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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264화 (264/307)

264화. 안근석 감독

“어릴 적 친구들이 너는 절반은 꼬레안인데 잘산다는 한국이 아무것도 안 해 주냐, 왜 그 모양으로 사냐 비아냥거릴 때는 많이 원망했어요. 하지만 철이 들어 한국은 강대국이고, 친구들이 K-POP 스타를 동경하고 그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 내가 라이따이한이라는 걸 당당히 밝히고 자랑스러워하는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됐어요. 그래서 한국어도 배웠어요.”

트란의 답변에 진혁은 물론 같이 듣고 있던 모두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한국은 이들을 애써 잊고 있었지만, 이들은 여전히 한민족의 핏줄이라는 사실로 차별받으면서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있었다.

다들 무거운 표정으로 짓고 있을 때 진혁이 물었다.

“생활은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마을 사람들과 농사를 짓고 있어요. 벌이는 시원찮지만 일자리를 구할 수 없으니……. 협동조합에 납품할 수 있으면 그나마 나은데, 그러지 못하면 시장에 나가 팔고 있어요.”

“트란 양은?”

“사이공 마트에서 시간제로 일하고 있어 월급이 많지 않아요. 나라에서 극빈층에게 복권을 줘서 그나마 생활할 수 있어요.”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답답함만 더 했다.

두 모녀를 돌려보내고 진혁이 이진용 관장에게 물었다.

“베트남 농촌 현실은 어떻습니까?”

“많이 힘들지요. 베트남 농업은 고용 측면에서 베트남 최대 산업이긴 하지만, 가족농 형태로 단순 노동력과 천연 자원에 의존하다 보니 생산성이 많이 떨어집니다. 모내기도 손으로 직접 할 정도니 그 고단함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그나마 협동조합에서 전량 수매해 주는 것도 아니고…….”

“아까 치푸 씨도 협동조합이라고 하던데, 어떤 곳입니까?”

“한국의 농협 같은 곳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정부 기관으로 농촌을 돕는 일을 하고 있는데, 재정이 여유롭지 못해 라이따이한 같은 영세농까지는 혜택이 돌아가지 못합니다.”

예상했던 바라 진혁이 바로 물었다.

“베트남 정부의 농업 정책은 어떻습니까?”

“쯔엉 총리가 당선되면서 산업 고도화 추세에 따른 경제 구조 변화로 농업 부문의 후진성 문제를 언급하셨습니다. 이를 탈피하고자 각종 지원책을 내걸고 ‘하이테크 농업’ 투자를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지만 실적은 미비한 상황입니다.”

“이유는요?”

“가장 큰 게 대규모 자본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하이테크 농장 설립을 위해서는 일반 농장 대비 다섯 배 이상의 투자 비용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제조와 유통에 비해 생산이 떨어지는데, 외국인 투자자들이 굳이 낙후된 농업 분야에 투자할 이유가 없지요. 거기에 관련 분야의 고급 인력과 인프라도 열악하고요.”

이어 진혁이 하이테크 농업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질문을 했는데, 이진용은 마치 미리 준비하기라도 한 듯 막힘없이 답변했다.

그 모습에 진혁이 물었다.

“관장님은 제가 이런 질문을 할 줄 아셨던 겁니까?”

“회장님의 전화를 받고 제 나름대로 조사를 좀 해 봤습니다. 한국에서 동행 사업을 이끄시고 최근에 스마트팜 사업을 펼치셨다고 해서 혹시 몰라 준비했습니다. 관련 자료들은 드린 USB에 모두 담았습니다.”

진혁이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미리 알고 준비해 준다면 앞으로 일이 한결 수월하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 * *

‘투게더 페스티벌’ 행사 당일.

수도 하노이의 랜드마크 ‘알라딘 타워’는 인산인해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경찰까지 나와 교통 및 주변 정리를 하고는 있지만 역부족이었다.

야외 광장에 마련된 특별 무대에는 밤새 줄을 선 입장객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JHC 소속 연예인들의 K-POP 공연을 보기 위해서 전국에서 한류 마니아들이 몰려왔다.

그중에서도 ‘와일드걸즈’의 공연이 최고 인기였다.

천진홍이 눈치 빠르게 베트남 출신의 키오친을 전면에 내세운 전략도 주효했다.

그녀의 인기는 이미 웬만한 연예인을 상회한다고 했다.

그 시각, 진혁은 하노이 타워 연회장에 마련된 특별 행사장에서 쯔엉 총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변에는 베트남의 내로라하는 정재계 거물들은 거의 다 모여 있었다.

이번 행사에 대한 호기심보다 총리가 직접 행사를 참관하기로 했다는 소식에 눈도장을 찍으러 달려온 것이다.

전면에 마련된 대형 모니터로 밖에서 열리는 행사 모습을 보며 쯔엉 총리가 입을 열었다.

“한류 열기가 대단하다는 보고는 받았지만 이 정도로 뜨거울 줄은 몰랐습니다.”

“저 역시 베트남 국민들이 한국을 이렇게나 사랑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좀 더 일찍 올걸 하며 후회하는 중입니다.”

“하하.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아직도 투자할 곳은 많습니다. 지난번에 약속한 것도 있으니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습니다. 어느 분야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여러 가지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만 오늘은 이번 행사가 중요해서 나중에 찾아뵙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꼭 들러 주십시오.”

잘 나가다가 후일을 기약하는 진혁의 답변에 쯔엉 총리가 맥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진혁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감독님, 감독님!”

진혁이 일부러 소리쳐 불렀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안근석 감독은 당황했다.

원래 이런 자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도움을 준 진혁과 약속한 터라 억지로 왔다.

생각보다 큰 규모의 행사인 데다 유력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있어서, 구석에 있다가 얼른 인사만 하고 가려 했는데 틀려 버렸다.

“얼른 이쪽으로 오십시오.”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안근석의 손을 직접 잡아 끈 진혁이 쯔엉 총리에게 안근석을 소개시켰다.

“한국에서 제가 제일 존경하는 축구 감독님이십니다.”

“서 회장님이 축구 팬이신지는 몰랐습니다. 반갑습니다.”

“아, 안근석입니다.”

자신을 내민 손을 허리를 굽혀 잡는 안근석을 바라보는 쯔엉 총리의 표정은 담담했다.

세계 어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베트남도 축구가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였다.

하지만 성적은 그 반대였다. 동남아시아 지역의 축구 수준은 낮은 편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베트남은 FIFA 랭킹 100위권 밖으로 형편없다 보니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아서였다.

진혁이 그런 쯔엉 총리의 관심을 일깨웠다.

“안 감독님은 이번에 베트남이 대표팀 감독을 뽑는다고 해서 면접을 보러 오셨답니다.”

“아, 그러시군요. 축구 선수치고는 키가 작은 편이시네요. 우리나라 선수들처럼 말입니다.”

“맞습니다. 그 때문에 축구 선수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험 때문에 키가 작은 축구 선수들의 애환을 잘 알고, 그런 신체적인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포부가 대단하시군요.”

“포부뿐만 아니라 지도자로서 능력도 뛰어나신 분입니다. 2002년 한국의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뤄내신 분입니다. 안 감독님이 어느 나라건 대표팀 감독에 선임되면 알라딘은 메인 스폰서를 맡아 전폭적인 지원을 할 예정입니다.”

진혁의 이어진 설명에 쯔엉 총리의 눈이 반짝였다.

조사한 바로는 진혁은 통이 큰 사업가였다. 한번 지원하면 막대한 자금을 거침없이 쏟아 붙는 스타일이었다.

쯔엉 총리가 고심하는 사이 선병식이 다가왔다.

“공식 행사가 곧 진행될 거라고 합니다.”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요. 가시지요.”

쯔엉 총리를 인도하면서 진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안근석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쯔엉 총리를 시작으로 많은 유력 인사들이 축하 연설을 하는 바람에 시간이 길어졌다.

마지막으로 진혁이 감사 인사를 하고 카운트다운을 하는 것으로 전 세계적으로 ‘동행 한마당’ 행사가 성대한 막을 올렸다.

정신없이 올라가는 전광판 숫자에 놀란 쯔엉 총리가 늦게까지 있는 바람에, 진혁이 호텔로 돌아온 것은 거의 날이 밝은 다음이었다.

“현재의 속도라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좀 더 지켜봅시다.”

진혁이 일부러 무덤덤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져서 다들 가슴 졸이며 지켜볼 텐데 자신마저 조급한 모습을 보이면 부담감만 줄 뿐이었다.

정신없이 숫자를 바꿔 가던 전광판이 멈췄을 때의 금액은 240억 달러를 넘어 29조 원이었다.

목표를 초과해서 작년에 열린 독신절보다 8조 원이나 더 팔려 신기록을 또다시 작성했다.

국내외 언론이 앞다퉈 ‘동행 한마당’ 행사에 대해 호평을 내놓으며 호들갑 떨고 있을 때 진혁은 호텔방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렇다고 마냥 쉰 것만은 아니었다.

이진용이 준 USB 자료를 검토하며 사업 구상을 했다.

그러던 진혁이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스카이라운지로 올라갔다.

“베트남 축구협회 구엔 만캄 회장입니다.”

“서진혁입니다.”

진혁을 바라보는 만캄 회장은 심정이 복잡했다.

원래 이번 대표팀 감독은 중량 있는 유럽계 감독을 선임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총리가 직접 전화해서 한국인 감독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만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국의 안근석 감독이 선임되면 메인 스폰서를 맡아 주시겠다고 하셨다면서요?”

“그렇습니다. 그와는 별도로 안근석 감독님이 편하게 대표팀을 이끌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베트남은 세 명만 모이면 축구를 한다고 할 정도로 팬들의 관심이 뜨겁습니다. 성적이 조금만 나빠도 당장 협회 게시판이 마비될 정도입니다. 지난 감독들의 재임 기간이 평균 8개월 정도밖에 되지 못합니다.”

“안 감독님은 잘 해내실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설혹 그렇게 안 된다고 해도 약속한 계약 기간은 지킬 겁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이 그렇게까지 약속하니 이번 대표팀은 몇 가지 조건을 달아 안 감독님께 맡기기로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결정에 대해서 나중에 크게 만족하실 겁니다.”

여전히 큰소리치는 진혁의 모습에 만캄 회장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가 보기에 안근석은 그저 그런 외국인 감독 중에 한 명일 뿐이었다.

그렇게 다음 날 선병식이 AA 대표로 베트남 축구협회와 4년간 50억 원에 메인 스폰서 계약을 체결했고, 안근석은 베트남 대표팀 감독에 선임됐다.

* * *

진혁이 총리실을 찾아간 것은 행사가 끝나고도 일주일이나 지난 후였다.

애가 닳던 쯔엉 총리가 직접 밖에까지 나와 맞았다.

“왜 이제야 오시는 겁니까?”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느라 늦었습니다. 축구 대표팀 감독 선임에 도움을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서 회장님이 해 주신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쯔엉 총리가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양보를 얻어낸 것에 대한 감사함을 표했다.

행동 수칙의 발효 덕분에 베트남 정부는 중국의 무력시위로 중단됐던 ‘블록 136-03’의 유전 탐사를 재개할 수 있었다.

쯔엉 총리가 말을 이었다.

“서 회장님이 약속을 지켰으니 저도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동흥 그룹과 국민차 생산을 하실 수 있게 해 드리지요.”

“그건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니, 왜요?”

쯔엉 총리가 크게 놀라며 물었다.

남중국해 영토 분쟁을 해결해 달라는 자신의 요청에 난감해하다가 국민차 생산을 하게 해 주겠다는 말에 두말없이 승낙했던 진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안 하겠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흥 그룹의 응우옌 회장님을 만나 말씀을 나눠 봤는데, 메콩 자동차를 인수해 기존 내연 자동차 생산을 재개하는 정도에 만족하시더군요. 명색이 국민차인데 시대에 뒤떨어진 퇴물 자동차를 내놓는 것은 아닌 것 같아서 깨끗이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전기차는 당연히 들어가야지요. 응우옌 회장이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고 한 말일 겁니다. 내가 따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총리님도 아시다시피 응우옌 회장님은 ‘동흥 테마 파크’ 조성이란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계십니다. 거기에 핸드폰 사업에도 진출하시려는 것 같더군요. 모두 이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인데 억지로 자동차 사업을 키우라고 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참 아쉽네요. 서 회장님의 투자를 많이 기대했는데…….”

진심으로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시는 쯔엉 총리의 모습에 진혁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분위기가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낼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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