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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277화 (277/307)

277화. 통 큰 나눔

지민이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준비한 봉투를 몰래 넣어 주려다 걸렸다.

봉투를 빼려는 김타냐의 손을 지민이 얼른 붙잡아 저지하고 말했다.

“다음에 뵐 때까지 건강하시라고 식사비 조금 넣었어요.”

“아니, 그래도 이러는 것은…….”

“좋은 말씀 듣느라고 환전한 돈을 다 쓰지 못했어요. 얼마 안 돼요. 안녕히 계세요.”

다시 봉투를 빼내려는 타냐의 행동을 막은 지민이 얼른 진혁에게 눈짓을 하고 대기 중이던 택시에 올라탔다.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기사가 룸 밀러를 보며 말했다.

“할머니께서 부르시는데요. 뭐 잊어버리고 오신 것 아니십니까?”

뒤를 돌아보니 김타냐가 손에 든 봉투를 막 흔들면서 뭐라 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그냥 가 주세요.”

지민이 웃으며 말했다.

면세점에서 사야 할 것들이 있어 남겨 뒀던 돈을 봉투에 전부 넣어 꽤 됐다.

특히나 이곳은 물가가 낮아 가치가 더했다.

늦게 확인한 김타냐가 너무 큰돈에 놀라 돌려주려고 부른 것이 틀림없어 못 본 척하기로 했다.

* * *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진혁을 기다리는 것은 산더미처럼 쌓인 결재 서류였다.

“뭐가 이렇게 많아?”

“난 매일 이 정도씩 결재했거든. 다들 택배 전쟁을 치르느라 정신없는데 혼자만 푹 쉬다 왔으면 일을 해야지.”

둘만 있으니 희준이 면박을 줬다.

동행 한마당 행사가 성공리에 끝난 것은 좋았지만, 그만큼 배송해야 할 물량도 늘어서 다들 고생하는 중이었다.

뻔히 사정을 알기에 진혁이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자 희준이 기가 살아 한 소리 더 했다.

“직원들만이 아니야. 와이프도 엄청 눈치 주고 있단 말이야.”

“처제가 왜?”

“애들은 장모님에게 맡겨 놓고 너희 둘만 여행 다녀왔잖아. 우리도 가자고 어찌나 조르는지…….”

“그럼 배송만 마무리되면 다녀와.”

“정말?”

“그래. 블라디보스토크가 좋더라.”

“지현 씨도 그렇게 이야기해서 우리도 그리로 갈까 생각하고 있어.”

의외로 쉽게 승낙이 떨어지자 얼굴이 활짝 핀 희준의 모습에 진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마음을 숨긴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왕 갈 거면 그쪽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고 가. 맛집이나 관광지, 이런 것만 검색해서 가지 말고.”

“그게 다 아니야?”

“직접 가보니 그렇지 않더라고. 역사부터 해서 경제, 사회적으로 우리나라와 관련된 부분이 의외로 많더라. 미리 좀 알아보고 올걸 하는 후회가 많이 들었어.”

“그래?”

“친구니까 다 좋은 여행 되라고 해 주는 말이야. 싫음 말고.”

“아니야. 아직 시간 있으니 그쪽에 대해 좀 알아보지, 뭐.”

무심코 답하며 돌아서 나가는 희준의 행동에, 진혁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 커졌다.

* * *

시내 중심가의 한 대형 호텔에 정장 차림의 직장인들이 몰려들었다.

알라딘 그룹에서 여는 ‘동행 한마당’ 결산 보고회 때문이었다.

진혁이 매년 이 기회를 빌려 직원들에게 통 크게 쏘는 터라 다들 얼굴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협력 업체 관계자들도 초청해서 그 수가 훨씬 많았다.

거기에 기자들도 이런 좋은 취재거리를 놓칠 리가 없기에 당연히 찾아왔다.

김선혁이 동행 한마당 결산 보고를 하고 물러나자 진혁이 연단에 섰다.

지켜보는 이들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어느 부서와 어느 직원이 우수 공로자로 인정돼 큰 선물을 받게 될지 관심이 집중됐다.

진혁이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동행 한마당 행사가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온라인 쇼핑 축제가 된 것은 여기 모인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수고해 준 알라딘 식구들, 그리고 참여해 준 협력 업체 모두가 합심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저는 그 모든 분들과 성과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어 발표된 진혁의 계획에 장내가 크게 술렁였다. 진혁은 우선 모든 직원에게 2천만 원 상당의 스톡옵션을 지급하겠다고 했다.

“상장 회사 직원은 회사가 보유한 주식을 나눠 드릴 것이며, 비상장 회사는 기업 가치 평가 후 제가 가진 보유분에서 지급하겠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연말에 기본 2천만 원에 근속 연수 일 년마다 500만 원씩 성과금을 지급하겠습니다.”

엄청난 계획을 발표했음에도 장내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침묵에 휩싸였다.

스톡옵션.

주식 매수 청구권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보편화된 용어였다.

하지만 보통 그것을 받는 이는 창립 멤버나 전문 경영인, 사주의 일가친척 정도로 특정인들이었다.

그런데 진혁은 그 대상을 전 직원으로 확대하는 통 큰 결단을 내렸다.

“우와!”

“서진혁 만세!”

“알라딘 만세!”

뒤늦게 자신들이 특별한 대접을 받게 됐다는 것을 깨달은 직원들이 하나같이 만세를 부르며 연호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호텔 밖까지 울려 퍼져, 지나가던 시민들이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돌릴 정도였다.

어느 정도 장내가 진정되자 진혁이 말을 이었다.

“협력 업체에 대한 고마움은 ‘성과공유제’로 갚겠습니다.”

협력 업체가 생산성 향상으로 양질의 제품을 낮은 가격에 제공하여 동행 한마당 매출 증대에 기여하는 경우 이를 되돌려 주겠다는 취지였다.

발주처의 갑질 행위가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인 제도였다.

이번에는 참석한 협력 업체 관계자들 쪽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기자들은 이런 진혁의 발표를 데스크에 속보로 타전하고 열띤 취재 경쟁을 벌였다.

당장 진혁에게 기자 회견을 요청해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몇 달간 고생한 알라딘 직원들의 잔치였다. 망칠 수는 없었다.

물론 양심(?) 없는 열혈 기자들이 진혁에게 접근을 시도했지만, 김상균으로부터 엄명을 받은 시큐리티 직원들이 원천 봉쇄했다.

덕분에 진혁은 만찬장에서 편하게 직원들과 협력 업체 관계자들과 환담을 나눌 수 있었다.

점시 한가해진 틈을 타서 김선혁이 다가와 말했다.

“이런 어이없는 놈. 몰래 준비했다는 게 이거였냐?

“멋지지 않았습니까?”

“멋진 것 좋아하네. 주총에서 주주들을 설득할 걱정이 태산이다.”

관련법에 따라 상장 회사의 경우 진혁이 발표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이사회의 승인과 정기 주주 총회 의결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사회야 큰 문제가 없다지만 배당금이 줄어드는 것에 주주들이 반발할 수도 있었다.

진혁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동안 주가가 많이 올라서 이익을 봤잖아요? 그게 다 직원들과 협력 업체 노력 때문이니 당연히 나눠 줘야죠.”

“원래 가진 놈들이 더한다는 말이 있다.”

“반발하면 그냥 제 지분에서 나눠 준다고 하세요. 그만큼 시장에서 사서 채우면 되니까. 돈이건 지분이건 죽어서 가져갈 것도 아니고.”

“휴가 가서 쉰 게 아니라 도를 닦고 왔구나.”

“당분간 큰일은 없을 테니 회장님도 휴가 다녀오세요.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하하.”

큰 소리로 웃는 진혁의 모습에 김선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 발표만 해도 휴가를 떠나기 전까지는 일언반구도 없다가 돌아오자마자 지시하는 바람에 재무팀에서 준비하느라 고생깨나 했었다.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진혁의 분위기가 휴가를 다녀온 후로 변한 게 분명했다.

휴가지에서 뭔가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 TV는 물론 모든 매체가 진혁의 파격적인 결단을 크게 다뤘다.

당연히 호평일색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떠드는 소리에 신경 쓰지 않는 진혁은 회사와 가정에 충실하며 지냈다.

* * *

어느 날, 진혁이 강남의 한 일식집으로 들어갔다.

예약된 방으로 가자 손기성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코트라에 근무하면서 많은 도움을 준 고마운 이였다.

이집트의 사업을 성공할 수 있는 것도 그의 도움이 있어서였다.

거기에 방글라데시의 이영석, 베트남의 이용진도 그가 직접 전화까지 해서 부탁해 놓은 덕분에 좋은 인연을 맺게 됐었다.

몇 번이고 고마움을 표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업이 바쁘다는 핑계로 이제야 겨우 자리를 마련해서 미안함이 컸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좀 일찍 왔습니다.”

“아니, 왜 안 하던 존댓말을 하고 그러십니까?”

“온 국민이 다 아는 회장님이 되셨는데…….”

“회장은 뭐 선후배도 없답니까. 에이씨, 술맛 안 나게. 나 그냥 가렵니다.”

“하여튼 그 욱하는 성질머리 하고는.”

“맞습니다. 본부장님께 맨날 성질대로 한다고 혼나던 상사원 서진혁입니다. 그렇게 키운 후배한테 존대하시는 것은 아니지요.”

“알았다. 알았으니 그만하고 앉아라.”

진혁의 넉살에 손기성이 어쩔 수 없이 항복하고 하대를 했다.

음식이 나오고 식사와 겸한 술자리를 가지며 말을 나눴다.

“요즘 하시는 일은 좀 어떻습니까?”

“아주 죽을 맛이지. 세계가 화약고가 아닌 곳이 없어. 실적은 개판이고.”

“그래서 신 시장 개척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할 때입니다. 극동 쪽은 좀 알아보셨습니까?”

“거기도 만만치 않아.”

“쿠렌코 총리가 그쪽을 개발하겠다고 공표하고 자유항과 선도 개발 구역을 지정하며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다면서요?”

“맞아. 자유항은 블라디보스토크 항 포함 15개고, 선두 개발 구역도 9개나 지정했더라. 장기 임차에 법인세 감면 등 각종 혜택을 주며 기업 투자 유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고.”

“그럼 좋은 것 아닌가요?”

의아해하는 진혁에게 손기성은 냉정히 고개를 저었다.

“좋긴 하지. 지금까지 러시아 중앙 정부는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대표되는 서부 지역 중심으로 산업을 발전시켜 왔어. 그런데 유럽발 금융 위기로 그쪽 경제는 시름시름 앓고 있고, 반면에 아시아 경제는 빠른 성장세를 이루면서 상황이 역전된 거야. 쿠렌코 총리가 과감하게 방향키를 극동으로 돌린 거지. 그런데 이런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책정된 예산은 20억 달러가 전부야. 결국은 외국 자본으로 개발하겠다는 것이지.”

“그 정도 리스크는 어느 나라나 다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쿠렌코 총리는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이 해서 믿음이 전혀 안 가는 대표적 인물이거든.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약속하며 표를 호소해 놓고는 대통령과 총리로 자리만 바꿔서 24년째 장기 집권하고 있잖아.”

“중국이나 일본 업체 쪽에서는 적극적이라고 하던데요?”

진혁이 김타냐의 말을 떠올리며 묻자 이번에도 손기성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조사하고 놀랐다. 작년 기준 러시아 극동 지역 개발에 가장 관심을 가진 나라는 중국이더라. 외국 투자 자금 중 68%가 중국 자본이고, 이어 일본, 호주, 리투아니아 순이었어. 우리나라는 5% 미만이고. 하지만 그건 그들이 잘 몰라서 그래. 연해주에 제일 먼저 진출한 나라가 우리야. 국민의 정부가 햇볕 정책을 펼 때, 통일되면 거기가 뜰 거라고 생각해 진출했던 거지. 벌써 20년 전인데 살아남은 기업이 얼마나 되는 줄 아냐?”

“……?”

“하나도 없어. 모두 망해서 거지가 되어 도망치듯 빠져나왔어. 몇몇 남아있는 사람들도 돌아올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있는 거고.”

“전부 다요?”

“북한은 지원금만 받고 말을 바꿔 핵 개발을 계속하지, 러시아 정부도 약속을 안 지키기는 마찬가지고. 러시아 동업자도 투자는 안 한 채 지분이 많은 것만 내세워 사사건건 반대만 하고, 후진국 특유의 부정부패와 행정의 비효율성까지 더해지니 버틸 재간이 없지.”

모든 사회주의 국가가 그렇듯 러시아도 외국 기업이 50% 이상의 지분을 갖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러시아 동업자를 세워야 하는 데다 사회 전반이 자유 시장 경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니 사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진혁은 그제야 손기성이 왜 그토록 연해주 사업 진출에 대해 부정적인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누가 봐도 극동 진출은 접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먹을 때마다 꼭 다시 보자고 했던 김타냐의 얼굴이 떠올랐다.

잠시 흔들리던 진혁의 시선에 다시 힘이 들어가자 손기성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럼 그렇지. 네놈은 남이 안 된다면 더 하겠다고 달려들 놈이야.”

“죄송합니다.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아서요.”

“우리 사이에 러시아 시장에 대해 하는 말이 있어.”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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