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먼저 치다
“제가 먼저 알라딘의 모든 것을 내놓겠습니다.”
“……?”
“어떠한 조건도 걸지 않고 그룹의 모든 가용 자원을 회장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가져다 쓰실 수 있게 조치하겠습니다. 설혹 대가 없이 지원만 하라고 해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말인가?”
“엄청난 자금과 인력이 투입되는 일입니다. 이 일이 성공한다면 그 효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클 겁니다. 전 당장 눈앞의 이익이 아니라 그다음을 보고 있습니다. 반쪽짜리가 아닌 하나 된 한반도가 세계 경제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전 그때 크게 먹겠습니다. 하하.”
진혁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지 큰 소리로 웃었다.
그 모습에 주명근도 마음을 굳혔다.
“알겠네. 내가 맡지.”
“감사합니다.”
“대신 서 회장도 옆에서 많이 도와줘야 해.”
“당연히 그렇게 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극동 개발을…….”
“그 일도 만만치 않을 거라는 것은 아네. 하지만 남북 경협과도 상호 연관된 부분이 많으니, 어느 한쪽에서 문제가 생기면 다른 쪽도 어려워져. 전체를 조율할 이는 서 회장밖에 없어.”
“…….”
“TG도 모든 것을 내놓겠네. 남북 경협뿐만 아니라 극동 개발을 위해 언제든지 필요하면 가져다 쓰게. 다 같이 합심해서 반드시 민족의 염원을 이뤄 보세.”
“고맙습니다. 회장님과 함께 꼭 성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진혁은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에 뿌듯함을 느꼈다.
* * *
이틀 후 청와대의 발표가 있었다.
남북 정상 회담의 후속 조치로 남북경제협력위원회를 신설한다는 게 주요골자였다.
당연히 서진혁이 맡을 것이라는 위원장 자리에 은퇴한 주명근이 앉은 것을 제외하고는 예상대로였다.
재계와 국민들의 시선이 남북 경협에 쏠려 있는 사이 진혁은 희준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다시 찾았다.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동방경제포럼은 2014년 쿠렌코 총리가 아시아 지역 국가와 협력하자며 개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러시아의 극동 및 시베리아 지역 개발에 필요한 투자를 유치하는 세일즈 외교의 장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60여 개 국에서 5천 명 이상이 참가했는데, 동북아 5개 국가인 남북한, 중국, 일본, 몽골이 주역으로 참석 인원도 가장 많았다.
그중에서도 중국과 일본은 국가 지도자가 직접 참석할 정도로 열의가 대단했다.
남북한은 한참 경협을 추진 중이라 총리들이 대신 참석했다.
언론의 초점이 러시아, 중국, 일본 정상들의 회담에 쏠린 것은 당연했다.
중국과 러시아는 회담 시작일 새벽부터 대규모 합동 군사 훈련에 돌입하며 협력을 과시했다.
이어 열린 정상 회담에서도 대규모 경제 협력을 이끌어냈다.
두 국가는 공동으로 투자한 ‘중러투자펀드(RCIF)’를 활용, 총 1천억 달러(약 112조 원) 규모의 합작 프로젝트 73건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와는 별도로 각 기업들이 약 백억 달러 상당의 투자를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음을 밝혔다.
양자 간 회담이 끝난 후 가진 기자 회견에서 두 정상은 이렇게 발표했다.
러시아와 중국은 힘을 합쳐 보호주의를 반대하고, 자국 이익을 위해 국제 현안에 일방적으로 개입하는 자세를 배격한다고.
이는 중국과 러시아가 경제, 군사 연대를 통해 미국에 대항하겠다는 선전포고를 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었다.
상황이 그러다 보니 호텔 만찬장의 분위기는 러시아와 중국이 주도하고 있었다.
상석에 앉아 술잔을 나누는 왕칭린 주석과 쿠렌코 총리의 얼굴에는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아주 웃음이 넘쳐나네.”
맛없는 보드카를 홀짝이며 희준이 투덜거렸다.
한국에서는 서로 만나려고 기를 쓰는 알라딘 그룹 회장이었지만 여기서는 그저 그런 사업가 정도로밖에 봐 주질 않았다.
거기에는 진혁이 포럼 내내 은인자중하듯 나서지 않은 영향도 있었다.
희준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중러 간 밀착이 생각보다 깊어 보여. 이러다가 우리한테 기회도 안 오는 거 아니야?”
“모난 돌이 정을 먼저 맞는다고 했어. 중러는 분위기에 휩싸여 오버하고 있다. 미국이 나서면 상황은 순식간에 돌변할 거야.”
“정말?”
“필요에 의해 맺어진 관계는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어. 호들갑 떨지 말고 진득이 좀 있어라.”
“이씨…….”
“잠시만.”
손을 드는 희준을 무시하고 진혁이 재빨리 일어나 한쪽으로 달려갔다.
하윤 회장이 마침 혼자 있는 모습이 눈에 포착됐다.
“갑자기 은퇴라길래 놀랐습니다.”
“아, 서 회장님. 어제가 제 생일이었습니다.”
“……몰랐습니다.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서 회장님도 나중에 후회하시지 않으려면 자신부터 챙기세요.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월급 91위안(약 1만 5천 원)을 받았던 교사 시절이었습니다.”
“…….”
“내 남은 마지막 꿈은 이런 가식과 인간들의 욕망으로 가득한 곳이 아닌, 평화로운 해변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생을 마감하는 겁니다.”
도인이 되어 버린 하윤의 모습에 진혁이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다.
“내 인생 최대의 실수는 알리바마를 창업한 겁니다.”
“……?”
느닷없는 말에 진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본인의 인생 최대 업적을 부정하다니.
“난 알리바마를 100년 이상 존속하는 기업으로 만들겠다고 동료들과 주주들에게 약속했습니다. 그 맹약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제야 진혁이 하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중국 공산당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경영난을 겪고 있는 기업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중국 정부는 알리바마를 볼모로 삼았다.
하윤에게 적극적으로 중국의 경제 정책을 지원하고 이를 세계 무대에 알리는 역할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자리에도 나온 것이다.
진혁이 뭐라 하려는 순간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다가온 이가 있었다.
“우리 음식이 입에 맞는가?”
“아, 총리님.”
다가온 이는 러시아의 독재자 쿠렌코 총리였다.
쿠렌코가 하윤에게 다시 물었다.
“젊은데 왜 은퇴하는가?”
“저는 더 이상 젊지 않습니다. 창업한 지 19년이 됐고, 일도 많이 했습니다. 이제 교육이나 자선 사업처럼 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쿠렌코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나보다 젊어. 나는 60이 넘었네.”
“사람마다 인생에서 책임져야 할 몫이 있지요. 총리님은 앞으로도 10년은 그 자리에 계셔야 합니다.”
“하하하. 10년이라.”
쿠렌코는 하윤의 답변이 마음에 든 듯 크게 웃었다.
24년이나 장기 집권했는데도 이런 소리에 기뻐하다니. 권력욕 하나는 끝내줬다.
“제가 비록 일 년 후에 은퇴하지만 알리바마는 변함없이 러시아의 현지 법을 준수하고 중러 양국의 이익을 위해 노력할 것을 보증합니다.”
이어 하윤은 중러 기술 협력 강화 및 무역, 관광, 기술, 교육 발전, 그리고 중소 기업과 젊은이에 대한 지원 확대 등을 제안했다.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철저한 사업가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왕칭린 주석도 하 회장이 여전히 큰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했어. 기대하지.”
쿠렌코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리려 하자 진혁이 얼른 입을 열었다.
밤새 외운 러시아어를 내뱉었다.
“друг познаётся в беде.”
쿠렌코가 동작을 멈추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진혁에게 물었다.
“자넨 누군가?”
“알라딘 그룹 회장 서진혁입니다.”
“알라딘?”
“제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경쟁 상대로 생각하는, 능력이 대단한 젊은 사업가입니다.”
하윤 회장의 설명에 쿠렌코의 눈이 더 날카롭게 변했다.
천하의 하윤이 경쟁 상대라고 인정한다면 뛰어난 자가 틀림없었다.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인 줄 아나?”
“러시아의 오래된 속담으로 알고 있습니다. 위급할 때 친구가 누군지 알 수 있다.”
“그 이야기를 내게 한 이유는?”
“조만간 그 이유를 알게 되실 겁니다. 그때 자세한 사정은 말씀드리겠습니다.”
“재미있는 친구군. 좋은 시간들 보내게.”
멀어지는 쿠렌코의 등을 보며 하윤이 말했다.
“위험했습니다.”
“회장님과 달리 전 존재감이 없다 보니 승부수를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쿠렌코 총리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 조심하셔야 합니다. 특히나 요즘은 고유가에 우리나라의 재정 지원까지 등에 업은 터라 거칠 것이 없습니다.”
러시아의 에너지 산업은 GDP의 20%, 총 수출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매우 높았다.
고유가로 재정 수지가 넉넉한데 중국마저 막대한 투자를 해 주니 러시아로서는 최고의 호황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 자신감 때문에 카이저가 유가 하락을 위해 증산하라는 압박을 정면으로 거부할 수 있었다.
진혁이 말했다.
“공은 둥급니다. 지구 역시 마찬가지고요.”
“……?”
“이곳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서 회장도 극동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당연히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런……. 우리나라가 큰 적을 만났군요.”
“적이 될지 친구가 될지 그것 역시 누구도 모르는 일입니다.”
뜻 모를 말에 하윤이 더 자세히 물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몰려오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물론 하윤을 보기 위해.
뒤로 밀려난 진혁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예전 같으면 그 모습이 부러워 다음에는 자신에게 사람이 오게 만들겠다고 했을 텐데, 지금은 아니었다.
하윤은 더 이상 목표가 아니었다. 자신은 더 큰 꿈을 꾸고 있었다.
이곳에 온 목적을 이룬 진혁이 조용한 곳에 가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서진혁입니다.”
-아……. 회장님…….
“주무셨습니까?”
-여긴 새벽입니다.
진혁은 아차 싶었다. 급한 마음에 시차를 확인하지 않았다.
“이런, 죄송합니다. 나중에 다시 전화…….”
-아닙니다. 이제 깼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상대는 JK모건의 스미스였다.
“요즘 유가가 너무 올라서요.”
-그 점에 저희도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이란 제재 말고는 오를 이유가 없거든요. 오히려 중간 선거를 압둔 카이저 대통령이 OPEC에 증산을 압박하고 있어 내려야 정상인데……. 아무래도 카이저 대통령이 에너지 기업들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유가 상승을 유도하는 정치적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더 이상 그런 상황이 이어지지는 못할 겁니다.”
-그럼?
“비이상적으로 올랐으니 내려야지요.”
-풋(put)입니까?
“당연하지요. 이번 건은 발표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깨워서 죄송합니다. 주무십시오.”
전화를 끊은 스미스가 다시 잘 확률은 0%도 안 됐다.
진혁이 이번에는 야맘 사장에게 전화를 해서 국제 유가와 천연가스에 각각 천억 달러씩 투자하라고 했다.
생각 같아서는 레버리지를 풀로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번 투자는 과거에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순수하게 주변 상황으로 직접 판단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 때를 대비해야 했다.
* * *
아침에 출근한 뉴트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장인 슈왑이었다.
-어떻게 된 거냐?
“뭐가요?”
-공격이 시작되면 연락을 주기로 했잖아.
“그렇지 않아도 오후에 전화드리려고 했습니다. 공격 시점은 내일…….”
-무슨 일을 그렇게 해!
“……!”
슈왑의 호통에 뉴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장인라도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이었다.
-JK모건에서 매도 의견을 내서 유가가 하락 중이란 말이다.
“뭐요?”
-보안에 문제가 생긴 것이냐?
“대체 어떤 자가…….”
-JK모건에서는 검은 머리 짐의 투자 의견이라고 올렸다. 그자와 이 일을 상의한 것이냐?
“그놈이 누군데요?”
-우리가 아는 자다, 알라딘의 서진혁이라고.
“그 빌어먹을 자식을 그냥……!”
-지금 그놈이 문제가 아니다. 이대로 폭락하면 우리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그건 절대 안 됩니다. 무조건 막아야 합니다.”
록펠러가와 로스차일드가 앞에서 유가 하락의 이득을 봐서 나눠 주기로 공표했었다.
아직 매입도 못 한 상태에서 이대로 하락해 버리면 이득은 물 건너간다. 신뢰에 큰 흠집이 생기는 일이었다.
지금은 무조건 유가 하락을 방어해야 했다.
슈왑이 걱정스런 투로 말했다.
-매도세가 보통이 아니다. 이걸 받아내려면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 해.
“그래도 막으세요. 최대한 빨리 기자들을 모아 이란 제재는 원칙대로 진행될 거라고 다시 한번 공표하겠습니다. 가문의 비상금을 써서라도 최대한 방어해 주십시오.”
-……알았다.
슈왑은 어쩔 수 없이 수긍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미 방아쇠는 당겨진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