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조선족의 위기
하루 더 재미없는 회의에 참석한 진혁은 희준과 함께 서둘러 회의장을 빠져나와 어디론가 급히 갔다.
김타냐는 오늘도 변함없이 고려인문화센터를 지키고 있었다.
“할머니.”
희준이 덥석 달려가 안기며 친손자처럼 행동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기념사진 찍는다고 어찌나 붙잡던지. 할머니 기다리실 거라는 생각에 급하게 달려왔어요.”
“그러다 사고 나면 어쩌려고…….”
손등을 쓰다듬으며 걱정하는 김타냐의 행동도 친할머니나 진배없었다.
친해졌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희준의 붙임성 하나는 끝내줬다.
“괜찮아요. 참, 진혁이도 왔어요.”
“저도 왔습니다, 할머니.”
희준이 몸을 비키며 소개하자 진혁도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그때는 미안했어요. 그렇게 큰 사업을 하는 유명한 사람인 줄도 모르고…….”
“서운하게 왜 저한테는 존대하세요. 희준이랑 저랑 친구예요.”
“그래도…….”
“할머니,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저놈이 코 질질 흘릴 때부터 내가 데리고 다녔어요.”
황당한 거짓말에 진혁이 희준을 한번 노려보고 김타냐에게 다시 말했다.
“……희준이 말대로 편하게 대해 주세요. 안 그럼 다시 안 옵니다.”
“그럼 안 되지. 알았으니 자주 와.”
“그럴게요.”
“할머니, 그분들은 오셨어요?”
“맞아. 내 정신 좀 봐. 식당에서 기다리고 계시다. 얼른 가자.”
고려인 식당으로 가자 반백의 노인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진혁입니다, 어르신들.”
“고려인연합회장 바실리 최입니다.”
“서창목입니다. 연변에서 조선족연합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은 진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제가 직접 찾아봬야 하는데 이렇게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좋은 일을 해 주신다니 당연히 와야지요.”
“연변에서 오시느라 힘드시지는 않았습니까?”
“지금은 고속도로가 뚫려 중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넘어오고 있습니다. 두 시간밖에 안 걸리니 먼 거리라고 할 수도 없지요.”
“그쪽 사정은 어떻습니까?”
고려인의 사정은 지난번에 김타냐에게 들었기에 아무래도 조선족에 먼저 관심이 갔다.
“우리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이 급격하게 성장했다지만 그건 연해 도시 쪽 이야기입니다.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떠나는 바람에 늙은이들만 남아 있습니다.”
“중국 정부가 동북 3성 진흥 계획을 추진하고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중에서도 훈춘을 대대적으로 발전시키고 있지요. 하산을 통해 동해로 나가려는 겁니다.”
G2로 성장해 거칠게 없는 중국이지만 유일하게 아픈 구석이, 바로 동해를 10킬로 남겨 두고 국경이 끊겨 버렸다는 점이었다.
청나라 때 연해주는 중국 땅이었다.
19세기 열강의 싸움에 휘말려 러시아에 빼앗기는 바람에 동해 진출이 막혀 버린 뼈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이 점이 왕칭린이 극동 개발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이유이기도 했다.
진혁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그럼 조선족에도 좋은 것 아닙니까?”
“중국인들만 좋지, 우리는 자치주 지위마저 잃을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중국 법에 따라 소수 민족의 자치주로 인정받으려면 인구 비율이 일정 수준을 유지해야 했다.
“연변은 자치주라 한글을 쓸 수 있고 조선족 문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한때는 조선족 비율이 75%가 넘었는데, 중국 정부가 우리를 와해시키려고 조선족 비율이 겨우 2%밖에 안 되는 둔화현을 편입시키면서 자치구에서 자치주로 격하시켰습니다.”
“음…….”
“법적 기준인 30%를 겨우 유지하고 있는데, 훈춘이 개발되면서 중국인들이 많이 몰려와 이제는 그마저도 지키기 어렵게 됐습니다. 우리끼리는 자치주가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면서 자포자기한 상태입니다.”
상황이 심각했다.
진혁이 무거워진 마음을 억지로 떨치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모인 우리가 합심하면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진혁이 큰소리를 쳤지만 다른 사람들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진혁이 얼마나 뛰어난 사업가인지는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개 사업가가 장담하기에는 너무 큰일이었다.
진혁도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오늘 부른 용건을 꺼냈다.
“한국에서 조사를 좀 해 봤는데 의외로 이쪽 전문가를 구하기가 어렵더군요. 특히나 러시아 쪽은 그간 개방이 안 된 데다 영어를 사용하지 않아 더하고요.”
“아무래도 미국이 적대국이란 인식 때문에 더 그럴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동포들 중에 무역이나 행정에 재주가 있는 이들을 수소문해서 모아 주십시오.”
“몇 명이나 필요하십니까?”
바실리 최의 물음에 진혁이 거침없이 답했다.
“몇 명이든 상관없습니다. 할 일이 아주 많을 겁니다. 그리고 그쪽 관련이 아니더라도 동포를 위해 일할 마음이 있는 이들도 알아봐 주십시오. 이왕이면 특기나 원하는 일도 같이 조사해 주시면 서로가 편할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기한은 따로 정하지 않겠습니다. 시작은…… 아무래도 준비하는 기간이 필요하니 내년 봄이나 돼야 할 것 같습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중국이나 러시아나 직장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다들 좋아할 겁니다.”
“잘됐네요. 당장 계약합시다.”
“계약요?”
느닷없는 말에 다들 놀란 표정을 짓자 진혁이 너스레를 떨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여기저기 소문내고 알아보려면 경비가 들고, 전화에 서류 접수까지 받으려면 젊은 직원도 있어야 하고……. 그러고 보니 사무실부터 있어야겠네요. 돈이 엄청 들겠는데요?”
“……?”
“희준아, 뭐 하냐. 맘 변하시기 전에 착수금부터 드려라.”
“어.”
희준이 얼른 준비해 온 봉투를 내밀었다.
“정식 계약은 다음에 만나서 하시는 것으로 하시고, 일단 여기 착수금으로 십만 달러씩 넣었습니다.”
“헉. 너무 많습니다.”
“받으신 만큼 일은 확실하게 하셔야 합니다.”
“그건 걱정 마시오.”
“그럼 그 돈도 당당히 받으셔야 합니다. 친한 사이일수록 돈거래는 확실히 하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안 그래요, 할머니?”
“맞아. 받으세요들.”
이미 경험이 있는 김타냐가 거들어 준 덕분에 더 이상의 실랑이는 없었다.
이후 저녁까지 함께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진혁 일행이 호텔에 묵겠다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다며 바실리 최가 데려간 곳은 김타냐가 산다는 우정마을이었다.
빨간 벽돌집이 나란히 들어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인 우정마을은 고려인들의 러시아 이주 140주년을 기념해 대한주택건설협회가 지어준 고려인 정착촌이었다.
30여 가구가 옹기종기 살고 있었다.
진혁 일행이 묵을 곳은 마을회관 격인 솔빈 센터였는데, ‘솔빈’은 우수리스크 지역이 발해 시대 솔빈부였다는 데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했다.
그들은 밤이 늦어 내일 만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진혁 일행은 바실라 최의 안내로 마을 산책에 나섰다.
길들은 깔끔히 청소되어 있고, 정경은 한국의 여느 시골 마을엔 온 것으로 착각될 만큼 흡사했다.
마을 길 이름도 아리랑로, 우정로, 사랑로, 평화로 등이었다. 한글로 만들어진 간판이 정겹게 다가왔다.
각 가정마다 텃밭에 비닐하우스가 세워져 있었는데, 상추, 깻잎 등 쌈 채소들을 길러 먹거나 많을 때는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한다고 했다.
“고려인들은 부지런해서 밭을 놀리는 법이 없어요. 이 작물 저 작물 재배하다 보면 일손이 모자라요. 그럴 때는 함께 작업도 하고, 때로는 일당 200루블을 주고 러시아 사람들의 손을 빌리기도 합니다.”
산책을 마치고 센터로 가자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풍성했다.
이역만리 먼 고국에서 온 큰 손님이라며 각 가정에서 재료를 모아 급히 만들었다고 했다.
몇몇 고려인 가족들도 함께 식사를 했는데 한국어보다는 러시아어가 더 많이 들렸다.
바실라 최가 말했다.
“우리는 이렇게라도 모여 사니 고려어를 그나마 쓰지만, 따로 사는 가정의 아이들 중에는 우리말을 아예 못하는 애들도 많습니다.”
“…….”
“회장님이 이곳에서 사업하신다고 해서 다른 큰 욕심은 없습니다. 그저 우리 동포들이 많이 돌아와서 우리말을 하며 함께 살 수 있게만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진혁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자신도 반드시 이루고 싶은 일이었다.
* * *
한국에 돌아온 진혁에게 시끄러운 논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북경제협력위원장이 된 주명근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야당에서 남북 철도 연결 사업을 반대하고 있네.”
“아니, 왜요?”
“실사 결과가 나왔는데, 북한 철도가 너무 낡고 노후화돼 단순히 남북한의 끊어진 철길을 잇는 것은 불가능하다네. 전부 걷어내고 새로 깔아야 하는데, 북한 철도 현대화에 들어가는 비용만도 158조 원에 이른다고 하네.”
“낡긴 많이 낡았더라고요.”
지난번 평양을 방문했을 때 기차를 타 봤는데 평균 시속이 20킬로 정도로 웬만한 마라토너가 달리는 속도보다 느렸다.
그렇다고 속도를 높이면 교량 붕괴나 탈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오죽하면 동승한 윤호열 주석이 민망하다는 표현까지 할 정도였다.
함께 배석한 TG 회장 주경운이 말했다.
“그것도 토지 보상비와 인건비를 제외한 금액입니다. 거기에 복선화와 전력 및 신호 방식 교체 등이 병행될 경우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불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희준이 바로 반박했다.
“물론 그렇지만 남북을 잇는 철도가 연결되면 시베리아 횡단 철도(TSR), 중국 횡단 철도(TCR), 만주 횡단 철도(TMR), 몽골 횡단 철도(TMGR) 등 네 개의 대륙 횡단 철도를 통해 유라시아를 넘나들 수 있게 됩니다. 절감되는 물류비용만도 엄청납니다.”
하지만 주성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물류비 절감에 대해 관련 전문 기관에서는 막연한 기대만으로 곤란하다는 반대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막연한 기대요?”
“컨테이너선의 경우 한 번에 만 이천 개를 수송하지만,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106개 정도에 불과하답니다. 또 중국 횡단 철도와의 연결은 신의주를 넘어 산둥반도 밑 쑤저우까지 내려가야 하는데, 컨테이너선으로 인천항 등에서 바로 이곳으로 연결하는 것이 시간과 비용상 유리하다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단순 계산을 해서는 안 되지요. 관광객들도 있잖습니까. 남북한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 유럽의 관광객들까지 기차로 이용할 수 있게 됩니다.”
“관광객 유치도 예상치이지, 실제 개통 후 그만큼 실적이 나올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당장 국내 노선만 보더라도 그간 정부가 각종 철도 건설을 발표할 때마다 이용객은 충분하다고 홍보했지만, 막상 개통하니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흑자를 내는 노선은 경부선 KTX 정도뿐이었다.
나머지는 계획 당시 추정한 이용객에 턱없이 모자라는 적자 상태라 막대한 국민의 혈세로 보전해 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말문이 막힌 희준이 반박하지 못하자 주명근이 진혁을 보고 다시 말했다.
“최근에는 북한에 넘어가는 돈이 너무 많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네.”
“북한에 넘어가는 돈이라니요?”
“경의선만 하더라도 현재 우리 기준으로 하면 매년 천억 원이 선로 사용료로 나갈 테니, 결국 남한 국민이 낸 세금으로 북한만 배불리는 것 아니냐며 보수 단체가 반발하고 있네.”
“그건 북한이 100% 시설 투자해야 가능한 금액입니다. 하지만 현재 북한의 재정 사정을 감안하면 그럴 가능성은 0%도 안 된다는 것을 위원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아는데 그런 억지 주장이 국민들에게 먹힌다는 게 문제지. 일부 극우 단체에서는 북한 철도성의 조사 자료까지 게시하며 여론몰이를 하고 있어.”
북한 철도성의 자료에 따르면 신의주와 개성 사이의 철길을 복선화하여 한중간 물류 수송에 사용하면 한 해 4억 달러 이상, 러시아와 기타 지역까지 합치면 매년 15억 달러 이상을 선로사용료 수입으로 벌어들일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어이없어 하는 진혁에게 주명근이 한층 더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철도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