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햄머 자동차 공장 폐쇄
“그거 참 큰일입니다. 두 나라는 우리나라 양대 교역국이라 경제가 걱정입니다.”
“경제계의 그런 걱정은 사드 배치에 따른 중국의 경제 보복으로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알라딘을 포함한 많은 기업들이 대체 시장으로 동남아시아에 진출했고, 다른 지역으로 교역을 다변화하고 있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외교도 지난번 얘기하신 대로 제3세계를 중시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해야겠군요.”
“그렇습니다. 특히 말레이시아의 탕분헝 총리와 인도의 만길라 총리가 새로운 세계 질서 체제하에서 큰 역할을 하실 분들이십니다. 미리 친분을 쌓아 두시면 좋으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서 회장님의 말씀 기억해 두겠습니다.”
한 가지 주제가 끝나자 이현국이 커피로 목을 축이고 물었다.
“북한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건 감히 제가 예상하기 힘듭니다.”
“물론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북한의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하고 알려 주신 분이 서 회장님이십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최소한 어떤 상황일지 유추는 가능하지 않습니까?”
이현국의 거듭된 간곡한 부탁에 고심하던 진혁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기존 지도자를 제거한 것은 미국의 공작이 맞을 겁니다. 그런데 지도자의 형을 암살한 것이 중국이란 확신은 없습니다.”
“중국 말고 그런 일을 벌일 곳이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뻔히 자신들이 의심받을 줄 알 텐데도 그렇게 무모하게 작전을 벌일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중국은 인접국인 데다 경제까지 장악하고 있어, 언제든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지도자를 내세울 수 있습니다.”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군요.”
“어떻든 북한의 새 지도자가 된 윤호열 주석이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은인자중하는 것은 나빠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은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피아를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합니다.”
“정부도 북한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수집하고 있으니, 서 회장님도 듣는 이야기가 있으시면 김 수석님을 통해서라도 알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김세동은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안보수석이 되어 있었다.
* * *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날을 바로 코앞에 두고 암울한 소식이 터져 나왔다.
한국 햄머, 군산 공장 폐쇄 결정!
미국 최대 자동차 회사 햄머 자동차가 경영난과 가동률 하락을 이유로 5월 말까지 군산 공장의 차량 생산을 중단하고 공장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해 버렸다.
진혁은 인천 공항에서 아세안 국가 출신 이주 여성과 근로자들의 고향 방문단을 배웅하고 돌아오자마자 바로 대책 회의를 열었다.
보고는 자동차 산업을 총괄하는 김선혁이 했다.
“햄머 자동차는 2008년 미국 금융 위기와 최악의 경영 능력으로 2009년 6월 파산을 신청해, 현재 미국 정부 소유의 공기업으로 지분 구조가 바뀐 상태다. 이러한 본사의 경영 악화로 그간 동남아시아, 유럽,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자사의 계열 브랜드들을 하나씩 팔아넘기거나 철수하는 등의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실정이다.”
“햄머가 한국 시장에서 철수하겠다는 겁니까?”
“그건 명확하지 않지만 카이저 행정부의 미국제일주의 정책에 맞춰서 미국 수출분을 현지 생산분으로 대체하는 분위기다. 한국 햄머의 국내 판매와 수출 물량에서 하락세를 보이며 적자만 쌓이는 것도 폐쇄를 결정한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매년 적자가 누적돼 재무 구조도 좋지 않은 상태인데 개선은커녕 부채 비율과 손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김선혁의 보고가 이어졌다.
“한국 햄머 군산 공장이 폐쇄되면 직접 고용된 2만 여명의 인력은 물론 협력 업체 직원들을 포함하면 15만 6천 명이 당장 일자리를 잃게 된다. 그 여파로 지역 경제는 망가지고 전체 자동차 산업이 심각한 위기에 빠질 거라는 전망이다.”
“심각하군요.”
“이번 한국 햄머 군산 공장 폐쇄 결정 발표는 상당히 의도된 전략으로 보입니다.”
“의도된 전략?”
자신의 보고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진혁에게 한상국이 그 이유를 설명했다.
“한국 햄머는 산업 은행이 공적 자금을 투입해 2대 주주로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작년 10월 산업은행의 지분 매각 거부권이 소멸되며 지분율이 28%에서 17%로 낮아져 주총 비토권(거부권)이 상실됐다는 겁니다.”
“……!”
주주 총회에서 주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비토권을 상실했다는 것은, 햄머 본사의 한국 햄머 자산 처분이 자유로워지게 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발표 시점을 설 연휴로 잡은 것도 굉장히 지능적입니다. 우리나라는 6월 지방 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군산 공장에서 일하는 인력들을 인질로 삼아 한국 정부로부터 추가 지원을 받아내겠다는 꼼수로 보입니다.”
“미국도 11월에 중간 선거가 열린다. 햄머의 경우 한국 정부가 지원금을 제공해 살리면 좋은 것이고, 아니다 하더라도 적자가 발생하는 공장을 정리하는 것이니 상관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김선혁의 마지막 말에 다들 표정이 어두워졌다.
햄머는 꽃놀이패를 쥐고 흔드는 반면 한국 정부는 외통수에 걸린 상황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진혁이 말했다.
“일단 오늘 회의는 이 정도에서 마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자. 연휴 동안 각자 좀 더 조사하고 대책을 세운 후에 다시 논의하는 게 좋겠다.”
다들 찜찜한 기분으로 일어나 설 연휴에 들어갔다.
* * *
긴 연휴를 보내고 돌아온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나눈 대화는 역시 한국 햄머의 군산 공장 폐쇄였다.
이현국 대통령은 한국 햄머의 군산 공장 폐쇄 결정이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보고 정면 돌파를 선언했다.
여론도 햄머의 이번 결정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특히 한국 햄머가 내건 ‘정부 공적 자금을 통한 제3자 배정 유상증자 참가’는 한국 국민의 세금으로 자신의 그룹을 살려 내라는 압박으로 해석되어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산업통상부 장관도 햄머가 납득할 만한 자구안을 가져와야 하며, 무조건적인 지원은 없다며 햄머의 전략에 끌려다니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진혁도 좀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잠시 소강 상태였던 미중 무역 전쟁도 본격적으로 달아올랐다.
미국이 ‘무역확장법 232조’를 근거로 중국산 철강과 알루미늄에 고율 관세를 부과했다.
이에 중국은 상무부에서 성명서를 내 미국의 이런 조치를 맹비난했다.
하지만 카이저 대통령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슈퍼 301조 조사 결과에 따라 500억 달러 규모의 중국산 제품에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중국도 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관세 부과 품목을 발표하면서 보복 조치를 단행할 것을 시사했다.
그러자 다음 날 카이저 대통령은 보란 듯이 천억 달러 규모의 추가 관세 부과를 지시했다.
두 강대국의 현기증이 날 정도로 연이은 공격 발표에 세계 경제가 신음할 때 한국은 햄머 문제로 연일 시끄러웠다.
한국 정부의 강경 태도에 햄머도 강수를 연달아 두었다.
내부적으로 구조 조정안을 발표하고 직원들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으면서, 정부가 지원하지 않으면 부도 처리할 수도 있다고 압박했다.
결국 진혁이 이현국 대통령의 호출을 받고 다시 청와대로 들어갔다.
“바쁘실 텐데 불러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미중 무역 전쟁에 한국 햄머 문제까지 겹쳐서인지 이현국의 얼굴은 까칠했다.
“잘 아시겠지만 한국 햄머 문제가 갈수록 꼬여만 갑니다. 며칠 후 햄머 본사의 최고 경영자가 면담을 요청해 왔는데, 협상이 쉽지 않을 것 같아 서 회장님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모셨습니다.”
현재 산업은행은 한국 햄머와 정상화를 위한 조건부 금융 제공에 합의한 상태였다.
최종 실사 결과가 긍정적으로 나오는 것을 전제로 자금을 지원한다는 방침이었다.
합의 내용에 따르면 햄머가 신규 투자로 약 4조 원을 투입하면, 한국 정부는 비토권 등과 연계해 신규 자금 약 8,000억 원을 투입하게 되어 있었다.
진혁이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햄머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그들은 지난 5년 동안 호주, 인도네시아, 태국, 러시아, 인도, 유럽 등에서 공장 폐쇄 카드로 각국 정부 지원금을 받아내는 외줄 타기 협상을 한 경험이 많습니다.”
“압니다. 그러고도 결국 공장을 폐쇄했지요. 나도 그래서 ‘정면 돌파’를 선언했던 것인데, 군산은 물론 호남 지역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거기에 야당의 비판까지 가세해서 곧 있을 지방 선거가 걱정된다는 여당 지도부의 우려까지 나오는 상황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당장 눈앞이 아닌 미래를 보셔야 합니다. 현재 진행되는 실사를 굳이 서두를 이유가 없습니다. 이러면 지방 선거 시기를 고려해 5월 말 군산 공장 폐쇄를 빌미로 압박의 수위를 높여 오고 있는 햄머의 전략에 휘둘리는 겁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만…… 햄머가 군산 공장을 폐쇄하고 미국으로 돌아오기로 한 것은 자신의 치적이라고 카이저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공표했습니다. 이에 여론이 공장 폐쇄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햄머가 정말로 한국 사업을 접는 게 아닌가 우려하는 시각이 급격하게 많아졌습니다. 이제는 다른 지역까지도 정부에 대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껏 위축된 이현국의 모습에 진혁이 속으로 혀를 찼다.
잠시 생각하던 진혁이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제가 내일 기자회견을 열겠습니다.”
“……?”
“알라딘 자동차의 ‘코뿔소’ 시리즈에 대한 중동과 아프리카 시장의 판매가 날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거기에 최근 베트남 정부의 국민 전기차를 녹다운 방식으로 생산하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공장 증설을 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럼……?”
“원래는 동남아시아의 공장을 증설할 생각이었는데, 한국에 이미 기능을 갖춘 공장이 저가 매물로 나온다면 다른 선택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될 걸 것 같습니다.”
이현국의 얼굴이 활짝 핀 것은 당연했다.
“햄머가 외줄 타기 협상 경험이 많다지만, 우리는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을 무수히 경험해 왔습니다.”
“……!”
“이번 협상에서 밀리면 계속해서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대통령께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시는 분입니다. 저와 국민이 뒤를 든든히 받치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십니까? 소신껏 강하게 나가십시오. 나머지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서 회장님이 있어 정말 든든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는 이현국의 표정에는 처음과 달리 굳은 결의가 담겨져 있었다.
진혁이 청와대를 나오고 얼마 후 이현국 대통령이 직접 청와대 기자실을 찾았다.
“우리 정부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국 햄머의 실사를 철저하고 엄밀하게 진행할 것입니다. 한국 햄머가 일방적으로 정한 시한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기자석이 크게 술렁였다.
현재 여론을 봐서는 정부가 한발 양보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는데 의외의 강수였다.
일찍 정신을 차린 기자가 얼른 질문을 던졌다.
“한국 햄머는 정부 지원이 안 된다면 5월 중 부도 가능성을 언급했습니다. 이에 대한 대책은 있으신 겁니까?”
“대한민국은 자유 시장 경제 국가입니다. 능력이 없는 회사와 경영자라면 도태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걸 국민의 혈세로 연명시키는 것은 오히려 저를 뽑아 주신 국민에게 죄를 짓는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만 한국 햄머가 부도 처리된다면 경제에 미치는 파장이 만만치 않습니다.”
“대한민국에 한국 햄머만 있는 건 아닙니다. 더 뛰어난 기업과 사업가들이 많습니다. 잠시 어려움이 있겠지만 곧바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상입니다.”
“대통령님!”
서둘러 몸을 돌리는 모습에 기자들이 불렀지만 이현국은 멈추지 않았다.
나머지는 진혁의 몫이었다.
그날 저녁 인터넷 게시판에는 난리가 났다.
일부 호의적인 반응도 있었지만 대부분 무책임한 대응이라는 비판이 더 많았다.
야당에서도 대통령의 경제 감각에 문제가 많다며 비판 대열에 합류했다.
* * *
다음 날 오후.
알라딘 자동차 부평 공장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룹 홍보실에서 중대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언론사에 알린 탓이었다.
자리가 없어 통로까지 채운 기자들 앞에 진혁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