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남북 정상 회담
진혁은 오랜만에 만난 TG그룹 주명근 명예 회장과 술을 곁들여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북한 지도자에게 대들었다가 불경죄로 강제 추방된 서 회장이 이번 수행단에 포함될 줄은 몰랐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을 텐데 말이오.”
“그만큼 북한의 경제 개발 의지가 절박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혹시 몰라 이렇게 눈에 띄지 않게 뒤에 물러나 있는 겁니다.”
“낭중지추라고, 이렇게 뒤에 있다고 존재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다들 서 회장에게 오고 싶어 하는 눈친데 나 때문에 못 오는 것 같아.”
“그럴 리가요. 회장님께 인사드리고 싶은데 저 때문에 못 오는 거겠지요.”
농담을 이어 가던 주명근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서 회장이 보기에는 남북 경협이 이뤄질 거라고 보는가?”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그간 북한의 말 바꾸기가 한두 번이 아니어서 말이야.”
“윤호열 주석의 의지가 대단합니다. 이번은 믿으셔도 될 겁니다.”
“서 회장이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렇게 되겠지. 알겠네. 돌아가면 좀 더 적극적으로 준비하라고 해야겠네.”
주명근은 진혁이 앞으로 대한민국의 재계를 이끌어갈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던 이였다. 그만큼 믿음이 컸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을 때 앞쪽 테이블에서 큰소리가 났다.
“지금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갑니까?”
이곳과는 달리 그 테이블에는 남북한 관계자가 함께 함께 앉아 있었다.
정진호 태후 그룹 회장이 경제인연합회 회장 자격으로 임원들과 앉아 있었다.
그들을 향해 정색한 표정으로 일갈한 이는 공산당 중앙위원 안광천이라는 자였다.
갑작스럽게 터진 호통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벌게진 얼굴로 변한 경제인연합회장단 일행에게 안광천이 다시 호통을 쳤다.
“남조선에 실업자가 넘쳐난다는데, 북남 경협을 서둘러야지 왜 미적거립니까!”
경협에 속도를 내 달라는 말이었지만 그 언행이 도를 넘어섰다.
하지만 누구도 나서서 반박하지 못했다. 양국 정상이 참석한 역사적인 자리라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그때 앞자리의 주명근 명예 회장이 분기탱천한 얼굴로 옆에 놓은 지팡이를 잡는 모습에 진혁이 얼른 말했다.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진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쪽으로 갔다.
“지금 당신이 한가하게 여기서 술주정이나 부릴 때요?”
“뭣이?”
“경제 제재로 인민들이 굶어 죽고 탈북자가 넘쳐나고 있어요. 지금 당장이라도 풍계리 핵 시설 폐쇄부터 하세요. 그럼 어련히 알아서 경제 개발을 시켜드릴까.”
“이런 종간나 반동……!”
“그만하시지요.”
일촉즉발의 순간 각이 선 군복을 차려입은 이가 어느새 다가왔다.
호위총국장 정달영.
윤호열의 지도자 등극 이후 숙청을 진두지휘한 저승사자였다.
찍소리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안광천의 비굴한 행동에 진혁이 한 소리 더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어깨를 누르는 손이 있었다.
“자네도 그만하게.”
김세동도 같이 와 있었다.
“송구스럽습니다.”
정달영의 90도 인사에도 진혁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저자가 다시는 내 눈앞에 보이지 않게 하시오.”
진혁이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안광천을 다시 한번 노려보고 자리로 돌아왔다.
주명근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 회담은 좀 부드럽게 진행되겠군, 초장에 기를 꺾어 놨으니.”
“회담뿐만 아니라 경협도 잘될 겁니다, 저런 건방진 자만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날 만찬은 남북한 관계자 모두에게 진혁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자리가 됐다.
진혁이 윤호열에 밉보여 추방당했다는 말은 다 헛소문이었다.
실제로 안광천은 그날 이후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 *
다음 날도 양측 정상은 오전에 정상 회담을 이어 갔다.
이어 두 정상은 공동 기자 회견을 통해 비핵화 등 군사적 긴장 완화 조치는 물론 철도, 도로 구축 등 남북 경제 협력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된 ‘평양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오후에는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참관, 분야별 소모임에 이어 평양 5.1 경기장에서 집단 체조 및 예술 공연 관람이 있었다.
관람 도중 진혁이 중간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일어났다. 대기하고 있던 리진수를 따라가자 윤호열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혁이 앞에 앉자마자 윤호열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우리 계획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소.”
“뭡니까?”
“미국이 러시아에 대한 작전도 진행 중이라고 하오.”
진혁의 눈이 커졌다.
두 사람이 세운 계획은 러시아를 적극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미국과 중국은 기본적으로 한반도가 지금의 상태로 나뉜 채로 서로 적대하며 자신들의 하수인으로 남기를 바라고 있었다.
일본 역시 그런 정책에 동조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러시아만이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극동 개발을 이루기 위해서는 북한의 나진항, 남한의 자본과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쿠렌코 총리의 목표는 미국과 중국이지 한반도가 아니었다.
진혁이 물었다.
“어떤 작전인지도 들으셨습니까?”
“그것까지는 말을 하지 않았소. 다만 쿠렌코 총리가 자국 경제에 신경 쓰기도 벅찰 거라며, 스스로 북한에 대한 기득권을 포기할 거라고만 했소.”
윤호열이 카이저와 나눈 대화를 상세히 들려줬다.
다 듣고 난 진혁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제가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주석께서는 IAEA 사찰과 남북 경협에만 신경 써 주십시오.”
“알겠소. 서 회장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오?”
“쿠렌코 총리가 추진하는 극동 개발에 참여해 볼까 합니다.”
“극동 개발에요?”
“그 계획이 성공하려면 북한의 나진항은 무조건 필요합니다.”
“그건 그렇지요.”
“우리가 그걸 주도적으로 이끄는 것이 남북 경협을 넘어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길인 것 같습니다.”
“압니다만, 쿠렌코 총리는 만만치 않은 사람입니다. 거기에 다른 국가들은 국가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데 혼자서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윤호열이 우려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할 수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조건 해야 하는 사업입니다. 일단 제가 시작해 보고 도움이 필요하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한꺼번에 일이 터지니 신경 쓸 일이 무척 많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남북한이 서로 믿고 합심해야 주변국의 압박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잘 압니다만, 어제 저녁 만찬장에서도 봤듯이 공화국에 아직도 안광천 같은 자들이 남아 있는 것도 현실이오.”
“고름은 둔다고 살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성과가 없다 보니, 일부 불순한 생각을 가진 자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번 회담을 기점으로 남북이 합심해서 경제 개발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우선 즉시 실현이 가능한 개성공단 재가동과 금강산 관광 재개부터 하시지요. 거기에 이산가족 상봉 정도만 실현돼도 불만은 사라질 겁니다. 그러니 걱정 마시고 처음 생각대로 밀어붙이십시오. 남북 경협은 제가 제일 앞에 서서 추진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서 회장님을 믿고 가지요.”
윤호열이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의지를 보였다.
* * *
다음 날은 딱딱한 일정 없이 중앙식물원을 관람한 뒤 오전 11시경 평양 국제공항을 출발해 성남 서울 공항으로 귀국했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진혁은 다시 외국 여행길에 올랐다. 표면적인 이유는 알라딘 지사 방문이었지만 속내는 따로 있었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인도의 만길라 총리는 얼굴이 활짝 펴 있었다.
미중 무역 전쟁 여파로 세계 증시가 맥을 못 추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인도 증시만 홀로 사상 최고치 경신을 지속하고 있어서였다.
“축하드립니다, 총리님.”
“고맙습니다. 알라딘에서 주관하는 벵갈루루 스마트 시티가 멋지게 건설되고 있다는 보고는 받았습니다. 다른 곳의 주택 건설 사업도 잘 진행되고 있다면서요?”
“모두가 총리님께서 신경 써 주신 덕분입니다.”
진혁은 최대한 자세를 낮춘 채 만길라의 비유를 맞췄다.
만날 때마다 투자 이야기부터 꺼냈던 만길라였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가 추진했던 화폐 개혁을 통해 조세 수입을 늘렸고, 이를 통해 제조업 육성 기반이 되는 인프라에 투자했던 것이 서서히 성과를 내고 있었다.
내년 총선에서 연임 가능성도 높아 정책의 연속성 측면에서도 긍정적라는 평가를 받고 있어 외국 기업들의 투자가 줄을 이었다.
만길라 총리가 물었다.
“서 회장도 투자를 위해 찾아오신 것이요?”
“좋은 투자처만 있다면 얼마든지 투자할 용의가 있습니다만, 오늘은 여쭤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뭡니까?”
“최근에 중앙아시아에 투자를 집중하시고 계시는데 그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거야 중국의 동서경제벨트 때문이지요. 잘 알겠지만 중앙아시아는 석유와 천연가스뿐만 아니라 우라늄 등 광물 자원이 풍부합니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경제 성장으로 항상 에너지가 부족한 실정이고요.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을 위해 그들과의 교류가 절실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국경을 접한 중국에 비해 인도는 파키스탄으로 가로막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중앙아시아 5국과 러시아, 아제르바이잔이 참여하는 ‘국제운송회랑(INSTC)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만 완성되면 중국과 파키스탄의 간섭을 받지 않고 중앙아시아로부터 직접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에너지 확보는 국가 안보를 지키는 데도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바로 이것이었다.
진혁은 쿠렌코 총리의 극동 바이칼 지역경제사회 발전 프로그램을 조사하면 할수록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도저히 시행할 수 없는 파격적인 혜택들이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겼다.
단순히 극동 지역의 낙후된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래서 찾아온 건데, 바로 해답을 찾았다.
에너지 보급로를 확보하겠다는 전략의 일환으로 극동 개발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그런 진혁의 속마음을 모른 채 만길라 총리가 물었다.
“서 회장도 이 일에 관심이 있습니까?”
“당연하지요. 사업도 결국 자원을 얼마나 확보하느냐의 싸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럼 잘됐네요. 지난번 쿠렌코 총리를 만났을 때 조만간 2차 ‘야말 LNG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우리보고 투자라고 하더군요. 1차 때 한국은 지분을 받지 못하는 대신 LNG를 수송하는 쇄빙선 15척을 전량 수주했지요.”
“총리께서도 투자하실 생각이십니까?”
“원래는 그럴 계획이었는데 미국이 반강제로 셰일 가스와 오일을 떠넘기는 바람에 접었습니다.”
“셰일을요?”
갑자기 튀어나온 용어에 진혁은 다시금 놀란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셰일은 오랜 세월 동안 모래와 진흙이 쌓여 단단하게 굳은 탄화수소가 퇴적암(셰일)층에 매장된 것을 칭하는 용어였다.
2013년 중동 지역 정세 불안으로 국제 유가가 100달러에 이르는 고유가 시대가 도래하자 미국은 본격적인 셰일 에너지 개발에 착수했었다.
이에 석유 개발 기구는 자신들의 지위가 위협받는다고 느껴 가격을 낮춰가면서까지 전쟁을 벌였다.
그로 인해 미국의 셰일 오일 업체들은 재정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신기술 개발로 생산 비용을 크게 낮추면서 살아남아 에너지 전쟁에서 승리했다.
“셰일 에너지 생산 국가는 미국만이 아닙니다. 중국도 생산을 시작했어요.”
“중국도요?”
“셰일 가스와 셰일 오일 최대 매장국은 미국이 아니라 중국입니다. 미국 에너지정보국(EIA)에 따르면, 중국의 채굴 가능한 셰일 가스 매장량은 36조 1천억 제곱미터로, 미국 매장량 24조 4천억 제곱미터의 약 1.5배에 달해 세계 최대의 규모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대단하군요. 그런데 왜 그동안 개발을 안 하고 수입에 의존한 겁니까?”
“중국의 셰일 가스 매장 지역의 지질 조건이 복잡하고, 매장층이 깊어 개발비가 많이 듭니다. 거기에 시추 과정에서 토양과 지하수 오염 문제가 심각하고요. 그런 이유로 그동안 개발을 안 했는데 미중 무역 전쟁으로 미국산 석유 제품의 수급에 문제가 생기면서 개발에 나선 겁니다. 물론 거기에는 최근의 고유가 영향도 크게 작용했고요.”
“그럼 미국이 난감해지겠는데요.”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이어진 만길라의 설명에 진혁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셰일 에너지 개발에는 엄청난 음모가 숨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