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운명적 만남
“아, 미얀마 정부에서 로힝야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돌아와도 좋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더 이상의 탄압은 없을 거라는 말과 함께요.”
“웃기는 사람들이네요. 내쫓을 때는 언제고 이제 살 만하게 되니까 그걸 또 노리고 돌아오라니요.”
“그 소식을 접하고 다들 어이없어했는데, 일부 어르신들은 생각이 좀 다르신 것 같습니다.”
“……?”
“평생을 살아온 고향이시니까요. 일부 가족들도 아직 남아 있고요.”
“그렇군요.”
“그래서 회장님께 어떻게 해야 할지 여쭈려고 왔습니다.”
“그걸 왜 저한테 묻습니까. 로힝야가 결정할 문제이지요.”
한발 빼려는 진혁을 시에라가 붙잡고 늘어졌다.
“회장님은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버려진 저희들을 지금까지 이끌어 주신 분입니다. 누구보다도 저희의 사정을 잘 아시니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글쎄요. 전 굳이 미얀마 정부의 제의를 거절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미우시겠지만 고향이란 의미는 결코 작은 게 아니니까요.”
“그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받아들이는 것은 맞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
“로힝야가 좀 더 힘을 가진 다음에 미얀마 정부와 당당하게 협상해서 받아들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힘을요?”
“사업적인 힘이 아니라 정치적인 힘 말입니다. 올해 선거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로힝야도 이번 기회에 정계에 진출했으면 싶습니다.”
“……!”
시에라의 눈이 커져다. 생각지도 못한 제의였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절묘한 계책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현재 남부의 경제 발전은 진혁의 결정에 따라 로힝야가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어 방글라데시안들과 관계도 좋았다.
거기에 나즈마 총리는 자신들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다.
의원 신분으로 미얀마 정부와 협상에 나선다면 개인 신분일 때보다는 훨씬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시에라가 바로 고개를 숙였다.
“말씀 감사합니다. 지도부와 논의해서 선거에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결과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힘껏 돕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앞이 보이지 않은 캄캄한 절망의 늪에서 신음할 때 만나 함께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성장했다.
사업적인 성공에 이어 정계 진출을 논의할 정도로 로힝야의 지위가 향상됐다는 게 진혁은 그 무엇보다 기뻤다.
* * *
진혁이 베트남에 도착했을 때는 축제 분위기였다.
안근석 감독이 이끄는 U-23 대표팀이 3~4위전에서 지역 라이벌인 태국을 이기며 3위에 오른 탓이었다.
베트남이 U-23 이상 연령대에서 태국을 이긴 것은 무려 10년 만의 일이었다.
베트남과 안근석 감독을 연호하는 함성으로 하노이 시내가 들썩일 정도였다.
진혁은 총리실로 가서 쯔엉 총리를 만났다.
“안 감독이 잘해 준 덕분에 제가 체면이 섰습니다. 모두가 서 회장님 덕분입니다.”
“총리께서 저를 믿어 주셔서 좋은 결과가 나온 것뿐입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베트남 축구가 아세안을 제패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미리 감축드립니다.”
“하하하하하.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서 회장님이 오시면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오히려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베트남은 대단히 매력적인 나라입니다.”
두 사람은 이어 호치민 시에서 진행하고 있는 ‘하이테크 농업’ 관련 사업과 국민차 생산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전기차를 조립만 하는 녹다운 방식으로 생산하는 것에 쯔엉 총리가 진한 아쉬움을 드러냈지만, 자국의 동흥 그룹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쯔엉 총리가 불편한 마음에 화제를 돌렸다.
“알라딘 그룹에 대한 국민들의 호감도가 급격하게 높아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렇습니까?”
“국민 전기차 생산과 호치민 시의 하이테크 농업에 대규모 투자를 해 주신 것도 그렇고, 우리나라 이주 여성과 노동자들의 가족 방문 행사를 한국과 베트남에서 열어 주셨잖습니까. 거기에 대표팀 메인 스폰서까지 맡아 안 감독이 쾌거를 이루는 데 1등 공신 역할을 하셨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알라딘 그룹의 모토가 ‘상생과 공존’입니다. 이 나라가 발전하고 이 나라 국민이 행복해야 알라딘도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성장해 가는 동반자 관계를 원합니다.”
“좋은 말씀입니다. 우리 정부의 뜻 역시 같습니다. 서로 협력할 방안이 있으시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힘껏 돕겠습니다.”
진혁은 서로 덕담을 나누는 것으로 오늘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총리실을 나와 호텔로 갔다.
방에서 쉬었다가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호텔 내 레스토랑에 김상균과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며 내일 일정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때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
“북조선 당비서실 리진수 조사관입니다.”
김상균의 얼굴이 당장 굳어졌다.
같은 공산주의 국가라 베트남과 북한은 전통적으로 우호 협력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그 때문에 리진수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들어와 다가올 수 있었다.
진혁이 말했다.
“일단 앉으시지요.”
“감사합니다.”
앞자리에 앉는 리진수를 바라보는 김상균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평생을 주적으로 여겨 온 적국 인사였다.
리진수가 말했다.
“지도자 동지께서 서 회장님의 방문을 청하셨습니다.”
“저를요?”
“그렇습니다. 공화국의 경제 발전에 대해 논의하고 싶다며, 북으로 오시면 좋겠다는 뜻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건 불가합니다.”
김상균이 바로 반대하고 나섰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직접 오시든지, 아니면 제삼국에서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김상균 동지에 대해서는 들었습니다. 국정원에 있을 때 우리 공화국의 일을 맡으셨다면서요.”
“……!”
“잘 아시겠지만 정권이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아 현재 지도자 동지께서는 외국 나들이를 다니실 정도로 한가하시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를 보내 서 회장님께 방북을 부탁드린 겁니다.”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만…….”
“됐습니다. 찾아뵙지 못할 이유도 없지요.”
“아니, 회장님.”
다시 반발하는 김상균을 무시하고 진혁은 리진수를 보고 말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고 조만간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지도자 동지의 뜻을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진수가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고 물러나자 김상균이 바로 따지듯 말했다.
“아무런 검토도 없이 승낙부터 하시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언젠가는 만날 사이입니다. 먼저 청하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검토는 지금부터 하면 됩니다.”
“검토도 검토지만 정부의 승인부터 받아야 합니다.”
남북교류협력법에 따라 남한 주민이 북한 주민과 접촉하고자 할 때에는 사전에 통일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건 김 실장님이 처리해 주십시오. 아직 저쪽의 의도를 모르니 가능한 소문 안 나게 했으면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김상균이 억지로 답했다.
오너인 진혁이 결정한 일이었다. 계속해서 반대하는 것은 옳은 행동이 아니었다.
* * *
며칠 후 진혁은 베이징 공항을 거쳐 순안 공항에 도착했다.
북한으로 가는 유일한 항공 노선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기하고 있던 리무진을 타고 대성산에 위치한 주석궁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자 윤호열 주석이 있었다.
“어서 오시라우요, 서 회장 동무.”
안아 오는 윤호열과 함께 포옹하는 진혁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로 자신을 부른 걸까?
윤호열 주석은 50대 중반으로 군살 없는 작은 체구에 피부까지 검어 마치 검은 표범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바라보는 눈빛이 날카로웠다.
배석한 리진수 조사관과는 눈인사만 나눴다.
자리에 앉자 윤호열이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거사에 나선 것은 김씨 정권 하에서는 공화국의 미래가 없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이런 내 생각을 어떻게 보시오?”
“그 질문은 사업가인 제가 답할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만, 북한이 폐쇄 정책으로 계속해서 버티기 힘들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신중한 진혁의 답변이 마음에 든다는 듯 윤호열이 한결 부드러워진 시선으로 말했다.
“맞습니다. 정치는 정치인이 하고 경제는 사업가가 맡아서 해야지요. 그런 이유로 서 회장 동무를 청한 겁니다. 북한 경제 발전에 힘써 주시오.”
“사업가가 사업할 수 있게 해 주신다니 기쁘긴 한데, 그러기 위해서 선결할 문제가 한둘이 아닌 것으로 압니다.”
“그 문제와 경제는 따로 떨어진 게 아니라 함께 맞물려서 돌아가는 톱니바퀴라는 게 내 생각이오. 아니, 오히려 현재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공화국의 경제 발전의 성과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설마 국제 사회로의 복귀를 대가로 경제적 이득을 보시겠다는 생각이십니까?”
“역시 협상가라 내 뜻을 바로 이해하는구려. 맞습니다. 이왕 개혁 개방에 합의할 거라면, 얻어낼 수 있을 때 최대한 얻어낼 생각이오. 그간의 행적을 조사해 보니 이런 식의 공작에는 서 회장이 전문인 것 같아 청한 겁니다.”
“……!”
진혁의 눈이 커졌다.
윤호열은 주변국의 역학 관계를 이용해 북한의 경제 발전을 이루려 하고 있었다.
이런 계획을 세우느라 그간 은인자중의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난 이기적인 지도자가 될 겁니다. 공화국 인민들이 더 이상 배곯지 않고 국제 사회에 나가서도 당당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세력과도 손을 잡을 용의가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는 게 공화국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될지 서 회장 동무의 의견을 듣고 싶어 불렀소.”
“어떤 식의 경제 개발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여기 리진수 조사관이 베트남에서 서 회장 동무를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난 공화국의 개혁을 베트남식 개혁 모델을 따를까 해서 당비서실에 지시해 조사 중이었습니다.”
1986년 개혁 개방 노선을 채택한 베트남은 1993년 IMF의 융자가 재개되면서 국제 금융 기관의 본격적 지원을 받게 됐다.
그 후 세계은행 주도로 서방 국가들이 참여하면서 국제적 지원 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특히 1995년 미국과 수교 이후 FTA 체결을 하며 미국 시장으로의 우회 수출 기지로서 본격적인 투자 유치가 이뤄졌다.
“베트남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개혁 초기 81달러로, 경제 규모로 보자면 공화국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FTA를 체결하면서 428달러로 증가하고, 2008년에는 1천210달러를 기록해 중소득국으로 진입했습니다.”
“맞습니다.”
“베트남은 개혁 초기 국제 금융 기관과 주요 서방 선진국의 양허성 원조를 받으면서도 아시아 주변국의 직접투자 유치도 적극적으로 유치해, 대규모 개발 재원을 공적 자금 외에도 외국인 직접 투자로 조달했습니다.”
리진수의 이어지는 말로 진혁은 윤호열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개발 재원을 외자 유치로 마련할 생각인 듯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투자 결정은 요청한다고 무조건 받아들여지는 게 아닙니다. 북한이 국제사회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정도의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 줘야 할 겁니다. 거기에 IMF나 세계은행의 개혁 프로그램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등 법적, 제도적 환경도 마련해야 하는데 가능하시겠습니까?”
“공화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해야지요.”
“무엇보다 베트남의 예에서 보듯이 대미 관계 정상화는 최우선적으로 선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카이저 대통령은 역대 그 어떤 대통령보다 강한 성정의 소유자입니다. 협상이 쉽지 않을 겁니다.”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굴욕을 당하더라도 최선의 결과를 끌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서 회장 동무의 도움이 필요한 겁니다.”
“제가 주석의 뜻과 반하는 선택을 하더라도 수용하실 용의가 있으신 겁니까?”
“음……. 공화국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건 확실한 겁니까?”
“그건 무조건 도움이 될 거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럼 받아들여야지요. 그 일념으로 역사에 기록될 대역 죄인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윤호열의 결의 찬 답변에 진혁은 그의 말이 진심임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