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경수로 사업 재개
잠시 생각하던 카이저 대통령이 이번에는 국방장관에게 물었다.
“토마스 자네 생각은 어때?”
“저 역시 뉴트 보좌관과 같은 생각입니다. 북한은 위험한 집단입니다. 다만, 지금 그걸 건드리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
“미국의 당면 과제는 이란과 시리아입니다. 그쪽 일이 진정되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악화만 되고 있는데, 북한 문제까지 더해진다면 통제 불능의 상황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저 역시 국방장관의 생각과 같습니다.”
눈치를 보던 메도스 비서실장이 얼른 입을 열었다.
“군사적으로도 그렇지만 외교적으로도 매우 중요하고 민감한 시기입니다. 현재 우리는 중국과의 무역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북한이 중국 편에 서 버리면 곤란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습니다.”
“북한은 세계 최하위의 최빈국입니다. 그 정도는 더해지건 말건 큰 차이가 없습니다.”
뉴트가 끼어들었지만 메도스가 냉정히 고개를 저었다.
“북한이 보이는 것이 전부였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계속 끌려 다니지 않았을 겁니다. 북한은 단순히 경제력이나 군사력만으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국가가 아닙니다. 동북아시아 역학 구도의 중심에 있다 보니 그쪽 일에 대해서는 중국은 물론 일본, 러시아까지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겐 한국이 있잖습니까?”
“현재 한국 내 반미 감정이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우리 측 요구로 사드 배치를 감행했다가 중국의 경제 보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방관만 하고 있다며 한국 정부마저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거야 북한의 핵 도발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잖습니까?”
“그래서 더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런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한다는데 우리가 그걸 받아 주지 않겠다고 하면 그들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제까짓 것들이 감히…….”
“그만해라.”
뉴트의 말이 거칠어지려고 하자 카이저가 막고 제임스에게 물었다.
“CIA 전문가들 의견은 어때?”
“우선은 지켜보자는 쪽입니다. 국방장관이 이야기한 대로 군사적으로는 이란과 시리아 일이 있고, 외교 경제적으로는 중국과 관세 전쟁을 목전에 두고 있는데 또 다른 곳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다는 판단입니다.”
“그렇군.”
“한 가지 더 다행스러운 것은 윤호열 주석이 경수로 사업을 들고 나왔다는 겁니다.”
“그게 왜?”
“사업비의 70%를 한국이 책임지고, 일본이 20%, 우리는 겨우 10%라 거의 부담이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물러서서 지켜보다 아니다 싶으면 그때 나서서 정리해도 늦지 않습니다.”
“좋아. 그럼 일단 윤호열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하자고. 이 일은 뉴트가 서 회장이란 자와 협의해서 잘 풀어봐.”
“알겠습니다.”
이번에도 카이저 대통령의 최종 선택은 뉴트였다.
환한 얼굴을 하고 있는 뉴트에 비해 나머지의 표정은 어두웠다.
* * *
진혁과 뉴트와의 만남은 이틀 후에 이루어졌다.
진혁은 그사이 아라칸의 피터 회장과 아라칸-알쇼핑을 맡고 있는 하마드를 만나 미주 시장 전망에 대한 유익한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기자들을 피해 묵고 있는 호텔로 불러야 하는 불편함은 감수해야했다.
앞자리에 앉자마자 뉴트가 말했다.
“대통령께서 윤호열 주석의 제안을 받아들이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감사…….”
“관련국 중 다른 두 나라인 한국과 일본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은 북한 측 몫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라 하셨습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미국의 동의한다는데 반대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건 알아서 하시고, 실무자 간 의견 조율이 끝나면 윤호열 주석이 직접 미국으로 건너와야 합니다. 대통령과 회담 후 공동 선언문 형태로 발표하자는 게 우리 측 의견입니다.”
“충분히 받아들이실 것 같습니다.”
이후 뉴트가 이런저런 의견을 내놨지만 진혁은 그와 기 싸움을 하려는 것이 아니기에 가능한 한 이견 없이 받아들였다.
뉴트는 그것을 진혁이 자신의 가진 배경을 주눅이 들어 그런 것이라 착각했다.
“아시겠지만 대통령께서는 ‘미국제일주의’를 표방하시고 그걸 이뤄내실 힘도 가지고 계십니다. 서 회장님은 세계 여러 나라에 투자하고 계신 것으로 아는데, 우리나라에는 상대적으로 투자가 미미한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미국이 앞으로 유망하고 안전한 투자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인연이 닿지 않았을 뿐입니다. 아라칸 같은 좋은 투자처가 있다면 언제든지 투자할 용의가 있습니다. 많은 소개 부탁드립니다.”
“역시 사업가라 판단이 빠르시군요. 앞으로 자주 뵙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논의된 내용에서 경수로 사업 재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는 것은 백악관의 생각이었다고 발표하십시오.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 주는 게 다른 나라를 설득하기에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기자들에게 그렇게 말하겠습니다.”
이후 뉴트는 몇 가지 주의를 주고 흡족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식은 커피를 마시며 그의 등을 바라보는 진혁의 시선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뉴트는 자신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끝낼 생각이었다면 애초부터 이 일에 나서지 않았다.
* * *
다음 날.
진혁은 미국을 떠나면서 공항에서 기회 회견을 열어 윤호열 주석의 개혁개방 의지를 카이저 대통령에게 전달했다고 말했다.
이에 백악관에서 중단됐던 경수로 사업 재개를 제안했음도 밝혔다.
끝없이 이어지는 날카로운 질문에 진혁은 자신은 전달자일 뿐 결정은 윤호열 주석의 의지라며 예봉을 피했다.
그 뒤 미국을 떠난 진혁은 일본에 도착해 쇼다 대신의 안내로 총리를 만나 윤호열과 카이저의 뜻을 전했다.
일본 총리는 떨떠름한 표정을 했지만 반대를 하지 않았다.
실익은 없지만 인접국인 북한 문제에 뒷짐만 지고 물러설 수만도 없었다.
일본의 일까지 마무리 지은 진혁이 한국으로 돌아와 청와대를 다시 찾았다.
이현국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경수로 사업 재개를 북한 문제 해결의 실마리로 삼겠다는 발표는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백악관도 합의한 내용입니다.”
“경수로 사업을 재개하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
“경수로 사업은 아시겠지만 2002년 북한의 핵 재개발로 중단됐다가 2006년 공식적으로 종료됐습니다. 문제는 당시까지 경수로 건설에 차관 형태로 북한에 투입된 돈이 총 1조 3,744억 원에 이른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차관으로 제공된 원금과는 별개로 차관 자금 마련을 위한 차입금의 이자로 현재까지 총 1조 5,831억 원 지급해, 지금까지 소요된 자금만도 거의 3조 원에 달하는 실정입니다.”
“대체 어떤 멍청한 작자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업을 진행했다는 말입니까?”
“험, 험.”
김세동이 흥분해 목청을 높이려는 진혁에게 주의를 주려고 헛기침을 했지만 소용없었다.
흥분한 진혁이 쏘아붙이듯 말을 쏟아냈다.
“전부 국민의 세금일 텐데,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이렇게 막 퍼 줘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한민족의 문제라 한국이 주도하고 경수로를 한국형 모델로 고집하는 바람에 부담액이 늘어났던 겁니다.”
“그럼 더 잘했어야지요!”
“공항에서 한 기자 회견을 듣고 야당을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현재 분위기로는 사업 재개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저 역시 대한민국 국민으로 세금을 내는 처지입니다. 내가 힘들게 벌어 낸 세금을 위정자들이 막 퍼서 쓴다는데 좋아할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호통치듯 화를 내는 진혁의 모습에 다들 황당해했다. 그가 벌인 일 때문인데.
참지 못하고 이현국이 물었다.
“그래서 서 회장님의 생각은 뭡니까?”
“국민의 뜻에 따라야지요.”
“북미 간 합의는 어떻게 하고요? 일본도 동의했다면서요.”
“그건 필요한 국가들끼리 알아서 하면 되는 일입니다. 한국은 국민이 반대해서 안 된다고 하십시오. 물론 그간 투자된 자금은 반드시 돌려줘야 한다고도 하시고요.”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쉽진 않겠지요.”
“헐.”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황당함에 다들 어이가 없어 입을 열지 못했다.
그사이로 진혁의 무거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겨우 북미 간 의사 타진이 이뤄졌을 뿐입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도 멀고 넘어야 할 산도 많습니다. 그사이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양보하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
“북미 양측에 한국의 입장과 국민들의 정서를 명확히 전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양보하더라도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라도 우선은 강하게 나가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급한 건 북한과 미국이지 한국이 아닙니다.”
그제야 다들 진혁이 방금 전 한 행동이 이해가 됐다.
하지만 진짜 급한 곳은 따로 있었다.
* * *
베이징 주석궁의 분위기는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왕칭린이 리광잉에게 물었다.
“그자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다던가?”
둘만 있는 자리라 평어를 썼다.
“한국으로 돌아가 청와대에 들어갔다더군. 북미 합의와 일본 총리의 동의에 대해 보고하겠지.”
“한국 대통령도 북미 합의에 따르겠지?”
“그럴 수밖에 없을 거야. 반대 여론이 있다지만 미국 측 의견을 무시할 수 없고, 북한 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을 누구보다도 원하는 곳이니.”
왕칭린은 밀려오는 모멸감에 어금니를 물었다.
카이저 대통령이 이렇게 자신들을 배제한 채 북한과 직접 대화로 문제 해결을 시도할 줄 알았다면 UN의 대북제재에 동의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무역 공격을 받으면서도 가장 든든한 우방국인 북한마저 잃어버린 꼴이 됐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왕칭린이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광잉 자네가 그자를 한 번 더 만나 줘야겠네.”
“협상을 할 생각인건가?”
“이런 식으로 상황이 정리되어 버리면 우리가 잃을 게 너무 많아. 무역 전쟁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아시아에서 이뤄 놓은 중국의 위상을 한순간에 잃어버릴지도 몰라. 그건 무조건 막아야 하네.”
“알겠네. 최대한 설득해 보겠네.”
“항상 어려운 일만 맡겨서 미안하네.”
“아니야. 이번 일에는 내 잘못도 커. 서진혁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우핑의 보고를 새겨들으라 말해 놓고 나부터가 실천을 하지 못했어. 사전에 우리 사람으로 만들었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을 거야.”
“전권을 줄 테니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자를 우리 사람이 되도록 해 보게. 쓰임새가 많은 자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아.”
“운이 강한 자였네. 일단 만나 보고 나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세.”
링광잉이 서둘러 일어났다.
한국 정부의 의견까지 수합한 진혁이 윤호열에게 성과를 보고하기 위해 북한으로 갈 거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 전에 어떻게든 만나야 했다.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온 리광잉을 보자마자 허융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바로 알고 오신 겁니까?”
“……뭐가?”
“말레이시아 탕분헝 총리께서 연락을 주셨습니다. 은밀히 상의드릴 일이 있다면서 잠시 후 다시 전화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은밀히 상의할 일?”
“그때와 마찬가지 상황이라고 하셨습니다.”
“……!”
“무슨 일입니까?”
“중요한 일이다. 지금부터 내 사무실 주변으로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라. 그리고 이 일은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면 안 된다.”
“……알겠습니다.”
허융은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리광잉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 감히 묻지 못했다.
사무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리광잉은 초조하게 전화를 기다렸다.
탕분헝이 언급한 예전의 일.
남중국해 영토 분쟁에 미국이 개입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려 줘서 위기를 넘기게 해 준 걸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이번에도 진혁이 탕분헝을 통해 자신과 대화를 나누려고 하고 있었다.
마침내 기다리던 전화벨 소리가 났는데 사무실 전화가 아니라 핸드폰이었다.
발신 번호가 표시되지 않아 정체를 알 수 없는 전화였다.
평소라면 절대 받지 않을 텐데 지금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