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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280화 (280/307)

280화. 빅브라더

“셰일 에너지를 양산하면서 현재 세계 산유국 1위가 미국입니다. 미국은 이제 중동산 석유에 목을 매달지 않아도 되게 됐습니다. 이는 유가 흐름을 OPEC가 아닌 미국이 주도하게 됐다는 의미입니다.”

“……!”

“‘미국제일주의’의 대표적인 정책이 바로 ‘미국 우선 에너지 계획’입니다. 조만간 그동안 비축한 셰일 에너지를 수출로 풀겠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되면 고유가는 더 이상 이어지기 힘들 겁니다. 이는 독자 기술을 확보한 미국과는 달리 생산비 비중이 높은 중국 셰일 에너지 기업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할 겁니다. 생산할수록 손해가 나는 구조라 버텨내지 못할 겁니다.”

진혁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만길라 총리는 중국만 거론했지만 카이저는 더 나아가 러시아도 노리고 있었다.

러시아는 세계 최대 천연가스 수출국이었다. 셰일 가스 수출로 쿠렌코 총리까지 궁지로 몰아넣겠다는 계획이다.

생각지 못한 큰 정보를 얻었다.

마음이 급해진 진혁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둘러 일어나 나왔다. 미국의 전략을 알았으니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게 시급했다.

* * *

진혁이 인도에 있던 시각.

미국 워싱턴의 한 호텔에서 뉴트가 세 명의 노인을 만나고 있었다.

“고유가에 대한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2014년의 100달러 시대를 생각하면 아직도 한참이나 멀었습니다.”

“그때는 지금이랑 사정이 많이 다릅니다. 중국과의 무역 전쟁으로 내수경기가 가라앉고 있어요.”

“많은 가문의 가족들이 어려운 시절은 보내면서 희생됐습니다. 그들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논쟁을 하는 이는 셰일 에너지 기업 아드모르의 앤서니 회장과 미국의 중앙은행 격인 연방준비제도(FED)의 녹스 의장이었다.

각기 록펠러 가문과 로스차일드 가문을 대표해서 이 자리에 참석해 있었다.

거기에 베어링 가문에서는 ‘카지노월드’의 슈왑 회장이 나왔다.

빅브라더로 명명되는 미국을 움직이는 힘.

유대 자본의 핵심 가문 멤버들이었다.

그냥 두면 끝없이 논쟁이 이어질 것 같아 뉴트가 나섰다.

“아버지께서 더 이상 고유가를 방치하실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건 약속과 다르지 않느냐?”

앤서니가 당장 으르렁거렸다.

카이저의 당선에는 텍사스, 노스다코타, 오클라호마의 공화당 지지가 결정적이었다.

모두 셰일 에너지의 주 생산지들이었다.

“곧 중간 선거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패배하면 약속을 지키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

뉴트의 냉정한 말에 앤서니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고유가는 필연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이는 서민들의 삶을 힘들게 한다.

집권당으로서는 득이 되는 상황이 절대 아니었다.

뉴트의 말이 이어졌다.

“무엇보다 고유가로 인해 중국도 셰일 가스를 본격적으로 생산을 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놈들은 아직 기술이 부족해서 채굴 비용이 높아.”

“그래서 왕칭린이 보조금을 지급한다고 합니다. 그런 자신감 때문에 무역 전쟁에서 우리나라 석유 제품에 대한 수입 중단 카드를 꺼내 든 겁니다. 거기에 천연가스 값마저 뛰어 쿠렌코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렸던, 에너지를 이용해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계획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시선을 멀리 둬요, 앤서니. 끝없이 오르고 끝없이 내리는 것은 없습니다. 이번은 양보하고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올립시다.”

재빨리 끼어들어 거드는 녹스를 바라보는 앤서니의 눈빛이 살벌했다.

비록 유대 자본으로 함께 동조하고 있지만 각기 에너지, 금융을 장악하며 경쟁 상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고유가를 포기하는 분위기였다.

수긍하려던 앤서니가 내내 침묵만 지키고 있는 슈왑 회장을 보고 물었다.

“베어링가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중간 선거 승리를 위해서 유가가 내려가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베어링가까지 그렇다니…….”

“그렇다고 록펠러 가문이 무조건 손해를 봐야 하는 구조는 온당치 않습니다.”

“……?”

“그 점에 대해서는 뉴트가 준비한 게 있다고 하니 들어봅시다.”

공을 넘겨받은 뉴트가 녹스를 보고 말했다.

“유가 하락에 따른 주식 시장의 이득을 로스차일드 가문이 독식하는 것은 안 됩니다.”

“아니, 그것은…….”

“우리들은 그간 각 가문이 자신들의 영역을 고수한 채 미국을 지배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세계 경기 부침에 따라 각 가문에 돌아가는 부가 불균등하게 배분된다는 문제점이 발생했습니다.”

“그건 운영 능력의 문제지, 영역 구분의 문제가 아니잖아?”

“그럼 록펠러 가문이 경영 다각화라는 명분으로 금융업에 진출하시는 것을 허락하시겠습니까?”

녹스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뉴트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온갖 비난을 받아가면서도 각종 규제를 철폐해 빅브라더가 원하는 대로 산유국 1위에 올라서게 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더 이상 OPEC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에너지 패권을 쥐었습니다.”

“…….”

“저유가로 왕칭린과 쿠렌코의 야욕을 꺾어 더 이상 우리에게 도전하지 못하게 확실히 기를 죽여야 합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미국에 반발하는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도 어떤 정책을 펴느냐에 따라 각 가문의 사업은 큰 영향을 받게 될 거고, 그때마다 오늘처럼 서로 얼굴을 붉히며 논쟁을 벌이는 일이 반복될 겁니다. 이는 조직의 단결에 해가 됩니다.”

“그래서 네 계획이 뭐냐?”

“가문 공동의 펀드를 만들어 그 수익을 나누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관리는 이해관계가 없는 베어링 가에 맡기는 게 좋겠고요.”

“난 찬성.”

앤서니가 재빨리 화답했다. 그로서는 반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받아들이마.”

녹스는 이를 갈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앤서니는 물론, 제안한 뉴트나 큰 역할을 맡게 된 슈왑까지.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다.

여기서 반발하면 앞으로 계획에서 영원히 제외될 수도 있었다.

얼마간 더 뉴트의 제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녹스가 제일 먼저 떠났다.

그다음에는 앤서니가 활짝 핀 얼굴로 일어났다.

슈왑과 둘만 남자 뉴트가 양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두통이 몰려왔다.

“많이 아프냐?”

“참을 만합니다. 고집불통 노인들을 상대하느라 힘들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미국의 역사와 함께 이어져 온 전통인데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지.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지금처럼만 하면 네 아버지를 이어 네가 백악관의 주인이 되는 날, 모든 가문을 발아래 둘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장인.”

슈왑의 두 번째 부인에게서 난 딸이 뉴트의 아내였다.

그런 인연을 이용해 뉴트가 유대 자본의 지지를 이끌어 냈기에 카이저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카이저가 뉴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때문이기도 했다.

슈왑이 물었다.

“공격은 언제 할 것이냐?”

“우리의 관세 공격에 다급해진 왕칭린이 쿠렌코에게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 둘이 손을 맞잡고 웃는 순간 지옥을 맛보게 해 줄 겁니다. 준비하고 기다리시면 제가 때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알겠다.”

뉴트는 철저했다. 아무리 장인이지만 모든 것을 다 말해 주지는 않았다.

* * *

휴가를 다녀온 희준은 진혁이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으르렁거렸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데 쳐들어와 따지듯 물었다.

“너, 이씨, 일부러 그런 거지?”

“내가 뭘?”

“극동의 역사를 공부하고 가라고 한 것 말이야.”

왜 이러는지 충분히 짐작이 되기에 진혁이 웃으며 물었다.

“김타냐 할머니는 만나 봤어?”

“그래. 참 안타깝고 미안하더라.”

희준이 언제 화냈냐는 듯이 어두운 얼굴로 앞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솔직히 나는 그간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어. 근데 이번 여행에서 그게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이었는지 알게 됐다. 경제력이 높아지면 뭐 해. 내 동포는 그 추운 곳으로 쫓겨 가서 힘들고 어렵게 살고 있는데.”

“맞아. 내 가족, 내 나라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그게 누군가가 희생한 대가라면 절대 기쁠 것 같지 않아. 특히나 동포라면 더더욱.”

“그래서 네 계획이 뭔데?”

오랜 기간 봐 온 친구라 확실히 달랐다. 희준이 바로 핵심을 찌르고 들어왔다.

진혁도 표정을 진지하게 하고 답했다.

“러시아가 추진하는 극동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할 생각이다.”

“남북 경협은 어떻게 하고?”

“그 일과 이 일은 밀접한 관련이 있어. 그리고 경협은 추진할 사람이 많지만, 러시아 일은 우리가 아니면 아무도 나서지 않을 거야.”

“그건 그렇지. 경협이야 양국 정부가 나서서 추진하는 일이니 누워서 떡 먹기지만, 러시아의 일은 하나에서 열까지 직접 챙겨야 할 테니까. 아이고, 고생길이 훤하네.”

“그럼 눈 딱 감고 우리도 편하게 갈까?”

“이걸 확. 나도 너처럼 타냐 할머니에게 꼭 돌아온다고 약속했단 말이야. 뭐부터 해?”

“자료 조사부터 해야지.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큰 계획이 될 거다. 그러니 철저히 준비해야지.”

“알았어. 나는 나대로 준비할게. 그런 다음 서로 맞춰 보고 보완하자.”

“오케이.”

진혁이 동의하자 희준은 서둘러 일에 착수하려는 듯 바로 일어나 나갔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것 같아 진혁도 든든했다.

희준은 행동이 덜렁대기는 하지만 맡겨진 일은 확실히 처리하는 꼼꼼함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이후 두 사람은 각자 극동개발 전략을 짜느라 정신없이 지냈다.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지민과 지현 자매도 의기투합해 고려인을 돕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느라 머리를 맞댔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때 아닌 공부 경쟁이 벌어졌다.

각자 책과 인터넷을 통해 수집한 자료를 가지고 모여 토론하며 계획을 세워 갔다.

갑작스럽게 조성된 면학 분위기에 긍정적인 효과가 여럿 나왔다.

우선 진혁과 희준의 퇴근 시간이 빨라졌다.

거기에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지 모르던 아이들도 덩달아 책을 보기 시작했다.

물론 덕분에 장모인 박연심이 고생했지만 그건 두둑한 용돈으로 해결했다.

그렇다고 진혁이 마냥 극동 개발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TG그룹 본사를 찾아갔다.

주명근 명예 회장이 주경운 회장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늙은이가 건강해서 뭐 하게. 미래를 짊어질 서 회장 같은 사람들이 아프지 말아야지.”

“늙은이라니요. 평양에서 지팡이 잡으시던 모습을 보니 아직 정정하시던데요.”

“사람 실없기는. 언제 적 이야기를 하고 있어. 일단 앉자고.”

자리에 앉아 비서가 차를 내놓고 돌아가자 주명근이 물었다.

“무슨 일인데 뒷방이나 지키는 이 늙은이를 나오라고 한 건가?”

“오전에 청와대에 다녀왔습니다. 대통령께서 남북 경협 위원장을 저보고 맡으라고 하시더군요.”

“당연한 말씀이시네. 현재 한국 재계에서 그런 큰일을 맡아 추진할 수 있는 이는 서 회장밖에 없어.”

“전 그 자리를 회장님이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서 회장은?”

“전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진혁은 러시아의 극동 개발 계획에 대해 알렸다.

“따라서 저는 그쪽 일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듣고 보니 극동 개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군. 이해하지만…… 그렇더라도 경총이 있지 않은가?”

“그날 보셨듯이 경총이 북한을 상대하는 것은 역부족입니다. 괜히 나섰다가 자기 그룹이 피해를 보는 게 아닌가 해서 당하고만 있었던 겁니다.”

“나라고 다를까.”

“이번 경협은 한민족 모두가 그토록 염원하던 역사적인 과업입니다. 어느 개인, 어떤 집단의 이익이 끼어드는 순간 무조건 실패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민족과 한반도의 발전만 바라봐야 합니다. 그럴 분은 회장님밖에 없으십니다.”

진혁의 마지막 말이 오히려 주명근의 결정을 어렵게 했다.

엄청난 혜택이 돌아가는 자리였다.

평소라면 먼저 자청해서 한다고 했을 터였다.

하지만 진혁의 말대로 한민족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 큰일을 자신이 무사히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주명근의 고민이 길어지자 진혁이 폭탄선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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