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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276화 (276/307)

276화. 고려인의 회한

“난 당신이 이제 목표를 세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왜? 실패하면 좌절할까 봐?”

“아니요. 당신은 목표로 정하면 반드시 이룰 거예요.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당신이 남들의 목표가 되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저도 듣는 이야기가 있어요. 알라딘은 이제 한국을 넘어 세계적 기업이에요. 당신을 모르는 국민들이 없어요. 젊은이들이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이 당신이래요. 대학생 취업 선호도 1위 기업이 알라딘이고요.”

비슷한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듣고는 있었지만, 지민의 말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사업적으로 성공도 물론 중요해요. 하지만 하윤 회장님이 세계인으로부터 존경받는 것은 단순히 그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을 가르치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업을 포기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경제가 우선이라며 사업에 뛰어드셨다잖아요. 어렵게 키운 알리바마도 자신과의 약속한 때가 되자 과감하게 동료에게 물려주고 고향으로 돌아가 제자들을 가르치시겠다니, 어떻게 그런 분을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럼 당신은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진혁의 솔직한 물음에 지민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게 물을 게 아니라 당신이 결정할 문제인 것 같아요. 다만 앞으로는 국내에 좀 더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좋겠어요.”

“국내?”

“국내 경제 상황이 많이 안 좋잖아요. 금융 위기에 중국의 경제 보복까지 겹쳐서 많은 중소기업들이 힘들어하고, 청년들은 취업을 단념한 채 ‘헬조선’이라며 자포자기에 빠져 있는 상황이에요.”

“안타까운 일이야.”

진혁도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라 충분히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민국은 세계가 놀랄 정도로 성공의 역사를 이룬 나라예요. 인류 역사상 6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우리처럼 비약적인 발전을 한 사례가 없대요. 1960년부터 2017년까지 세계 경제가 7.5배 성장하는 동안 우리는 40배 성장했어요.”

“그래?”

“한민족은 몇 가지 성공 유전자를 가지고 있대요. 첫 번째가 고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강렬한 생존 본능, 두 번째가 경쟁을 즐기는 승부사 기질, 세 번째가 우리라는 개념의 집단 의지와 개척자 근성.”

“공부 많이 했네.”

진혁의 농담에 지민이 눈을 흘기며 말을 이었다.

“책에서 그 내용을 읽을 때 난 당신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어요.”

“나?”

“당신이 어떻게 지금의 알라딘을 이뤄 왔는지 옆에서 지켜봐 왔잖아요. 태후가 포기한 이집트 사업을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성공시켰어요. 많은 곳에서 그런 당신을 시기하고 방해도 했지만, 오히려 그걸 발판으로 더 크게 성공하며 시장을 개척해 오셨고요. 여러 사람들을 함께 끌어안아 가시면서요.”

“듣고 보니 비슷하네.”

무거워지려는 분위기를 가볍게 하려고 진혁이 일부러 능청을 떨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지민이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당신에게 로힝야 난민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안타깝다는 마음이 컸어요. 헌데 이번에 베트남의 ‘라이따이한’ 사연을 알았을 때는 가슴이 울컥했어요. 비록 절반이지만 같은 민족이라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

“그래서 우리 민족에 대한 공부를 좀 했는데, 라이따이한 말고도 고국으로부터 잊혀진 채 해외에서 힘들게 사는 이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아요. 이곳 연해주만 해도 ‘카레이스키’라고 불리는 고려인들이 있어요.”

연해주는 1860년 러시아가 청으로부터 강제 조약을 통해 영토로 편입시킨 땅이었다.

경제적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조선인 농가 13가구가 이곳으로 넘어온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유입되었는데, 그들은 ‘고려인’이라고 불렸다.

1930년대 들어 고려인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자 스탈린에 의해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 때문에 고려인은 뿔뿔이 흩어져 우즈베키스탄에 18만, 러시아에 15만, 카자흐스탄에 11만, 국내에 6만 5천 명 등 50만여 명이 살고 있대요. 난 당신이 국내의 힘든 국민들과 해외 동포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줬으면 해요. 그들의 목표가 되어 고국을 사랑하며 열심히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지민의 마지막 말에 진혁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맺혔다.

“그럽시다. 그들에게 어떻게 희망을 줄지 함께 고민해 봐요.”

진혁도 지민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고 함께 잡았다.

며칠간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고민이 있었는데, 지민 덕분에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진혁 부부는 호텔에서 일찍 체크아웃을 했다.

원래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미니 제주도’라는 루스키 섬 관광을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계획이 변경됐다.

그들이 찾아간 곳은 북쪽으로 100킬로 떨어진 우수리스크였다.

고려인 문화 센터가 있어서였다.

1층은 고려인 역사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연해주 지역에 이주한 고려인의 생활 문화, 항일 운동 당시의 사진들과 기록물들이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원래 이곳 연해주가 발해의 영토였지요.”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니 곱게 늙은 할머니가 다가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일 독립 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어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태동한 곳도 이곳입니다. 최재형 선생의 생가, 이상설 유허비 등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한민족 사적지가 이곳에 있어요.”

“학교에서 배운 기억이 납니다.”

“요즘 한국인이 많이 찾아오지만 자신들의 뿌리도 모른 채 러시아, 중국인들이 만들어 놓은 허상만 보고 가는 게 안타까워요. 입구에 있던 안중근 의사 추모비도 블라디보스토크 의과대 학장이 그분을 존경해 만들었는데, 러시아인 학장으로 바뀌며 버려지다시피 해서 우리 고려인들이 이곳으로 옮겨 왔어요.”

할머니는 자신을 고려인 4세인 김타냐라고 했는데, 한국 관광객들에게 이곳의 역사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자원 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할머니의 설명을 들으면서 전시물들을 보니 험난했던 고려인들의 역사가 좀 더 가슴 깊이 와닿았다.

그녀의 안내가 전문가 수준이라 지민이 물었다.

“할머니는 원래 이곳 직원이셨어요?”

“내가 아니라 먼저 간 동무가 여기 관장을 했었어요. 같이 어울리다 보니 들은풍월이 있어서 좀 아는 체했을 뿐이에요. 살아 있을 때는 다투기도 많이 했는데, 갑자기 저세상으로 떠나고 나니 허전해서 이렇게 나와 그 친구가 했던 일을 거들고 있어요.”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가 그리워 그가 했던 일을 대신하고 있다는 말에 지민은 가슴이 아려 왔다.

“좋은 말씀 해 주신 보답으로 제가 식사를 대접할 테니 같이 가세요.”

“새댁이 참 착하기도 하지. 이렇게 내 이야기를 들어 준 것만 해도 고마워요. 난 괜찮으니 신랑이랑 맛있는 거 먹어요.”

“그러지 말고 함께 가세요. 저희가 배가 고파서 그래요.”

좀 이른 시간이었지만 지민이 손까지 잡아서 끄는 바람에 타냐는 못 이긴 척 따랐다.

순수 자원 봉사다 보니 따로 나오는 돈이 없어, 식사는 싸 온 간식거리로 때우는 처지였다.

타냐의 손을 끌고 입구까지 나온 지민은 순간 당황했다.

식당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

“할머니, 죄송한데 저희가 여기 처음이라……. 드시고 싶은 것 있으면 그리로 가세요.”

“멀리 갈 필요 없어. 따라와요.”

타냐가 다시 안으로 들어갔는데 센터 한쪽에 고려인 식당이 있었다.

한국의 분식점이라도 온 듯 김치찌개, 갈비탕에 돌솥비빔밥까지 있었다.

타냐의 추천으로 한식과 만두를 시켜 먹었는데, 고려인들이 간직해 온 김치 맛과 된장 맛이 한국의 그것과 너무 흡사해 놀랄 지경이었다.

“우리네가 먹던 것들을 남한식으로 만들어서 팔고 있는데 입맛에 맞는지 몰라.”

“아주 맛있어요. 계속 러시아 음식만 먹어서 우리 음식이 생각나던 참이었거든요.”

“맛있게 많이 먹고 독립 운동사 최재형 선생 생가하고 이상설 선생 유허비도 둘러봐요. 대한국민의회 건물도 직접 가 보고요.”

“저희가 오후 비행기라 시간이 안 될 것 같아요.”

“사정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나중에 다시 시간 내서 한번 또 올게요.”

지민의 말에도 김타냐의 어두워진 표정이 밝아지지 않자 진혁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할아버님은요?”

“훨씬 전에 저 세상으로 갔어요. 워낙 오래전 일이라 기억도 없어요.”

“자제분들은 안 계세요?”

“있지요. 아들하고 딸이 하나 있는데 다들 모스크바에 가 있어요.”

“그렇군요.”

“우리 애들뿐만 아니라 여기 젊은이들은 다 서부의 대도시로 나가고 없어요. 이곳은 개발이 안 돼서 일자리는 없고 물가만 비싸요.”

한국의 시골 공동화 현상이 이곳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국토 면적이 넓은 나라였다.

우랄 산맥을 기준으로 국토의 1/4은 유럽에, 나머지 3/4은 아시아에 속해있는 반면 인구의 80%가 유럽에 밀집해 있었다.

한반도 크기의 무려 28배에 달하는 광활한 극동 지역의 인구는 겨우 600만 명으로 러시아 전체 인구의 4.4%에 불과했다.

극동의 대표 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만 해도 면적이 561제곱킬로미터로 대전과 비슷한 규모이지만, 인구가 계속 줄어 58만 명 정도만이 거주할 정도로 인구 유출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번에는 김타냐가 물었다.

“무슨 일을 하시오?”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아, 사업이 어려워서 겸사겸사 알아보려 왔나 보고만.”

“……?”

“관광객들이 와서 그러더라고. 요즘 한국에서 사업하기 힘들다고. 아이들 취직도 안 되고.”

“……그렇긴 하지요.”

자신의 사정을 오해하고 있지만 한국의 어려운 건 사실이라 진혁이 대충 수긍했다.

“쿠렌코 총리가 이곳을 개발하겠다고 투자청까지 만들어서 외국 기업들을 끌어들이는 정책을 펴고 있어요. 그래서 요즘 사업가들이 많이 찾아와요.”

“그래요?”

“예전에 남북 관계가 좋았을 때도 한국 사업가들이 많이 왔었어요. 북한이 핵 실험을 하는 바람에 공염불이 되어 다들 망해 떠났지만.”

“얼마 전에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겠다고 회담에 나섰으니 다시 좋아지겠지요.”

“좋아지면 뭐 해, 이미 중국 놈들하고 일본 놈들이 다 차지해 버렸는데.”

“……?”

의아한 표정을 짓는 진혁에게 타냐가 이곳 사정을 들려주었다.

“여기 상점들은 중국인들이 다 차지했어요.”

“그래요?”

“그동안은 서로 전쟁했던 나라라 중국과 사이가 안 좋았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기업을 유치한다고 하면서 급격하게 밀려오더니, 이곳의 웬만한 상점들은 그들이 모두 매입했어요. 간혹 일본인 사장이 있는 곳은 있지만 한국인은 거의 보지 못했어요. 이러다가 이곳이 다시 중국인들의 땅이 되는 게 아닌지 걱정하는 이들이 많아요.”

“그렇군요.”

“살림만 하며 늙은 여자가 무얼 알겠습니까마는, 과거에 한국인 사업가들이 실패하고 돌아갈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어요. 중국 놈이나 일본 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함부로 투자하겠어요. 다들 믿는 구석이 있으니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사들이는 거겠지요. 올 거면 더 늦기 전에 와요.”

“한국에 돌아가면 좀 더 조사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진혁은 일단 신중하게 답변을 했다.

투자 결정이라는 게 단순히 누구 말만 듣고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김타냐는 경제 전문가도 아니었다.

하지만 반대로 일반인마저 그렇게 느끼고 있다면 이곳에 큰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 이후로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진혁 부부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공항에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좋은 말씀 감사했습니다.”

“이야기 들어 준 것도 고마운데 밥까지 대접해 줘서 내가 너무 고마워요.”

“조만간 다시 들르겠습니다.”

“그래요. 내가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기다릴게요.”

진혁이 인사가 끝나자 지민도 가벼운 포옹으로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잘 가요.”

그때 등을 토닥거리던 김타냐가 갑자기 물러나며 소리쳤다.

“이럼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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