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283화 (283/307)

283화. 베트남 보딕

“전력 문제가 심각해.”

“전력요?”

“윤호열 주석은 무조건 고속 철도를 복선으로 깔아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네. 그러려면 상당한 전력이 필요한데, 북한은 전력 제한 조치를 시행할 정도로 전력 상황이 열악해. 우리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탈원전 정책을 펴느라 전력의 여유가 없고.”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진혁이 솔직히 인정했다. 전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었다.

주명근이 말을 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야. 얼마 전에 청와대에 들어갔다가 왔는데, 그쪽도 골머리를 앓고 있더군.”

“무슨 문제가 있답니까?”

“다양한 경로를 통해 청탁이 들어오는 모양이야.”

“……?”

“이번 남북 경협은 단군 이래 최대 SOC(사회 간접 자본) 사업이네. 기업이 욕심을 안 낸다면 말이 안 되지.”

진혁이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사업권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로비전이 전개되고 있다는 말이었다.

진혁이 물었다.

“대통령께서는 뭐라 하시던가요?”

“그분이 어디 그런 것에 흔들리실 분인가? 역사에 대역 죄인이 되면 안 된다면서 전화번호까지 바꾸셨다고 하더라고. 비서실장이 하소연하며 사정을 알려 줬어.”

“그러시겠지요.”

“문제는 밑에 있는 사람들이지. 벌써부터 모 장관이 어떤 그룹과 밀착되어 있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어.”

“다 헛물켜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일만 하면 됩니다.”

“그래도…….”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주명근이 일어나려는 진혁을 얼른 잡았다.

“아니, 이대로 그냥 가는 게 어디 있나?”

“위원장님 말씀대로 단군 이래 최대의 사업입니다. 남북이 분단되어 지낸 지가 70년이 넘었고요. 아무런 진통 없이 하나가 될 수는 없지요. 그냥 지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만 가 보겠습니다.”

도인 같은 말만 남기고 나가 버리는 진혁의 행동에 주명근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베이터를 타자 희준이 말했다.

“정말 이대로 지켜봐도 되겠어?”

“비판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전력만 해도 전혀 생각지 못한 문제였어. 그런 문제 제기를 통해 보다 완벽한 계획을 세울 수 있다면 오히려 좋은 거지. 절대 실패하면 안 되는 일이다.”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우리도 극동 개발에 참여하려면 현지 사무소라도 우선 개설해야 하는 것 아니야?”

“아직은 때가 아니다.”

“때?”

“그쪽 일은 남북 경협과는 달라.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서, 어설프게 건드렸다가는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몰라.”

“그렇겠지. 이번 포럼에서 보니 그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각 나라에서 정말 치열하게 경쟁 중이더라.”

“그러니까 준비하고 있다가 기회가 오면 전광석화같이 달려들어 단번에 결정지어야 해. 대비할 틈도 주지 말고.”

말하는 진혁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밑밥은 깔아 놨다. 이제 물기만 하면 된다.

* * *

진혁은 정말 일절 외부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그룹의 사업에만 전념했다.

그와는 상관없이 바깥세상은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한국은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서 남북 경협에 대한 뜨거운 찬반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미중 무역 전쟁도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미국 수출 물량 감소에 따라 중국의 경제 성장률 달성에 문제가 생겼다.

다급해진 중국이 일부 미국산 제품의 수입 금지 조치를 완화할 수 있다는 유화 제스처를 취했지만 카이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했지만 그것은 왕칭린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국민들에게 굴욕적으로 항복하는 모습으로 비쳐지면 정권에 심각한 위협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진혁의 매도 의견으로 잠시 추락하다 횡보하던 국제 유가가 마침내 하락세로 돌아섰다.

카이저 대통령이 수차례 공언했던 이란산 석유 제품 제재를 6개월 연장한다고 말을 바꾼 영향이 컸다.

거기에 미국이 셰일 가스 비축분을 수출한다는 소식에 천연가스 가격도 함께 낙폭을 키워 갔다.

한편 한동안 회사와 집만 오가며 일에 몰두하던 진혁은 베트남으로 건너갔다.

안근석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 대표팀의 스즈키컵 결승전 경기 때문이었다.

적진인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1차전을 아쉽게 2:2로 비긴 후 홈인 하노이에서 2차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동남아 월드컵’으로 불리는 스즈키컵 결승전 열기로 베트남 전역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노이를 포함해 호치민과 다낭 등 모든 도시가 안 감독 얼굴이 새겨진 붉은 옷을 입은 물결로 가득 찼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오히려 퇴물 감독이라 비난받은 것에 비하면 놀라운 반전이었다.

U-23 챔피언십에서 준우승, 8월 아시안 게임 4강으로 FIFA 랭킹 100위 진입을 이룬 것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었다.

안 감독이 베트남에서 사랑받는 이유는 성적이 전부는 아니었다.

경기를 뛰다가 다친 선수들을 직접 마사지해 주거나 선수들을 위해 비즈니스석을 양보하는 등 ‘아버지 리더십’에 베트남인들이 감동을 받은 것이다.

경기가 열리는 하노이 미딩 경기장에는 4만 관중이 꽉 들어차 있었다.

암표 가격이 열 배가 넘는다고 하니 그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진혁은 VIP석에서 쯔엉 총리와 함께 관전을 했다.

베트남의 공격수가 찬 공이 말레이시아 골 망을 흔드는 순간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뛰어오르며 관중들과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그 소리는 미딩 경기장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우렁찼다.

경기 종료 휘슬로 베트남의 승리가 확정되자 관중들이 서로 얼싸안으며 덩실덩실 춤을 췄고, 주먹을 불끈 쥐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팬도 보였다.

하지만 이건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에 불과했다.

흥분한 팬들은 부부젤라를 요란하게 불며 베트남 국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터지는 불꽃 사이로 오토바이와 자동차는 경적을 울리며 자축했다.

수많은 팬이 연호하는 ‘베트남 보딕(우승)’, ‘베트남 꼬렌(파이팅)’ 소리는 밤늦게까지 그칠 줄 몰랐다.

다음 날 열린 우승 기자 회견에서 안근석 감독은, 축구에서처럼 경제에서도 베트남과 한국이 좋은 파트너가 됐으며 한다는 희망을 밝혔다.

더불어 우승 보너스로 받은 10만 달러를 베트남 축구 발전을 위해 쾌척해 다시 한번 베트남인들의 가슴을 울렸다.

이에 감복한 쯔엉 총리는 안근석 감독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화장품과 식품 위주로 한국 소비재 제품에 대한 판매가 급격하게 늘고 있습니다.”

“한국산 신선 과일에 대한 문의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현지 라이따이한 농장 출하만으로는 감당이 안 돼 전세기를 동원해 물건을 공급하기로 했습니다.”

“베트남서 한국행 항공권 검색 빈도가 50%가 넘게 올라 각 항공사에 특별기 투입을 요청했습니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채 한국으로 돌아온 진혁에게 계속해서 보고가 올라왔다.

안근석 감독의 인기는 단순히 축구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한국, 한류, 한국 제품에 대해 연쇄적으로 효과를 미치고 있었다.

베트남 정부가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자 그 효과는 전 산업에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알라딘이 최대의 수혜를 입었다.

베트남 국민들은 직접 구매할 수 있음에도 알쇼핑을 통해 구매하는 것으로 대표팀 메인 스폰서를 맡아 준 것에 대한 보답을 했다.

오죽했으면 이현국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백 명의 경제 사절단보다 낫다고 할 정도였다.

* * *

한국이 안근석 감독 효과로 때 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을 때 중국은 심각한 상황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미중 무역 전쟁의 여파가 본격적으로 중국 경제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도시 물가가 폭등하고, 주거 비용이 상승하면서 신용카드 대금의 연체율이 치솟았다.

거기에 그동안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된 기업 부채, 부동산 거품, 그림자 금융까지 거론되자 소비 감소가 일어나 내수 경기마저 빠르게 가라앉고 있었다.

한편 미국에서는 빅브라더들이 다시 모였다.

뉴트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중국이 마침내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습니다. 왕칭린이 미국산 대두 수입을 재개할 테니 1월 1일 이후 발효하기로 한 양측의 관세 부과를 3개월 연장하고 협상하자는 제안을 해 왔습니다.”

“괜히 시간 끌려고 하는 거 아닌가?”

“아시겠지만 중국 내 경기가 급격하게 하락하고 있습니다. 괜한 엄살만은 아닙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야. 물가 상승과 재정 적자가 심화되고 있어. 그로 인해 주식 시장이 폭락하고 있네.”

연방준비제도 녹스 의장의 말에 뉴트가 따지듯 물었다.

“그것은 그쪽에서 금리 인상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잖습니까.”

“경기를 낙관해 금리를 인상해도 된다고 했던 것은 자네였어.”

녹스의 날카로운 지적에 뉴트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카이저 대통령은 ‘미국제일주의’ 정책으로 미국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고 낙관했다.

미중 무역 전쟁으로 중국을 묶어 놓은 상태에서 대규모 감세 정책을 통한 내수 경기 부양책을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미국 경기는 자체 국민들의 소비가 70%를 차지할 정도로 내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법인세와 개인 소득세를 낮춰 주면 가계의 소득이 늘어나고 그것이 소비로 이어져 경제 성장률이 올라갈 거라 판단했다.

그런 자신감에 그동안 유지해 왔던 저금리 정책을 버리고 연방준비제도에 금리 인상을 허락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소비 시장을 중국 제품이 잠식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했던 것이다.

늘어난 소비 지출 금액이 미국이 아닌 중국으로 흘러가는 부작용이 초래됐다.

거기에 한 가지 더해 미국 가계가 그동안 빚으로 소비와 투자를 해 와 가계 부채가 14조 달러에 이를 정도로 심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연달아 금리를 인상하자, 감세로 얻은 소득으로 늘어난 대출 이자를 감당하고도 모자라 오히려 소비를 줄이는 기현상이 발생하고 있었다.

뉴트가 말했다.

“우리가 중국 제품과 가계 부채를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우리가 아니라 백악관이지. 난 처음부터 백악관의 지나친 자신감을 우려했어.”

녹스가 다분히 의도적인 말을 했다.

지난번에 유가 하락으로 정책을 변화시키면서 그 이득을 공동으로 나눠야 한다며 자신을 압박한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다.

뉴트가 한참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은 누구 잘못이냐를 따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시장에 추가적인 금리 인상은 없다는 시그널을 줘서 위축된 소비 심리를 되살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간 백악관의 말을 믿고 이번에도 금리 인상을 하겠다고 공표했어. 이제 와서 말을 바꾸면 우리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이는 향후 정책 결정에 악역향을 미치게 되네.”

“아버님도 저유가를 위해 비난을 감수하며 이란 제재를 연장하셨습니다.”

“백악관은 중국과 무역 전쟁 중이라는 좋은 핑계거리가 있지만, 우린 아니야. 금리 인상을 중단하더라도 올해는 유지했다가 내년에나 중단해야 해.”

“지금 상황이 심각하다니까요!”

“무조건 윽박지른다고 될 일이 아니야. 기다려.”

설전이 격해지는 모습에 앤서니가 나섰다.

“이봐요, 녹스.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맙시다. 우린 저유가로 아주 죽을 맛입니다. 그에 반해 그쪽은 그냥 말 한마디 하면 되잖습니까?”

“이건 우리 가문의 명예가 걸린 일입니다. 록펠러 가가 끼어들 일이 아닙니다.”

“지금 가문의 명예가 조직의 공동 목표보다 우선이란 말이오?”

“……그건 아닙니다.”

앤서니의 날카로운 지적에 녹스는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자칫 잘못 답변해 조직으로부터 배척당하면 지금까지 이뤄 놓은 모든 것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이번에는 슈왑이 나섰다.

“이번 사태가 백악관의 오판에서 비롯됐음은 명확합니다.”

“아니, 회장님.”

“하지만 금리 인상을 중단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보시오.”

“로스차일드 가문의 명예를 지키면서 금리 인상을 중단할 방법이 있습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