이진용이 준비한 USB를 건넸다.

“감사합니다만 사업 이야기를 하기 전에, 부탁하신 분들을 먼저 만나 봤으면 합니다.”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시지요.”

이진용을 따라가자 라이따이한 모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치푸 씨와 트란 양입니다.”

“서진혁입니다. 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고개까지 숙이며 하는 진혁의 정중한 사과에 두 사람의 눈가가 벌게졌다.

대화를 시작했는데, 다행히 두 사람 모두 한국어가 가능해 의사소통에는 무리가 없었다.

“전쟁이 한창일 때 제 어머니는 갓 스무 살이었습니다. 어느 날 월남군이 마을로 들어왔는데, 그날 성폭행을 당해 저를 가졌습니다.”

직원이 자를 내놓고 돌아가자 치푸가 자신의 사연을 털어났다.

“적군 핏줄을 가졌다며 강제로 아이를 떼려 하자 어머니는 이곳으로 도망쳐 저를 낳았습니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라이따이한’이라고 놀리며 손가락질을 했지요. 결국 열세 살 때 학교를 그만뒀습니다. 놀림만 당하는 게 싫기도 했지만 배급을 받지 못해 굶는 날이 더 많아 도저히 학업을 이어갈 형편이 되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녀를 낳은 어머니 역시 주변 사람들로부터 매국노, 따이한하고 붙어먹었다는 지탄에 시달렸다고도 했다.

그게 모두 자신 때문이라며 치푸는 설움에 복받쳐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에게 손수건을 건네고 딸 트란이 말했다.

“저희 집은 항상 마을에서 가장 가난했어요. 엄마는 늘 멀리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엄마랑 같이 시간을 보낸 기억이 별로 없어요. 저는 외모가 친구들과 비슷해 주변 사람들이 라이따이한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해 물어보지 않으니 굳이 먼저 얘기하지는 않고 있어요.”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는 트란에게 진혁이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답변 여하에 따라 자신이 생각한 계획의 틀이 결정될 것이다.

“한국을 원망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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