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윤호열의 제안
이틀 후 진혁은 육로를 통해 판문점에 도착했다.
남측 판문점에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내외신 기자들이 빼곡히 들어차 기다리고 있었다.
진혁은 북한 정권이 바뀐 후 처음으로 새로운 지도자를 만나고 온 외부 인물이었다.
취재 열기가 뜨겁지 않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했다.
기자 회견장에서 이어진 기자들의 질문이 그런 관심을 대변했다.
“어떻게 북한을 방문하시게 된 겁니까?”
“윤호열 주석의 초청으로 방문했던 겁니다.”
“다른 많은 분들을 놔두고 서 회장님을 가장 먼저 부르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윤호열 주석께서는 경제 발전에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아마 제가 사업가라서 부르셨던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경제 발전에 대해 어떤 관심이 있으시던가요?”
“북한이 오랜 기간 폐쇄 정책으로 경제가 망가진 상황이라며 안타까워하시면서, 국정 운영의 제1목표를 경제 살리기로 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국제 사회의 협력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럼 북한이 그동안의 폐쇄 정책을 포기하고 개혁 개방에 나설 것이라고 봐도 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진혁의 답변에 기자 회견장이 크게 술렁였다.
북한의 급격한 정책 변화였다.
“개혁 개방에 비핵화도 포함된 겁니까?”
“윤호열 주석께서는 북한의 경제 발전을 위하는 일이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북한 지도자의 연이은 파격적인 발언에 장내가 이전보다 훨씬 더 충격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건 약과였다.
이어진 진혁의 말에 모두가 패닉에 빠졌다.
“윤호열 주석께서는 이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과 한국, 일본, 러시아 등 관련국 지도자들과의 만남도 생각 중이라고 하셨습니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기자들이 그와 관련해 끊임없는 질문을 이었지만, 진혁은 성의 있는 답변으로 북한 지도자의 태도 변화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데 주력했다.
겨우 기자들에게 벗어났지만 진혁은 바로 회사로 갈 수가 없었다.
청와대로 가야 했다.
방송사가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속보로 판문점의 기자 회견을 내보내 주는 바람에 이야기하기가 편했다.
진혁의 요청으로 이현국 대통령과 김세동 안보수석, 진혁과 김상균 실장만 자리를 함께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현국 대통령이 말했다.
“윤호열 주석의 태도 변화는 환영할 만한데, 너무 급작스런 노선 변경이라 어리둥절할 정도입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경제 발전에 대한 의지가 대단하셨습니다. 그에 대한 대책도 뚜렷하시고요.”
“비핵화도 진심이란 말씀입니까?”
“진심이신 것 같았습니다. 다만 그를 위해 국제 사회가 응분의 대가를 내놓아야 할 것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
“북한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핵무기밖에 없습니다. 그걸 아무런 대가 없이 내놓을 수는 없잖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사정을 이해하면서도 맥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동안 북한 말 바꾸기에 뒤통수를 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윤호열 주석께서는 이번은 과거와 다를 거라며 대통령님께 잘 말씀드려 달라고 따로 부탁까지 하셨습니다. 의심보다는 믿음을 가지고 대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서 회장님이 그렇게 판단하셨다면 사실이겠지요. 우리야 당연히 같은 민족이니 환영하지만 주변국들의 반응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는 한반도 평화를 운운하며 뒤로는 우리의 통일을 막아 왔던 자들입니다.”
“윤호열 주석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대통령께 자신의 계획을 알려 달라고 저를 먼저 부르신 겁니다. 주석께서는 베트남식 개혁 모델에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베트남식요?”
의아해하는 이현국에게 진혁은 베트남의 개혁 개방 정책에 대해 들려주고 말했다.
“국제 사회의 안정적 지원을 위해서는 국제적 조정 채널이 마련돼야 하는데, 윤호열 주석께서는 한국 정부가 나서 주기를 희망하셨습니다. 그 일환으로 중단됐던 남북 경협의 재개를 요청하셨습니다.”
“남북 경협을요?”
“남북 경협은 양국 주도로 이뤄지는 게 바람직하지만,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는 일이라 한국이 전적으로 부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에 주변 4강과 유럽 연합, 국제 금융 기구와 긴밀한 협의를 통해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합심해서 노력하자고도 하셨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도와야지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통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통일에 소요되는 비용이 10년간 최소 2천조 원은 넘을 거라는 전망까지 나와, 국민들 사이에 통일 불가론까지 거론되는 마당입니다.”
“금액이 맞고 안 맞고를 떠나서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통일 전에 북한 경제를 최대한 발전시켜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윤호열 주석의 생각이 그렇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최대한 빨리 만남을 주선해 주십시오.”
“죄송합니다만 윤호열 주석께서는 첫 방문지로 미국을 원하셨습니다.”
“……!”
“카이저 대통령과 담판을 지은 다음에 편하게 만나고 싶다며 양해를 구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이현국은 수긍하면서도 소태 씹은 표정을 감추지는 못했다.
근세기 들어 한반도에 대한 결정권은 내내 미국이 쥐고 있었다.
남북한의 의견보다 미국의 생각에 따라 모든 게 결정되니, 자신이 미국을 첫 순방지로 택했듯 윤호열도 마찬가지였다.
민족의 중요한 문제를 당사자가 아닌 미국과 협의해야 한다는 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누고 청와대를 나와 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김상균이 물었다.
“왜 다 말씀드리지 않으신 겁니까?”
“이 일의 성패는 비밀 유지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요. 그러니 실장님도 보안에 각별히 신경 써 주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큰일을 맡게 되어 생각할 게 많았다.
* * *
일주일 후 진혁이 워싱턴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반가운 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CIA 잭슨이었다.
“많이 컸어. 이젠 내가 영접 나와야 할 정도로 말이야.”
“제가 요구한 게 아닌데요?”
“귀신같이 냄새를 맡고 와서 밖에 기자들이 쫙 깔려 있어. 백악관에서 무조건 빼내 데려오라는 지시를 내렸어.”
진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카이저 대통령은 북한과의 일을 자신의 치적으로 삼고 싶어 했다.
잭슨이 모는 차를 타고 공항을 몰래 빠져나와 백악관으로 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었다.
카이저 대통령과 비서실장 메도스, 국방장관 토마스, CIA 국장 제임스, 그리고 특별 보좌관 뉴트까지.
이 나라의 실세들이 총출동해 있었다.
“알라딘의 서진혁입니다.”
“어서 오시오.”
카이저 대통령의 환대를 받으며 자리에 앉은 진혁이 말을 꺼냈다.
“윤호열 주석께서는 미국에 도움에 감사해하시고, 이번 일을 계기로 양국 간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기를 희망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미국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비록 최종 단계에서 약간의 문제가 생겨 계획이 틀어져 버렸지만, 북한의 신정부와 우호 협력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주석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고 계시지만 최근 중국 쪽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중국요?”
카이저 대통령의 눈꼬리가 바로 올라갔다. 사사건건 신경을 건드리는 골치 아픈 존재였다.
“지도자의 급작스러운 사망을 두고 미국의 암살한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무근이오.”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런 주장이 중국 쪽 접경 지역 주민들을 통해 급속히 퍼져나가고 있답니다.”
생각지 못한 변수에 다들 얼굴이 굳어졌다.
그사이 진혁이 말이 이어졌다.
“거기에 중국이 북한을 동서경제벨트 사업에 포함시켜 주겠다는 비공식적인 제의를 해 와, 일부 친중 인사들을 중심으로 중국과 관계 개선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를 대서 그 자리에 앉게 해 준 우리를 배신하겠다는 겁니까?”
“미국의 선택은 윤호열 주석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중국이 미국이 보낸 지도자 형을 암살해 준 덕분에 지도자 자리에 앉게 됐으니, 윤호열 주석이 어느 쪽에 호의적일지는 불문가지입니다.”
“……!”
진혁의 정확한 지적에 다들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미국에게 윤호열은 쓰고 버릴 장기판의 졸 정도였다.
그런데 중국의 개입으로 그 졸이 지도자가 되어 버렸다.
진혁이 말을 이었다.
“북한의 개혁 개방은 베트남식 모델인데, 윤호열 주석께서는 그를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필수라 고민하고 계셨습니다.”
베트남에 실질적인 외자 유치가 이루어진 것은 미국과의 수교, 그리고 FTA가 체결된 이후였다.
카이저 대통령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정확한 판단이오. 북한의 개혁 개방은 미국의 승인 없이는 이뤄질 수 없습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이라 우선 미국과 대화를 해야 한다고 설득해서 이곳을 제일 먼저 찾아온 겁니다.”
“북한 주석은 어떤 식으로 관계 개선을 하실 생각이시던가요?”
비서실장 메도스가 물었다.
“중단되었던 경수로 사업을 재개하는 것으로 시작하시는 게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대북 경수로 사업은 1994년 북미 간 합의에 따라 북한이 제네바 합의대로 핵 동결을 유지하면 총 사업비 46억 달러를 들여 북한에 천 메가와트 가압 경수로를 지어 주기로 한 사업이었다.
사업 주체는 한, 미, 일 3국이 주축이 된 KEDO, 즉 한반도 에너지 개발 기구가 맡아서 진행했었다.
2001년 본 공사에 착공, 발전소 기초 굴착 공사에 들어갔지만 2002년 북한이 핵 개발을 재개하면서 중단됐었다.
뉴트가 바로 코웃음을 쳤다.
“흥. 본인들이 약속을 어겨서 중단되게 해 놓고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하고 계속 지원해 달라는 건 너무 염치없지 않나요?”
“윤호열 주석께서는 과거 위정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벌어진 일이라 하셨습니다. 필요하다면 이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도 약속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런 북한의 말 바꾸기에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가 북한을 더 이상 믿지 못하는 겁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한 것 같군요. 미국의 입장에 대해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잠시만요.”
당장 일어나려는 듯 엉덩이를 드는 진혁의 태도에 제임스가 얼른 막았다.
“서 회장이 보시기에 윤호열 주석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개혁 개방 의지가 굉장히 강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핵 개발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러시겠다고까지 하실 정도였습니다. 미국은 물론 세계가 북한 정권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어 보였습니다.”
“알겠습니다. 우리가 의견을 모으는 동안 잠시 쉬고 계십시오.”
“……그러지요.”
진혁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진혁이 호텔로 향하는 사이 백악관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북한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약속을 지킨 적이 없는 거짓말 집단입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게 분명합니다. 더 이상 저들의 농간에 놀아나면 안 됩니다.”
“과거의 일은 김씨 정권 하에 벌어진 일들이었습니다. 윤호열 주석은 개혁 개방을 표방한다니 실리론자로 보여집니다. 과거와 달리 벼랑 끝 전술을 펼치지 않고 먼저 대화 재개를 요청해 온 것만도 전향적인 태도입니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강하게 압박해 핵 포기를 반드시 받아내야 합니다.”
미국의 힘을 믿고 강하게만 대응하려는 뉴트의 고집불통 행동에 제임스는 답답함을 느꼈다. 도대체 대화로 풀려는 의지가 없었다.
잠시 대화가 소강 상태에 빠지자 카이저 대통령이 물었다.
“서 회장이란 자 말이야. CIA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켜봐 온 자라는데, 믿을 수 있는 자야?”
“사업가는 이득을 쫓는 자라 믿는다는 게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신의는 지켜 왔고, 능력이 뛰어나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의 결과를 이뤄내 왔습니다. 그런 활약 덕분에 조직 내에 그를 아는 요원들 모두 호의적입니다.”
“능력이 뛰어나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