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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275화 (275/307)

275화. 블라디보스토크

새로 준공돼 깔끔한 공장에서는 ‘산업의 쌀’로 불리는 폴리에틸렌(PE)과 폴리프로필렌(PP)이 정미소의 쌀알처럼 쉼 없이 쏟아져 나와 포대에 담기고 있었다.

DS-13 광구에서 뽑아낸 천연가스가 단지 내 가스 분리 시설(GSU)에서 화학 작용을 통해 메탄과 에탄, 프로판, 부탄으로 나뉜다.

이를 액체 상태의 프로필렌, 기체 상태의 에틸렌으로 분리됐다가 고체화되어 철로를 통해 소나르 항만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었다.

이 모든 공정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스마트 팩토리로 구성됐다.

그간 최빈국의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있던 방글라데시에 이런 최첨단 공장이 들어선 것에, 초청받아 온 외신 기자들이 놀란 표정으로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그 모습에 나즈마 총리가 뿌듯한 표정으로 진혁에게 말했다.

“서 회장님으로부터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상상하기 힘들었는데, 이렇게 직접 눈앞에서 보니 그 계획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멋지게 만들어 줘서 너무너무 감사해요.”

“총리께서 저를 믿어 주시고 지원해 주셔서 해낼 수 있었던 일입니다. 감사는 오히려 제가 드려야지요.”

“요즘 많은 해외 기업들이 저를 찾아오고 있어요. 이곳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자신들도 참여하게 해 달라고 조르고 있어요.”

“그럼 받아들이십시오.”

“하지만 여긴 서 회장이 개발한 땅이잖아요?”

“방글라데시에는 아직도 개발해야 할 국토가 널리고 널렸습니다. 여기는 그들에게 팔고 그 돈으로 미개척지를 개발해 도시와 공단을 만들면 됩니다. 그런 선순환적인 개발을 위해 이곳 남부부터 먼저 집중적으로 개발했던 겁니다.”

“……!”

나즈마 총리는 그제야 진혁이 왜 다른 지역에서 반대할 수 있다는 자신의 우려를 일축하고 남부 개발을 밀어붙였는지 알 수 있었다.

진혁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허가를 내주면 난개발이 돼 버려 애써 만든 이곳이 망가지게 될 겁니다. 지금이라도 정부 내에 국토 전체적인 개발을 총괄할 수 있는 전문 부서를 만드셔야 합니다. 이곳뿐만 아니라 앞으로 개발되어야 할 곳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서 국토가 균형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대비하셔야 합니다.”

“그 일은 지금까지 서 회장님이 하셨잖아요?”

“경제 특구나 공단 같은 프로젝트라서 가능했던 겁니다. 방글라데시 전국토를 개발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입니다. 앞으로의 개발은 총리님께서 정부 내 전문가들을 이끌고 추진하시는 게 맞습니다.”

“…….”

나즈마 총리가 답을 하지 않았다.

맞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자신이 이룬 것을 내놓고 정부에 그 공을 넘긴다는데 백번이고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쁨보다 진혁이 이곳의 일을 정리하려는 느낌을 받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진혁도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러 내색을 하지 않았다.

북한의 일이 시작되면 한동안 거기에만 매달려야 할 게 분명했다.

방글라데시는 지금 한 단계 도약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자신의 사정 때문에 그 일을 미룰 수는 없어 나즈마 총리에 떠넘긴 것이었다.

* * *

진혁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6자 회담이 끝나 있었지만 그 열기는 오히려 더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북한이 오랜 세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핵 개발 포기를 선언하며 IAEA의 사찰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겠다고 천명했다.

이에 나머지 국가들이 중단됐던 경수로 사업 재개와 약속한 경제 지원을 하기로 합의했다.

북한은 더 나아가 중단됐던 개성 공단의 재가동과 금강산 관광 재개도 한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요청하는 한편, 양국 정상 회담을 다음 달 평양에서 개최하자는 제안도 했다.

급작스럽게 진행된 남북 화해 분위기에 경협 관련 기업들이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며 주가 상승을 견인하고 있었다.

한편 그와는 별도로 한국 햄머의 경영 정상화에 대한 합의가 있었다.

햄머가 출자 전환 36억 달러를 포함해 한국 햄머에 64억 달러의 자금을 지원하고, 산업은행은 2대 주주로 7억 5,000만 달러 출자에 동참하는 것으로 햄머 회생 계획안이 타결됐다.

햄머가 최소 10년 이상 한국에서 투자를 이어 가며, 공장 가동률은 연평균 70% 이상을 유지하기로 했다.

더불어 산업은행은 거부권도 회복하며 최소한의 ‘먹튀’ 방지를 위한 안전장치도 마련했다.

이와는 별도로 폐쇄 결정이 내려진 군산 공장은 알라딘 자동차에 천억 원에 매각한다는 계획도 함께 발표했다.

주변의 그런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알라딘 그룹은 진혁의 지휘 아래 제3차 ‘동행 한마당’ 행사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번 행사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인 미주 시장이 참여하고 아프리카 시장에서도 진행된 터라 기대가 컸다.

그룹 자체적으로 세운 목표는 작년보다 46% 인상된 350억 달러였다.

행사 당일 진혁이 참석한 곳은 미국 워싱턴 DC의 최대 쇼핑몰, 타이슨스 코너 센터였다.

넓은 1층 홀 전체를 임대해 행사장으로 꾸몄다.

정관계 인사들은 물론 유명 연예인들이 대거 참석한 터라 각 언론사들도 모두 몰려와 열띤 취재 경쟁을 벌였다.

미국인들도 각 가정에서 TV로 현장 중계 화면을 시청하며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쇼핑 축제의 원조는 미국의 ‘블랙 프라이데이’였다.

그러던 것이 중국의 알리바마가 ‘독신절’ 행사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미국인들의 자존심에 생채기를 냈다.

그런데 알라딘 그룹이 ‘투게더 페스티벌’로 독신절과 엎치락뒤치락하며 선두 경쟁을 벌이고 있고, 그걸 언론에서 이슈화하니 자연스레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 미국은 중국과 무역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알라딘을 응원하는 것은 당연했다.

진혁이 연단에 올라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그 화면을 시청하며 미국인 열 명 중 아홉은 손에 핸드폰을 쥐고 있다는 게, 미국인들도 이번 행사가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행사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 함께 주문 전쟁이 시작됐다.

전광판의 붉은 숫자는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로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호텔 TV에서 흘러나온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잔뜩 흥분되어 있었다.

알라딘의 ‘투게더 페스티벌’ 매출이 목표액인 350억 달러를 훌쩍 넘겨 405억 달러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어서였다.

나아가 11월에 열리는 알리바마의 ‘독신절’이 이번 기록을 깨기는 힘들 것이라는 전문가의 전망도 전했다.

그러나 뿌듯한 마음으로 한국에 돌아온 진혁에게 슬픈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알리바마 하윤 회장, 조기 은퇴 선언!

중국 IT업계 거물인 하윤 회장이 인터넷 성명을 통해 창립 20주년이 되는 내년에 은퇴하겠다고 밝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중국 정부의 음모론을 제기했지만 하윤 회장은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일이라고, 미뤘던 교육 사업에 전념하겠다고 했다.

어깨가 축 처져 들어온 진혁의 모습에 지민이 물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표정이 안 좋으세요.”

“하윤 회장이 은퇴 선언을 했어.”

“벌써요?”

“일전에 그 비슷한 말씀을 하시긴 했는데…….”

말끝을 흐리며 방으로 들어가는 진혁의 등을 바라보는 지민의 시선에는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하윤 회장은 진혁에게 목표이자 친구 같은 존재였다.

일찍부터 그를 따라잡겠다는 일념이 있었기에 진혁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지민이었다.

‘동행 한마당’ 행사도 그래서 열게 됐었다.

서로 앞서거나 뒤쳐지거나 하며 경쟁하다 이제 확실히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쓸쓸히 무대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돌아온 지민은, 침대에 누워 멍한 시선으로 천정을 바라보고 있는 진혁의 옆에 누우며 말했다.

“우리 여행 가요.”

“여행?”

“그동안 당신이 바빠서 제대로 된 여행을 못 갔잖아요. 이번에는 둘이만 가요.”

“아이들은?”

“엄마께 잠시 봐달라고 하면 되죠. 가요. 네?”

“까짓것 인생 뭐 있어? 그러자구.”

진혁도 흔쾌히 동의했다.

중요한 행사도 끝난 터라 특별한 일정은 없었다. 무엇보다 혜주가 태어난 이후 둘이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이후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여행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막혔다.

“어디로 가지?”

너무 간단한 물음인데도 답을 하기 어려웠다.

아니,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진혁과 지민 둘이 돌아가면서 도시와 나라를 나열했지만 뭔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러다가 진혁의 머리에 번쩍 떠오르는 게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가 보자.”

“블라디보스토크요?”

“그래. 요즘 그쪽 여행을 많이 간대. 구경하는데 2박 3일 정도면 충분하다니 기간도 적당하고.”

“좋아요. 그걸로 해요.”

“그럼 여행지는 결정됐고…….”

두 사람은 이후 각자 핸드폰으로 관련 정보를 수집했다.

* * *

일주일 후 진혁과 지민은 수많은 사람의 부러움 섞인 시선을 받으며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비행기로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다.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의 블라디보스토크는 동해 연안 최대의 항구 도시이자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종착점으로 유명했다.

국내 항공사도 있었지만 진혁은 일부러 러시아 국적기를 이용했다.

북한 상공을 지나가기 때문에 비행시간이 더 짧아진다고 해서였지만, 날씨가 흐려 북한 경치를 직접 볼 수는 없었다.

작은 도시다 보니 대부분의 가 볼 만한 곳이 한데 몰려 있어 편했다.

자유 여행이어서 특별히 시간에 구애받을 일도 없었다.

호텔에서 실컷 자고 나와 여행 지도를 보며 이곳저곳 구경을 다녔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으로 가서 눈으로만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구경하고 아르바트 거리로 나와 맛집을 찾아 허기를 때웠다.

루스키 대교가 바라다 보이는 테라스에서 마시는 커피는 일품이었다.

해변에 위치한 해양 공원에 들렀다가 인근 해산물 식당에서 이곳에 오면 꼭 맛봐야 한다는 곰새우랑 킹크랩을 맥주와 곁들여 먹었다.

그리고 다음 날은 유명한 혁명 광장을 방문했다.

마침 일주일에 한 번 주말 시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패키지 여행의 필수 관광 코스라 그런지 단체 관광객들도 많았는데, 한국인들도 다수 보였다.

둘은 시장 입구에서 파는 쿠키를 하나씩 사서 입에 물고 본격적인 시장 구경에 나섰다.

각자 차에 집에 있는 물건을 싣고 나와 팔아서인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다.

인근의 굼 백화점에 들러 가족과 지인들에게 줄 선물을 사고 나니 벌써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오늘이 여행의 마지막 밤이라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진혁은 호텔에 쇼핑백을 내려놓자마자 지민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서울에서 검색해 놓은 맥주집이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자 아늑한 분위기의 홀 안에는 테이블마다 손님들이 꽉 들어차 있어 유명한 곳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마침 빈자리가 나와 앉을 수 있었다.

다행히 영어로 된 메뉴판이 있어 흑맥주와 소시지 안주를 시켰다.

흐뭇한 표정으로 맥주를 마시는 진혁의 모습에 지민이 물었다.

“이제 기분이 좀 풀리세요?”

“그래. 일도 중요하지만 휴식도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어. 고마워.”

“이렇게 가끔 우리 둘이 여행 다니고 싶었어요.”

“앞으로는 그렇게 하자고.”

“피. 거짓말.”

지민이 입을 삐죽거렸다.

한번 일을 시작하면 몰입하는 진혁의 스타일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하윤 회장의 은퇴 발표를 보고 느낀 게 있어.”

“……?”

“정점에 올라선 사람의 허무함. 지난번에 만났을 때도 그렇고, 공허하다는 느낌을 받았어.”

“그래요?”

“하윤 회장은 한계를 만난 것 같아. 중국의 시스템으로는 더 이상 오를 수 없다는……. 그래서 안타까워. 자본주의 국가에서 태어났다면 아직도 더 높은 꿈을 펼치고 있었을 텐데 하고 말이야.”

“그래서 당신은 한국에서 태어난 게 행복해요?”

“그럼 당연하지. 하지만 반대로 책임감도 느껴. 나, 당신, 우리 아이들, 가족들, 알라딘 식구들. 모두가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을 잘 지켜야겠다는.”

무거운 주제인데도 진혁의 말을 들은 지민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맺혔다.

그녀가 진혁을 좋아하는 것은 뛰어난 사업가적인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진혁은 자만하지 않고 주변을 돌보는 자상함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지민이 진혁의 손을 잡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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