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사이공
우상우가 말을 이었다.
“오필구 씨의 보고를 받고 나주의 스마트팜 기술 단지에 입주한 기업들을 조사해 봤더니, 국내 수요를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벅찬 상황이었습니다.”
정부가 주도해서 스마트팜 사업을 전격적으로 시행하다 보니 일거에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스마트팜의 뛰어난 성능을 확인한 일부 농업 법인마저 자체적으로 사업을 추진하면서, 관련 설비에 대한 수요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해서 회장님이 베트남에 설비 공장까지 지으실 계획을 세우신 겁니다.”
“단순히 스마트팜을 수출하고 설비 공장만 세우는 게 아닙니다. 관련 기술과 노하우는 물론 6차 산업을 위한 제조와 유통도 함께 추진할 계획입니다.”
“제조와 유통까지요?”
“라이따이한 때문입니다.”
“라이따이한?”
“월남전 당시 태어난 한국인 혼혈들의 후손입니다.”
진혁이 라이따이한의 기구한 삶에 대해 들려줬다.
다들 얼굴이 굳어진 것은 당연했다.
“우리 동포들입니다. 그들이 베트남 사회에서 당당히 인정받을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도울 겁니다. 6차 산업 관련해서는 동행이 이미 노하우를 가지고 있으니 적극적으로 나서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회원들에게 회장님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우상우의 힘찬 답변을 듣고 진혁이 구필준 소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스마트 팜 기술과 빅데이터를 아낌없이 이전하고 지원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진혁이 고진무를 보고 말했다.
“베트남은 커피 수출 1위, 쌀 수출 2위의 농업 국가입니다. 헌데 후진국이다 보니 비위생적인 문제들로 식품 관련 스캔들이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소비자들은 좀 더 안전하고 깨끗한 식료품을 선호하기 시작하고 있답니다. 그로 인해 현재 베트남 소비자의 식품 구매 키워드는 ‘안전’, ‘유기농’입니다.”
“그렇군요.”
“저보다 잘 아시겠지만 농사라는 게 설비 지어 주고 기술만 가르쳐 준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현장 경험과 학습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베트남에 기술 학교를 세워 교육과 기술 연수를 추진하려고 합니다. 고 선생님이 이 일을 맡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반드시 그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게 만들겠습니다.”
단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바로 승낙한 데다 과하게 느껴질 정도로 각오를 다지는 고진무의 모습에 진혁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하지만 고진무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월남전 참전 용사로 국가 유공자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털어놓은 가슴속의 응어리로, 당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혼자만 간직하고 있던 비밀이 있었다.
아버지의 잘못된 행동을 조금이나마 만회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렇게 진혁이 한국에서 동행 한마당 행사 마무리를 위한 택배와의 전쟁을 체크하며 사업 진출 준비를 하는 사이, 쯔엉 총리는 베트남 정부의 일을 처리해 나가고 있었다.
* * *
더워지면서 시작했던 일들이 한여름을 지나 선선한 바람이 불 때쯤 결실을 맺었다.
알라딘 그룹 대규모 투자 약정서 체결식.
쯔엉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호치민 시 청사에서 열린 행사에는 내외신 기자들이 빼곡히 참석한 채 성황리에 진행됐다.
베트남 전기차 생산 공장 건설, 사이공 그룹 지분 49% 인수, 대규모 하이테크 농장과 가공 시설 및 설비 공장 구축, 직업기술학교 설립, 라이따이한 복지 사업 등 총 사업비 100억 달러인 대규모 투자에 세계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베트남에 진출한 외국 기업의 단일 투자 금액으로는 최고액이었다.
행사 다음 날, 진혁이 팜응우라오의 공꾸잉 마을로 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었다.
직업기술학교와 알라딘 복지재단 사무소 개소식 행사를 위해서였다.
진혁이 이곳을 선택한 것은 라이따이한 3세들이 모여 살고 있어서였다.
20세를 갓 넘긴 젊은 청춘 남녀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진혁이 연단에 올라섰다.
잠시 좌중을 둘러보던 진혁이 고개부터 숙였다.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몰랐다는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여러분들이 한민족임을 당당히 밝히고 떳떳하게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많이 서운했을 것이며 미워하고 원망하셨을 겁니다. 그 마음을 잊지 마시고 이를 악물고 성공하십시오. 그리고 당당히 물으십시오, 왜 그랬는지. 알라딘이 여러분과 가족들에게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고개 숙이는 진혁을 향해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몇몇 젊은 여성들은 눈물을 훔치는 모습도 보였다.
“코이카에서 나왔습니다. 김연희 전 소장님을 통해 회장님을 최대한 도우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도와줄 상대는 제가 아니라 라이따이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지원은 최대한 해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진혁은 기술학교는 코이카에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아 김연희에게 부탁했었다.
학교 시설을 둘러본 진혁이 인근 건물로 갔다. 알라딘 복지 재단 사무소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고진무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가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코트라 이진용의 소개로 라이따이한의 사정을 들을 때 만난 트란이었다.
이곳 직원으로 채용돼 라이따이한에게 알라딘이 펼치는 사업을 알리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진혁이 물었다.
“일은 할 만합니까?”
“이런 보람된 자리를 맡겨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집단 이주에 대한 어르신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고향을 떠나는 것에 아쉬워하셨지만, 새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게 무이자로 자금까지 빌려주시고 일자리도 보장해 준다고 했더니 다들 회장님을 따르겠다고 하셨어요.”
“그래도 모르니 혹여라도 불편한 부분이 있으면 여기 고 사장님께 말씀드려 최대한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호치민 시에서 조성한 하이테크 농업 단지가 꾸찌현 팜반꼬이 읍에 위치해 있다 보니 이주가 불가피했다.
진혁은 국제 건설에 지시해 별도의 땅을 빌려 아파트를 짓게 했다.
모듈러 공법을 활용하면 농장이 완공되는 시기에 맞출 수 있었다.
그때까지는 스마트팜 농장 운영에 대한 교육을 받으면서 한국의 동행 농장 견학을 하는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었다.
트란이 떠나자 고진무가 물었다.
“아파트 제공을 임대로 하면 간단할 텐데, 굳이 복잡하게 자금까지 대출해주시면서 분양받게 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베트남 경제의 성장은 내수의 핵심층인 중산층 증가로 이어질 겁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아파트 같은 고급 주택의 수요를 촉발하게 됩니다. 거기에 베트남 정부가 재작년에 외국인의 주택 구입을 허용하면서 부동산 광풍이 몰아칠 조짐이 보인답니다. 지금 분양받은 아파트는 몇 년 안에 최소 몇 배는 되어 있을 겁니다.”
“그러니 나중에 분양하면 이득이지 않습니까?”
“그룹의 수익만 따지면 그렇지요. 하지만 라이따이한을 상대로 돈 장사나 하자고 이 일을 시작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
“베트남이 아무리 공산주의 국가라 해도, 시장 경제를 받아들이는 순간 개인의 지위가 부로 결정되는 자본주의 사고가 생겨나게 될 겁니다. 라이따이한의 지위 상승에 부를 축적하는 것만큼 빠른 길은 없습니다.”
진혁은 단순히 라이따이한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려는 게 아니었다. 진심으로 라이따이한이 베트남 사회에서 인정받도록 해 줄 생각이었다.
고진무는 진혁의 큰 뜻을 알고 자신도 최선을 다해야겠다며 의지를 다졌다.
* * *
베트남 일을 끝낸 진혁이 주변국들을 들러 사업 진행 사항들을 체크하고 있을 때 북한이 다시 한번 도발을 감행했다.
대륙 간 탄도 미사일(ICBM)을 연달아 실험하며, 소형 핵탄두를 장착한 채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게 됐다고 발표했다.
이에 UN이 대북 제재안을 마련했지만 이번에도 중국이 반대하고 나섰다.
격분한 미국의 카이저 대통령이 대북 제재에 유화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중국을 향해 칼을 빼들었다.
미국 무역 대표부(USTR) 대표에게 중국의 미국 지적재산권 침해 혐의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1974년에 제정된 무역법 301조는 미국 정부가 다른 나라의 무역 행위에 대한 조사에 착수해 무역 장벽을 확인하고 수입품에 대한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놀란 중국은 대북 제재에 대한 유엔 결의에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 * *
진혁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말레이시아를 찾았다.
탕분헝 총리가 직접 전화해서 꼭 좀 들러 달라는 부탁을 했다.
총리실로 가자 탕분헝 총리가 낯선 이를 만나고 있다가 얼른 일어나 반겼다.
“어서 오시오, 서 회장.”
“손님이 계신지 몰랐습니다.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서 회장님을 만나기 위해 먼 데서 오신 분입니다.”
“리광잉입니다. 지난번에 크게 신세를 졌습니다.”
“……!”
사내는 우핑의 뒤를 이은 중국의 경제 부총리였다.
미국이 남중국해 영토 분쟁에 뛰어들 것을 알려 준 데에 대한 감사 인사였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은 진혁에게 리광잉이 말했다.
“직접 전화드려 양해를 구해야 하는데, 민감한 시기라 총리께 부탁을 드려 청했습니다.”
“괜찮으니 개의치 마십시오.”
진혁은 무덤덤하게 답하면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중국 정부의 2인자가 자신을 이렇게 은밀히 만나려고 한 이유가 궁금했다.
리광잉이 말을 이었다.
“미국에 가셨을 때 뉴트 특별 보좌관과 거래를 하셨다는데, 혹시 북한 관련해서 특별히 들으신 것은 없으신지요?”
“북한요?”
“이번 안보리 결의안 2371호는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것입니다. 북한의 주력 수출품인 석탄, 철광석, 수산물 수출이 중단되고 신규 해외 노동력 수출도 불가능하게 됐습니다. 북한 수출 총액의 1/3이 날아갔는데 모두 우리 중국과의 무역에서 발생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의 협조가 중요해 슈퍼 301조를 꺼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아서요.”
“음…….”
잠시 생각하던 진혁이 입을 열었다.
“북한 관련해서는 백악관이 아니라 다른 쪽에서 들은 이야기는 있었습니다. 북한에 조만간 큰 변화가 일어날 거라고 하더군요.”
“음…….”
이번에는 리광잉이 한참동안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다가 말했다.
“미국이 아무래도 북한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감행하려는 것 같습니다.”
“군사 작전요?”
“북한 지도자는 너무 나갔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미국을 직접 자극하면 안 된다고 말렸는데도 핵탄두로 본토 공격을 운운하는 바람에, 미국도 더 이상 방관하듯 지켜보지만은 못하게 됐습니다.”
“그럼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탕분헝 총리도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북한은 핵무기 보유 국가였다. 잘못하면 핵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정확한 이야기를 해 주지 않으니 우리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북한에 국한된 작전이라며 반강제적인 양해를 구한다는 통보만 해 온 상태입니다. 한국 정부에는 혹시…….”
“청와대로부터 따로 들은 이야기는 없습니다.”
리광잉이 자신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리자, 진혁이 먼저 답했다.
그와 친분이 있냐 없냐를 떠나서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서로 정보를 맞춰 미국의 계획을 알아내 대비책을 세워야 했다.
하지만 서로 가진 정보가 한계가 있다 보니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북한 관련해서는 이쯤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 알아낸 게 있으면 그때 더 이야기를 나누지요.”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탕분헝 총리의 제안에 리광잉이 호응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진혁은 마음이 답답했다. 두 사람이야 주변국의 일이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 나올 것이 없는 것은 맞기에 반대는 하지 않았다.
“오늘 서 회장님을 뵌 것은 북한 문제도 있지만 카이저 대통령의 의중이 뭔지 고견을 듣고 싶어서입니다.”
“일개 사업가인 제가 미국 지도자의 의중을 어찌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뉴트 보좌관은 백악관의 실세입니다. 그를 상대로 큰 양보를 얻어내고 사업적으로도 성과를 얻으셨잖습니까. 우리가 유엔의 대북 제재안을 받아들였음에도 미국은 301조 조사를 철회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중국을 겨냥하고 있는 미국 통상법 301조는 일본에 잃어버린 20년을 선사한 플라자 합의에 기초한 겁니다.”
“그래서 더 걱정입니다.”
“미국은 애초부터 투 트랙 전략으로 갈 생각이었던 듯싶습니다.”
“투 트랙요?”
“하나는 북한 제재, 그리고 다른 하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