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난감해진 햄머
“먼저 알라딘 자동차를 사랑해 주신 국내외 소비자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분들의 사랑으로 알라딘 자동차의 판매가 계속 증가하고 있어 추가로 공장을 증설할 계획입니다.”
기자들의 손이 바빠졌다.
통이 크기로 유명한 진혁이 직접 하는 투자 계획 발표였다.
그 규모에 관심이 쏠렸다.
“더불어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 생산하는 국민차 생산과 판매도 서서히 늘고 있고, 이번에 베트남 정부와도 국민 전기차 생산에 합의해서 공장증설 부지를 물색 중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그 계획을 밝히시는 것은 한국 햄머의 군산 공장 폐쇄와 한국 사업 철수를 염두에 두셨기 때문입니까?”
눈치 빠른 기자의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진혁의 다음 말이 편해졌다.
“이 자리에서 제가 타 기업의 일을 거론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사업가는 이윤을 쫓는 사람입니다. 공장 증설보다 훨씬 더 비용이 적게 드는 매력적인 기존 공장이 매물로 나온다면 당연히 그걸 선택해야지요.”
“군산 공장뿐만 아니라 한국 햄머 전체 공장을 인수하실 수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알라딘은 세계 각국에 진출해 있습니다. 이에 반해 자동차는 이제 막 시작한 상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특히나 알라딘 자동차는 향후 성장 가능성이 큰 전기차와 자율 주행차에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폭발적으로 늘어날 생산에 대비해 시설 확충에 공격적으로 투자할 생각입니다.”
결국 한국 햄머 공장 전체를 인수할 의향이 있다는 말이었다.
기자석이 잠시 술렁이는 사이 다른 기자가 얼른 다음 질문을 했다.
“어제 청와대에 들어가신 것으로 압니다. 그 이후 대통령께서 햄머에 대한 강경 발언이 나왔는데, 두 분이서 사전에 공감이 있으셨던 겁니까?”
“대통령과 저는 외국 자본의 먹튀 행위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것에 뜻을 같이하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의견을 나누지는 않았습니다.”
진혁이 적당히 둘러댔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기자는 없었다.
얼마간 더 기자들의 대답에 답변을 한 진혁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최근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사업가의 한 사람으로 고민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보다 더한 어려움 속에서도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을 이룬 저력이 있는 국가입니다. 전 그런 우리나라를 믿고, 당장 눈앞이 아닌 몇 년 후를 보겠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위해 길게 보고 사업하고 있습니다. 바쁘실 텐데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입니다.”
돌아서 가는 진혁의 등을 향해 기자들이 박수를 쳤다.
정치적인 발언을 최대한 자제했지만 지방 선거에 연연해 서두르지 않도록 국민들에게 기다려 달라고 정치권이 부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서였다.
그렇게 알라딘의 자동차 공장 증설 발표로 한국 햄머 사태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햄머의 최고 경영자 테일러와의 만남은 한 호텔에서 이루어졌다.
테일러가 말했다.
“대통령이 면담 전에 서 회장님과 만나 보는 게 좋겠다고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청와대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만, 왜 그런 지시를 내리셨는지 솔직히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진혁이 일부러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김세동으로부터 대통령의 의중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사업가는 사업가가 상대하는 게 맞을 것 같다고 하시더군.’
맞는 말이긴 했지만 어째 구해 주고 보따리까지 안겨 주는 것 같아 기분은 별로였다.
테일러가 말했다.
“잘 아시겠지만 군산 공장 폐쇄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회장님도 사업가시니 가능성 없는 사업을 끌고 가는 게 얼마나 무도한 행동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 역시 회장님의 생각과 같습니다. 군산 공장 폐쇄는 당연한 겁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공장도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한술 더 떠서 아예 한국 사업을 철수하는 게 어떠냐는 물음에 테일러의 얼굴이 굳어졌다.
테일러는 햄머의 생산직 사원으로 시작해서 최고 경영자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경영 전략은 철저한 성과 중심형이었다.
2014년 취임 이후 햄머는 세계 곳곳에서 먹튀 논란이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는 사업장에서 가차 없이 철수했다.
특히 호주에서는 12년 동안 무려 2조 원가량을 지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호주 정부가 추가 지원 요청을 거절하자 70년 가까이 운영해 온 공장을 일순간에 폐쇄해 버린 것은 유명한 일화 중 하나였다.
“우리는 한국 사업을 철수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것 참 아쉽네요. 좋은 기회가 오나 했는데…….”
입맛을 다시는 진혁을 바라보는 테일러의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한국 정부를 상대로 잘 진행되던 계획이 진혁이 개입하는 순간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한국 햄머는 여전히 손실을 기록하고 있지만, 아시아 공략의 전지 기지와 선진 기술 개발을 위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철수하게 되면 한국 햄머가 진 채무 대부분을 햄머 본사가 모두 책임져야 할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철수를 단행한 곳들은 그 이상의 정부 보조금을 받아내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한국 정부를 압박해 부채를 출자 전환 형태로 털어 버리고 운영비는 지원금을 받아내 해결하려는 전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이쪽 전략만 노출시켜 버린 악수가 되어버렸다.
테일러가 입을 다물고 노려보기만 하자 진혁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말했다.
“특별히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일어나 보겠습니다.”
“어떻게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테일러의 항복을 받아낸 진혁이 준비한 카드를 꺼내 놓았다.
“군산 공장 폐쇄는 카이저 대통령까지 언급한 사안이라 물릴 수 없으실 테니 제가 인수하지요. 공시지가를 조사해 봤더니 1,240억 정도 되더군요. 천억 달러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공시 가격보다 낮게 매각할 수는 없습니다. 인프라 구축과 건축에 들어간 비용을 감안하면 두 배는 받아야 합니다.”
“그럼 건물을 떼 가시든지요. 전 새로 짓는 공장은 스마트 팩토리로 가져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철거 비용이 더 들 겁니다.”
“……!”
“최근 한 중소기업이 인근 부지를 사들였는데 공시지가 이하였습니다. 그쪽 경기가 많이 안 좋은지 비어 있는 부지가 많더군요.”
철저할 정도로 냉정하게 계산하는 진혁의 모습에 테일러는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물을 마시며 화를 삭인 테일러가 말했다.
지금은 군산 공장 매각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부채를 털어내고 투자된 금액을 회수할 때까지 버틸 운영 자금의 지원이 절실했다.
“말씀대로 군산 공장을 넘겨 드리면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
“다만, 제출하신 경영 정상화 방안에서 한 가지만 보완해 오신다면 승인해도 좋겠다는 의견을 청와대에 전달은 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부분입니까?”
진혁이 아침에 김세동으로 받은 서류를 꺼내 놓고 말했다.
“햄머 본사가 한국 햄머 지분을 10년 이상 유지하고 한국 내 생산을 유지하겠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인 계획이 나와 있지 않더군요.”
“브랜드라는 게 계속 새로 출시되고 판매 상황이 수시로 변하니, 고정시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합니다.”
“압니다. 제 말씀은 그걸 햄머가 단독으로 결정하는 게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겁니다. 잘 팔리지도 않는 모델을 가져다 일 년에 한 대만 생산해도 문제가 없는 식이잖습니까?”
“……!”
테일러의 눈이 커졌다.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표현한 자신들의 전략을 정확히 집어서 수정을 요구하고 있었다.
오면서 조사한 것보다 더 뛰어난 자라는 것을 절감했다.
“어떻게 고쳤으면 좋겠습니까?”
“브랜드는 노조와 합의해서 결정하고 공장 가동률은 연평균 50% 이상을 유지하는 식으로 했으면 합니다.”
“노조에 경영권을 넘기는 일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테일러가 즉시 반대하고 나섰다.
한국 햄머가 설립된 이례로 노사 분규를 겪지 않은 해가 한 번도 없었다. 지금도 각 공장에서는 파업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정을 모르지 않은 진혁이기에 수정안을 제시했다.
“회장님의 경영 철학이 그러시다니 그 부분은 제가 양보하지요. 대신 공장 가동률을 70%로 올려 주십시오. 그래야 제대로 된 브랜드를 생산하실 테니까요.”
“70%요?”
“무리라고 판단하시면 제 애초 안을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둘 다 싫으시면 오늘 만남은 없던 것으로 하시든지요.”
진혁의 냉정한 말에 테일러의 얼굴이 굳어졌다.
칼자루를 놈이 쥐고 있었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테일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70%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청와대에 말씀드릴 테니 찾아가 보십시오.”
“함께 가시는 것이 아닙니까?”
“전 사업가지 정치가가 아닙니다. 제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진혁은 인사하고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라딘의 모토는 ‘상생과 공존’이었다. 그에 반해 테일러는 처음부터 끝까지 경제 논리만 따지고 있었다.
더 이상 말을 섞기 싫은 자였다.
* * *
한국 햄머 문제를 청와대로 넘긴 진혁은 방글라데시로 건너갔다.
남부 매립지의 일부에 자율 주행차 실험 도시인 ‘오토시티’ 기공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나즈마 총리를 필두로 정재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자율 주행 시대를 앞당길 자율 주행차 실험 도시인 ‘오토시티’는 세계 최초로 5G 통신망을 구축하고, 고속도로, 도심, 교외, 주차장, 커뮤니티 등 다섯 가지의 실제 환경을 재현한 세계 최고 수준의 자율 주행차 시험장으로 설계됐다.
알라딘 연구소가 설계하고 알라딘 건설이 시공을 맡는데, 진혁은 이를 일반에게 공개해 해외 기업 누구나 활용할 수 있게 하겠다고 발표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행사 후 만찬장에서 나즈마 총리가 웃는 낯으로 다가와 말했다.
“세계 이곳저곳에 사업을 넓혀 가신다는 소식에, 우리나라는 잊은 거 아닌가 걱정했었어요.”
“그럴 리가요. 이곳에는 아직도 할 일이 많습니다. 자바야드 섬을 식물원으로 만들어야 하고, 마틴 군도를 휴양지로 개발도 해야 하는 등 할 일이 천지입니다. 사업 때문에 예전처럼 자주 들르지 못하지만 마음만은 항상 이곳에 있습니다. 오늘의 제가 있게 된 것은 총리님과 로힝야가 있어서 가능했던 겁니다. 사람이 은혜를 잊으면 안 되지요.”
“말씀 참 예쁘게 하세요.”
비록 빈말이겠지만 고마움부터 표하는 진혁의 태도에 나즈마가 흡족해하며 물었다.
“국내는 서 회장님 덕분에 날로 번창하고 있어 걱정이 없는데, 해외 문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서 걱정이에요. 중국은 우리나라 1위의 교역국이고 미국은 최대 의류 수출국인데, 두 나라의 무역 전쟁의 불통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
“이번 기회에 중국의 비중을 낮추고 인도와 교역을 늘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인도와요?”
“카이저 대통령은 중국이 굴복할 때까지 관세 압박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각국이 보호 무역의 장벽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올 텐데, 인도는 탄탄한 내수 시장이 있고 반중친미 정책을 펴고 있어 오히려 수혜를 입게 될 겁니다. 인접국으로 지정학적 이점을 이용한다면 방글라데시에도 혜택이 돌아올 겁니다.”
“알겠어요. 조만간 인도를 방문해서 만길라 총리와 양국 관계 확대 방안에 대해 논의해 볼게요.”
나즈마 총리는 이제 진혁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을 정도가 돼 있었다.
“참, 좋은 소식이 있는데……. 그건 시에라 사장님께 직접 듣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무언가 말하려던 나즈마 총리는 시에라가 다가오는 모습에 웃는 낯으로 물러났다.
시에라가 이끄는 로힝야 건설은 방글라데시의 10대 건설사로 성장해 있었다.
다른 능력 있는 로힝야들도 이 지역의 경제 발전에 편승해 나름의 부를 축적해 지역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있었다.
시에라가 급히 자리를 옮기는 나즈마 총리의 모습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총리께서 왜 갑자기 떠나시는 겁니까?”
“좋은 소식이 있다면서 시에라 씨에게 물어보라시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