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274화 (274/307)

274화. 구경꾼

“경수로 사업의 총 사업비가 46억 달러였습니다. 거기에 6자 회담을 하면서 약속한 중유와 철강재 등을 합치면 70억 달러 정도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를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5개국에서 균등하게 책임지는 방식이 제일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음……. 그 정도면 주석께서도 승인해 주실 것 같은데, 다른 나라들이 가능하겠습니까?”

“한국은 제가 맡고 일본은 주석께서 설득하신다고 했습니다. 중국은 러시아를 맡아 주시면 됩니다.”

“우리가요?”

싫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되묻는 리광잉의 질문을 못 들은 척 진혁이 말을 이었다.

“6자 회담의 나머지 5개국이 모두 합의한다면 미국도 고집만 부리지 못할 겁니다. 이 방법만이 중국이 이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결국 참여하려면 러시아를 반드시 설득해야 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고민하는 리광잉에게 윤호열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전 정권을 종식시키고 이 자리에 오르는 데 미국의 도움을 받았음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친미라는 오해는 안 하셨으면 싶습니다. 그들의 선택은 처음부터 내가 아니었으니까요. 비행기 안에서 벌어진 독살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날 인정한 것뿐입니다.”

“그 일은 결단코 저희들이 벌인 일이 아닙니다.”

“압니다.”

“예? 아신다고요?”

“그 일은 우리 측 요원이 벌인 일입니다.”

“……!”

경천동지할 발언에 리광잉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공화국 인민을 위해서는 세습 정권을 끝내야 한다는 대의로 거사를 단행했던 겁니다. 그런데 다시 미제의 앞잡이가 된 또 다른 형제가 지도자에 오르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요. 그로 인해 귀국이 괜한 오해를 받게 한 것은 미안하게 됐습니다.”

“……이 일을 왜 제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가 미국의 의사에 반해 공화국에 앞잡이를 내세우려는 저들의 의도를 막았다는 것을 알려 드리는 겁니다. 귀국도 그들과 무역 전쟁 중입니다. 우리는 적이 아니라 힘을 합쳐 미국을 상대해야 할 동지입니다. 이런 내 각오를 왕칭린 주석께 꼭 말씀드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주석님의 그런 깊은 뜻을 말씀드리고, 6자 회담 재개에 힘을 합치도록 적극 건의하겠습니다.”

리광잉이 결국 6자 회담 재개에 대해 동의했다.

윤호열의 강수로 결론이 나자 진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전 표면적으로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경수로 사업 재개 합의를 이끌어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제가 중국을 위해 6자 회담 재개를 위해 나설 수는 없습니다.”

“그건 그렇지요.”

“그래서 부총리께서 어제 도착하시자마자 광산 권리 양보의 선물을 안기며 6자 회담 재개를 먼저 제안하신 것으로 입을 맞추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주석께서는 제가 가져온 미국과의 합의안보다 중국 측 제안이 더 낫다고 판단해 받아들이시는 것으로 하는 게 가장 그럴듯한 시나리오 같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렇게 정리되면 서 회장 동무가 미국 정부의 눈 밖에 나지 않겠소?”

“미국 정부의 인정을 받으려고 이 일에 나선 것은 아니니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정히 걱정되시면 절 추방해 주십시오.”

“추방요?”

진혁의 느닷없는 요구에 윤호열은 물론 듣고 있던 리광잉마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미국의 합의안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 대들었다가 불경죄로 쫓겨났다면, 아무리 미국이 화가 난다고 해도 정상 참작은 해 주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하.”

일부러 크게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을 짓는 진혁의 모습에 윤호열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는 진혁이 중추적인 역할을 했지만 6자 회담 재개로 가닥이 잡히게 되면 나머지는 정치 외교 전문가들이 나서서 해결할 일이었다.

자신의 역할이 사라진 것을 알고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물러나려는 것이다.

그런 진혁의 마음을 알고 리광잉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은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진정한 용자의 모습을 보여 줬다.

말이 나온 김에 진혁이 마무리 말을 했다.

“쫓겨나는 이가 먼저 나가는 게 당연하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고생 많았소. 동무의 충정은 잊지 않겠소. 개발 사업 때 봅시다.”

“마무리 잘하시고 항상 강령하십시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자신에게도 인사를 하고 미련 없이 일어나 나가는 진혁의 모습에 리광잉이 윤호열에게 양해를 구하고 따라 나왔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번번이 큰 도움만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직 갈 길이 먼 사업입니다. 잘 마무리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회장님도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리광잉의 말에 마침 생각나는 게 있기에 진혁이 말했다.

“도움이라기보다는 한 가지 드릴 의견이 있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경청하겠습니다.”

“한국을 상대로 한 경제 보복 조치는 한국만이 아니라 중국 경제에도 해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나 6자 회담 재개를 염두에 두고 있으시다면 지금의 조치는 결코 양국에 득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측 실무자들 역시 같은 의견입니다만, 선례가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선택이 쉽지 않습니다.”

“왕칭린 주석께서 공개적으로 언급한 정책을 하루아침에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요. 최소한 민간 기업에서 진행하는 일은 막지 말아 달라는 말씀입니다. 그 정도면 정권에 부담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무슨 말씀인 줄 알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들어가 보십시오. 주석께서 기다리십니다.”

주저없이 몸을 돌려 떠나는 진혁의 등을 바라보는 리광잉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묻어 있었다.

정말 탐나는 인재였다.

진혁이 잔뜩 굳은 얼굴로 무장한 군관들에게 양쪽 팔이 붙잡혀 쫓겨나듯이 판문점을 넘어오는 모습에 카메라 플래시가 연달아 터졌다.

밝은 얼굴로 판문점을 통해 건너갔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아직 해가 지기도 전이니, 평양까지의 거리를 감안하면 주석 궁에 머문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쫓겨났다는 말이었다.

기자들이 앞다퉈 질문을 했지만 진혁은 굳게 입을 닫은 채 서둘러 자리를 떴다.

항상 기자들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하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이에 일부 언론에서 경수로 사업 재개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는 부정적인 기사를 내보내기까지 했다.

알라딘 그룹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진혁이 북미 합의를 통한 경수로 사업 재개를 발표하며 뉴스의 중심으로 떠오를 때만 해도 남북 화해의 최대 수혜 그룹이 될 거라는 기대감이 컸었다.

헌데 중국이 윤호열 주석에게 막대한 선물 보따리를 안기며 6자 회담 재개를 이끌어내자 분위기가 단번에 역전돼 버렸다.

거기에 강하게 반발했다가 강제 추방됐다는 소문까지 퍼지면서 상황이 더 악화됐다.

이제는 오히려 능력도 안 되면서 설치다가 G2 양국으로부터 미움만 받게 됐다며 놀림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상황이 그런데도 진혁은 침묵한 채 그룹 운영에만 전념했다.

외부 활동도 김선혁에게 맡겨 철저하게 언론 접촉을 피했다.

이런 알라딘 그룹과는 반대로 이현국 대통령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북중이 합의한 6자 회담 재개에 반대하는 카이저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한반도 평화가 중요함을 역설해 결단을 이끌어 냈다.

그 때문인지 중국 정부가 민간 차원의 교류 협력은 막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덕분에 막혔던 한류 수출이 재개되고 중국 단체 관광객들의 한국 여행이 재개되며 어려운 경제에 단비가 됐다.

북한도 철저히 한국 정부를 무시했던 기존 태도를 버리고 남한에 먼저 정상 회담을 재개를 제의하며 남북 화해 무드가 조성됐다.

이런 사실을 이현국 대통령이 청와대 기자실에서 직접 발표했다.

그는 또한 북한 핵 동결에 따라 추가로 지원될 지원금은 6자 회담 참여국이 균등하게 부담하기로 합의했다는 사실까지 알려, 시청하던 국민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서운하지 않은가?”

함께 저녁을 먹고 TV로 대통령의 발표를 보며 김세동이 물었다.

진혁은 요즘 두문불출하는 바람에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와 가족과 지내고 있었다.

“대통령께서 잘하시고 계시면 된 거지요.”

“발표문을 가져다 드리러 갔더니 자네에게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셨어. 자네가 받아야 할 칭찬을 당신이 받고 있다며.”

“이제 겨우 첫걸음을 뗐을 뿐입니다. 가야할 길도 멀고 어떤 난관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험난한 여정이 될 겁니다.”

“그렇겠지. 남북 관계는 항상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아서 한번 잘못 디디면 바로 나락으로 떨어지니까.”

“그래서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어야 합니다. 따로 가야 한쪽에 문제가 생겨도 다른 쪽에서 협력을 지속해 나갈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빠져 있는 게 좋습니다.”

진혁은 반대하는 이현국에게 자신은 경제를 맡겠다고, 정치는 정부가 책임지는 게 맞다며 설득한 상태였다.

* * *

서울에서 재개된 6자 회담이 열리는 날 진혁은 아프리카의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에 가 있었다.

광물 공사로부터 인수한 암바토비 광산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니켈, 망간 광산의 채광 규모는 서울 여의도의 세 배에 해당할 정도로 넓었다. 채굴을 위한 플랜트 역시 여의도 면적에 맞먹을 정도였다.

현장을 지휘하고 있는 한국제철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규모만 봤을 때 세계 최대 수준이라고 했다.

한때 대한민국에서 부실 자원 투자의 대명사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던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밤낮없이 가동되는 공장과 근로자들의 어디에서도 그늘은 찾아볼 수 없었다.

컨테이너 벨트에서는 엄지손가락만 한 ‘브리켓(완성품)’이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먼저 도착해 있던 강성천 회장이 웃으며 말했다.

“저도 한국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 선입견을 가지고 왔는데, 보고를 받고 놀랐습니다. 그간 수많은 광산 프로젝트를 접해 봤지만 이곳만큼 확실히 글로벌 경쟁력이 있는 현장을 보지 못했습니다. 정치 논리에 휘둘려 이런 잠재력 높은 사업을 포기했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했습니다.”

“성과가 좋다니 다행입니다.”

“암바토비는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광산입니다. 국내 전기차 배터리용 수요는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 정도입니다. 회장님의 탁월한 안목에 감탄했습니다.”

“저야 결정만 했을 뿐, 조사는 직원들이 한 것입니다.”

진혁은 겸손한 말과는 달리 얼굴 가득히 뿌듯한 만족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늦게까지 현장을 둘러보고 호텔로 돌아온 진혁은 강성천 회장과 저녁을 같이 먹었다.

“서울에서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 일을 주도하신 회장님은 오히려 이 먼 타국에 와 계시다는 게 아이러니합니다.”

“전 사업가입니다. 사업가가 현장에 있는 게 더 자연스러운 거지요.”

“당연한 말씀이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게 문제지요. 저만 해도 이곳으로 간다고 하니 당장 비서실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남북 관계 개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일이 아닙니다. 아직 갈 길이 먼데 정치 쇼를 구경하면서 허송세월을 보내는 우를 범할 수는 없지요. 준비는 잘되고 있습니까?”

“다행히 남북 교류가 활발했던 시절, 북한 자원 공동 개발 연구를 위해 북에서 가져온 광물들이 한국 지질 자원 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더군요. 국정원의 도움으로 우리 연구소로 가져와 연구원들이 분석 중에 있습니다. 제련 공정 단계를 줄이고 오염 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새로운 공정 개발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외부에서는 진혁이 북한으로부터 배척당해 의기소침해 두문불출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아니었다.

북한의 문호가 공식적으로 개방되면 바로 광물 자원 개발에 착수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한국제철은 그 일에 최적의 파트너였다.

* * *

콩고의 무소쉬 구리 광산까지 구경한 진혁이 방글라데시로 건너갔다. 남부 매립지에 석유 화학 단지 조성이 완료됐다고 보고를 받아서였다.

나즈마 총리와 함께 개소식 행사를 마치고 공장을 둘러봤다.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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