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연해주의 가치
“되는 것은 없지만 안 되는 것도 없다. 그만큼 사업 외적인 변수가 많다는 말이지. 이왕 진출할 거면 제대로 알고 가라고, 그쪽에 대해 아는 사람을 불렀어. 거의 도착했을 거야.”
“어떤 분이신데요?”
손기성이 막 답변을 하려고 할 때 노크 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종업원의 안내로 들어왔다.
“어서 와.”
“내가 좀 늦었지.”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서 친한 사이임을 알 수 있었다.
“이쪽은 내 친구인 동북아역사연구소장. 그리고 여기는…….”
“서 회장님을 모르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지요. 김영복입니다. 눈치 없이 불청객이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앉으시지요.”
“네 부탁을 듣고 자료를 조사할 게 있어 이 친구 도움을 좀 받았는데 그 턱을 내라고 어찌나 우기던지, 오라고 했어. 극동 지역에 대해서는 나름 조예가 깊으니 알고 지내면 나쁘지 않을 거야. 괜찮지?”
“괜찮다마다요. 그렇지 않아도 선배님뿐만 아니라 그쪽 전문가도 찾아뵈려고 했는데 오히려 잘됐네요.”
“전문가는 아니고 고대 역사에 대해 연구하다 보니 그쪽에 관심을 갖게 되어 좀 더 알고 있는 것뿐입니다.”
자리에 앉아 새 잔에 술을 채워 주자 김영복이 말했다.
“제가 정치역사학 전문이라 사업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회장님께 극동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대해 꼭 말씀 드릴 게 있습니다.”
“뭐든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진혁의 허락이 떨어지자 잔을 비운 김영복이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쿠렌코 총리의 극동 개발 계획 발표와 자유항 지정은 중국의 경제력 확대를 견제하는 동시에 미국의 군사력 확대를 차단하겠다는 복안에서 출발합니다. 그 전에 먼저 동북아 지역의 국가별 정치적 구도를 먼저 이해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
“동북아 지역의 국가 전략은 중국이 먼저 시작했습니다. 동서경제벨트는 해상만 국한한 게 아닙니다. 대규모 인프라 사업을 통한 신규 투자 수요를 창출하고 중국 중서부 지역 개발을 통한 신 성장 거점을 마련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저도 좀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응하려고 쿠렌코 총리가 신 동방 정책을 들고 나온 겁니다. 신 동방 정책은 극동 바이칼 지역의 사회 경제 발전 계획으로, 극동 개발부를 신설하고 유라시아 경제 연합(EEU) 결성 등을 통해 아태 지역 국가들과 경제 협력을 강화하고 있겠다는 겁니다.”
“그렇군요.”
“일본의 전략은 중앙아시아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농업, 방재, 여성의 역할 확대, 마약 대책, 국경 관리, 분쟁의 평화적 해결, 군축과 비확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진혁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미국은 신 실크로드 전략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정세 안정을 위해 주변 국가인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5개국과 인도, 파키스탄 등의 물리적 연계성을 확보해 통상과 교류 등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관여된 겁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인도 역시 중앙아시아 5개국과 정무, 안보를 비롯해 에너지와 자원, 보건과 교육 및 문화, 인적 교류, 정보 통신 등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몽골도 동북아 경제권에 참여하기 위해 주변국과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관여되지 않은 나라가 없군요.”
“그만큼 동북아시아, 그중에서도 극동 연해주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높다는 반증이지요.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 패권에 도전하려는 중국, 패권의 재기를 노리는 러시아, 패권의 부활을 꿈꾸는 일본 등 주변 열강들 모두가 극동을 노리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판이 커지는 느낌에 진혁의 얼굴도 굳어졌다.
“쿠렌코 총리의 블라디보스토크 자유항 지정은 중국 자본에 대한 입장을 급선회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중국 자본을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 등 역내 국가들의 자본을 적극 끌어들이겠다는 구상입니다.”
“우수리스크 지역에 중국 자본이 많이 들어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중국에게 러시아의 안방까지 내주지는 않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나진-하산 프로젝트인데, 이는 화물 터미널과 화물 열차를 확보해 나진항과 시베리아 횡단 철도(TSR)를 연계하는 유라시아 복합 물류 운송 사업을 완성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왜 중국과 관계가 있습니까?”
진혁이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을 보이자 김영복이 풀어서 설명했다.
“나진-하산 프로젝트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남북러 간 복합 물류 운송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중국의 동해 출항을 저지하려는 러시아의 정치적 의도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안방은 내줄 수 없으니 사용료를 내고 경제적 이익을 얻으라는 포석이지요. 중국도 이에 대응해 2011년 훈춘-나진항 고속도로를 개설했습니다. 이어 2013년 러시아와 중국은 하산과 훈춘을 잇는 중러 국경 철도를 재개통해 북중러 간 접경 지역 도로, 철도망을 구축했고요.”
“치열하군요. 일본은 어떻습니까?”
“일본은 러시아와 쿠릴 열도 네 개의 섬을 둘러싼 영유권 분쟁을 겪고 있습니다. 이를 대규모 경제 협력 카드로 풀겠다는 복안입니다. 아울러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탈원전 정책에 따라 부족해진 에너지를 러시아 극동 개발 전략으로 유지하고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군요.”
진혁의 수긍하는 모습에 김영복이 오늘 찾아온 목적을 말했다.
“이처럼 현재 세계 경제의 중심축이 동북아로 이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중에서 극동 지역은 경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터인 동시에, 세계 정치 패권을 둘러싼 강대국 간 힘겨루기 현장이 되고 있습니다.”
“소장님 말씀 덕분에 그 지역이 매우 중요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주변국은 이처럼 적극적인데, 대한민국은 국가 차원의 전략이 부재한 가운데 기업들이 과거의 실패를 두려워해 소극적입니다. 회장님이라도 나서 주셔야 합니다.”
김영복의 청에 진혁이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다른 나라 기업들은 국가적인 전략하에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추진하고 있는데, 자신은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열악했다.
그렇다고 정부에 요청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지금은 남북 경제 협력이라는 단군 이래 최대의 프로젝트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모두가 합심해 달려들어도 쉽지 않은 상황인데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 같았다.
진혁의 고민이 길어지자 김영복이 다시 말했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한민족의 영토 회복을 위해서도 그 지역의 진출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영토 회복요?”
“한민족이 세운 최초의 국가가 고조선입니다. 만주와 발해만 일대, 그리고 한반도에 결친 넓은 영토를 통치해 왔습니다. 주 무대가 대륙이었습니다. 그걸 고구려가 계승한 것이고요. 그런데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영토가 줄었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역사 계승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역사 왜곡이 심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는 남북 분단으로 대륙 진출이 막히자 해상 진출에 집중하느라 무관심했던 탓이 큽니다. 그래서 극동 지역 진출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두만강 하구에 가 보면 중국이 동해로 나가는 길이 막혀 있습니다. 중국은 이곳을 통해 동해로 나가려는 욕망이 아주 강합니다. 동해가 보이는 땅에 ‘망해각’이라는 정자를 지어 놓을 정도니까요. 러시아도 성장 동력을 극동에서 찾으려고 혈안입니다. 더 이상 우리 한민족의 영토를 이민족이 차지하게 둘 수는 없습니다. 회장님이 극동 진출을 통해 잃어버린 한민족의 역사를 되찾아 주십시오.”
김영복의 마지막 말에 진혁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이 찾던 극동 진출의 이유가 그의 말 속에 담겨 있었다.
진혁이 집에 돌아온 시간은 늦은 저녁이었다.
이후에도 김영복과 한민족의 역사에 대해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의외로 시간이 길어졌다.
가방을 받으며 지민이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피곤해 보여요.”
“생각보다 일이 커질 것 같아. 희준이는?”
“지현이랑 안에서 책 보고 있을걸요.”
“책?”
희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우리가 연해주에 대해 알고 가는 게 좋다고 바람 넣었잖아요.”
“아하!”
진혁은 희준에게 블라디보스토크에 휴가를 가려면 알고 가는 게 좋을 것이라고 했었다.
물론 지민도 동생 지현에게 같은 말을 했었다.
그때는 단순히 김타냐 같은 고려인들을 도울 방법을 찾으려고 한 건데, 지나고 보니 의외로 중요한 일이 됐다.
지민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나오시라고 할까요?”
“아니. 간단하게 끝날 이야기가 아니니 나중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아이들은?”
“혜성이가 당신 안 온다고 칭얼거리다가 이제 막 잠이 들었어요.”
“내일은 일찍 들어와서 놀아 줘야겠네. 고생했어.”
지민을 가볍게 안아 줬다.
* * *
다음 날.
진혁이 청와대에 들어가자 이현국이 칭찬부터 했다.
“서 회장님 덕분에 어려운 숙제가 해결됐습니다.”
“……?”
“‘성과공유제’를 자발적으로 시행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정부에서 그렇게 독려해도 꿈쩍도 안 하던 기업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진혁이 동행 한마당 결산 보고회에서 발표한 ‘성과공유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전에 정부 차원에서 진행했는데, 이익을 공동 분배한다는 것 자체가 시장 경제 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반발에 직면했었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재계와 정치권 일부로부터 비난이 빗발치자 흐지부지됐던 정책이었다.
그런데 진혁이 시행을 전격 발표한 이후로, 같은 생각을 하던 몇몇 기업들도 따라서 도입하겠다고 발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알라딘의 재정 여건이 좋아서 시행한 것뿐입니다. 현재 많은 기업들이 세계 경기 하락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정부에서 강제하는 것보다 각 기업의 상황에 따라 자발적으로 시행하게 두시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일부 참모들이 이번 기회에 법제화해서 밀어붙이자는 걸 막았습니다.”
“잘하셨습니다. 기업이 본연의 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정부는 간섭을 최소화하는 게 중요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만 일부 기업가들의 일탈 행위로 국민의 여론이 악화된 상황이라 무조건 모른 척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관련법에 따라 철저하게 조사해서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하지만, 기업가 전체를 매도하는 분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알겠습니다. 그것보다 이번 방북 행사에 서 회장님도 동행하셔야겠습니다.”
이현국의 말에 진혁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6자 회담 후 열린 남북 실무자 회의에서 남북 회담을 일주일 후 평양에서 열기로 합의했었다.
하지만 진혁은 미국의 눈을 속이기 위해 북한으로부터 강제 추방 된 것으로 소문이 나 있는 상황이었다.
진혁이 물었다.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나도 같은 생각인데, 윤호열 주석께서 비선을 통해 서 회장님이 꼭 오셨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달했습니다.”
“그래요?”
“긴히 할 말씀이 있다고 하셨답니다.”
“음…….”
“혹시 짐작되시는 게 있으십니까?”
“아니요. 전혀 없습니다.”
“만나서 말씀을 들어 보면 알겠지요. 아무튼 회장님도 동행하시는 것으로 발표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도 준비하겠습니다.”
청와대를 나서는 진혁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윤호열이 계획을 바꿔 자신에게 직접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 * *
일주일 후.
총 200여 명으로 구성된 남북 정상 회담 수행단을 태운 전세기가 남한의 성남 비행장을 출발해 북한의 순한 공항에 도착했다.
윤호열 주석이 직접 나와 비행기에서 내리는 이현국 대통령과 포옹하는 모습이 전 세계에 생중계로 방영됐다.
서로 악수를 나눈 후에 북한군은 육해공군 의장대와 군악대를 사열하고, 분열까지 했다.
더욱이 사열하는 동안 예포까지 쏠 정도로 극진한 예우를 했다.
순안 공항에서 숙소인 백화원영빈관으로 향하는 거리마다 수많은 인파들이 나와 한반도기와 인공기, 붉은 조화를 흔들며 11년 만에 평양을 찾은 한국 대통령을 환영했다.
정상 회담은 이례적으로 오찬 후 바로 진행됐다.
진혁은 경제인 대표단에 포함되어 내각 부총리로부터 남북 경협에 대한 북한의 계획에 대해 들었다.
정상 회담 종료 후 평양대극장에서 삼지연관현악단의 예술 공연 관람 후 환영 만찬이 열렸다.
일은 그곳에서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