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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284화 (284/307)

284화. 쿠렌코와의 승부

“대통령께서 직접 방문해 협조를 구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정도로 현 상황을 정리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그거 절묘한 계책입니다. 백악관이 먼저 머리를 숙인다면 어쩔 수 없이 양보한 것으로 비칠 테니 신뢰에 문제가 생기지도 않을 테고.”

앤서니가 동의하자 슈왑이 뉴트를 보고 물었다.

“대통령을 설득할 수 있겠나?”

“찾아가시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로 정리하시지요.”

“……알겠습니다. 대통령이 먼저 방문한다면 우리도 그에 발맞춰 정책 변화를 발표하겠습니다.”

녹스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1:3의 구도라 반발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갈 수만은 없었다. 어떻게든 현 구도를 깨야 했다.

녹스의 눈이 차갑게 변했다.

결국 얼마간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더 논의하다, 뉴트가 먼저 일어나자 앤서니가 얼른 따라갔다. 따로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이어 녹스가 일어나며 슈왑에게 흘리듯 말했다.

“정치인의 말을 너무 믿으면 안 됩니다. 그들의 목표는 정권 연장이지, 가문의 이득이 아닙니다.”

“……!”

“이번 거래로 큰 손실만 입었다며 베어링 가 원로들이 걱정하시더군요.”

몸을 돌려 나가는 녹스의 등 뒤로 혼자 남은 슈왑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검은 머리 짐, 진혁이 던진 한마디의 파급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쏟아지는 매도 물량을 받아내느라 카지노월드의 자체 자금뿐만 아니라 가문의 자금까지 끌어다 쓰느라 큰 손실을 입었다.

더 뼈아픈 것은 진혁을 포함해 그의 전략에 따라 풋 옵션에 투자한 다른 가문들은 40%가 넘는 고수익을 얻었다는 점이었다.

금융을 장악한 녹스인지라 이런 모든 사실을 속속들이 알고 이간질을 하고 있었다.

오늘 모인 이들은 각 가문을 대변할 뿐 실질적으로 가문을 이끄는 것은 원로원이었다.

그들은 언제든지 대표를 바꿀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 * *

진혁이 러시아를 다시 방문한 것은 새해가 시작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1월 초였다.

“우라지게 춥네. 탱자가 되겠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자 희준이 투덜거리며 몸을 떨었다. 한겨울에, 그것도 가장 추운 도시를 방문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희준이 호들갑을 떠는 것은 단순히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긴장감을 떨쳐내려고 일부러 하는 행동이었다.

그렇게 닦달해도 꿈쩍 않고 사무실만 지키던 진혁이 러시아 대사관의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이곳으로 달려왔다.

그가 말했던 때가 됐다는 방증이었다.

수행하러 따라온 김상균의 얼굴도 잔뜩 굳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때 세계를 움직이는 2인 중 한 명이었고, 정권 연장을 위해 정적은 가차 없이 숙청하는 잔인함을 보여 준 무서운 인물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해가 지는지 어두움 속에 묻혀 가는 크렘린궁을 보자 그 긴장감은 한층 높아졌다.

하지만 유일하게 한 사람, 진혁만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주변을 구경하고 있었다.

다시 만난 쿠렌코 총리의 눈초리가 그때보다 더 날카롭게 느껴졌다.

얼음이 된 희준을 옆에 두고 진혁이 고개를 숙였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알라딘의 서진혁입니다.”

“자네에 대해 좀 더 일찍 보고받았다면 그때 그렇게 쉽게 돌려보내지는 않았을 거야.”

쿠렌코의 말에 배석한 세르게이 대통령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는 영원한 2인자로, 쿠렌코의 지위 변동에 따라 총리와 대통령을 바꿔 가며 비서실장처럼 처신하면서 연명하고 있었다.

연임하지 않겠다고 해서 대통령에 당선됐던 쿠렌코가 정권 연장의 묘수로 생각한 게 바로 총리직을 맡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당시 총리였던 세르게이가 지금은 대통령이 되어 있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었지만, 정적이 모두 숙청된 터라 나서서 반대할 세력이 전무한 게 지금 러시아의 슬픈 현실이었다.

방금 쿠렌코의 말은, 지난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한 주요 인사를 보고 했을 때 진혁의 이름이 빠진 것에 대한 우회적인 질책이었다.

이런 질책을 몇 번 받은 이들이 어느 날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진혁이 수더분하게 말을 받았다.

“설혹 그때 저에 대해 아셨어도 특별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겁니다.”

“그래?”

“위기가 아니었으니까요.”

쿠렌코가 한층 차가워진 눈초리로 러시아어로 말했다.

“друг познаётся в беде.”

“위급할 때 친구가 누군지 알 수 있다니, 다시 들어도 역시 좋은 말입니다.”

“맞아. 어려워지니까 아군과 적군이 명확히 구분되더군.”

쿠렌코가 이를 갈았다.

결국 왕칭린은 카이저의 공격에 굴복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말았다.

무역 전쟁 초기, 대두 수입 금지에 따른 후속 조치로 왕칭린은 연해주의 빈 땅을 임차해 대두 농장을 조성하겠다며 먼저 제의했었다.

양측이 양해각서까지 교환하며 막 사업을 벌이려는데, 갑자기 중국이 미국에 주는 첫 번째 선물로 대두를 택했다.

이는 농장 조성은 물 건너갔다는 반증이었다.

사업 포기보다 자신을 카이저보다 더 낮게 본 것에 쿠렌코는 자존심이 크게 상해 있었다.

하지만 자존심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저유가를 예상하고 내게 그런 말을 한 건가?”

“그간의 고유가는 비정상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진정될 거라고 봤습니다.”

“카타르가 OPEC을 탈퇴할 것도 미리 알았는가?”

쿠렌코가 서둘러 진혁을 부른 것은 이것 때문이었다.

유가 하락에 성공한 카이저 대통령이 에너지 패권을 쥐기 위해 다음으로 꺼내 든 카드가 카타르의 OPEC 탈퇴였다.

카타르는 OPEC 회원국이지만 석유 생산량은 2%밖에 되지 않아 그 영향력은 미미했다.

하지만 카타르의 탈퇴는 OPEC의 결속력 약화를 초래했고, 이는 국제 에너지 시장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나라가 러시아였다.

카타르는 석유가 적은 반면 천연가스 매장량은 세계 1위였다.

카타르 대통령은 OPEC 탈퇴를 발표하며 천연가스 생산에 집중하겠다고 해 천연가스 가격을 나락에 떨어트렸다.

이는 천연가스 판매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러시아 재정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진혁이 답했다.

“제가 점쟁이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미국이 조만간 러시아를 상대로 공작을 벌일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공작?”

“정보 출처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은 데다 카이저 대통령의 ‘미국제일주의’가 ‘미국 우선 에너지 계획’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이를 위해 미국이 셰일 가스 수출에 나설 것이라는 것도요.”

“카이저, 이놈!”

쿠렌코 총리가 화를 내자 방 안의 분위기는 한파가 몰아치는 시베리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그렇지 않아도 잔뜩 주눅이 든 희준과 세르게이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한참 만에 화를 누그러뜨린 쿠렌코가 진혁에게 물었다.

“자네의 조국 대한민국은 미국의 우방인데 이런 비밀을 흘려 일부러 내게 접근한 이유가 뭔가?”

“제 조국이 대한민국인 것은 맞지만, 알라딘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국가 간의 관계는 이번 중국과 카타르의 태도 변화에서 보셨듯이 자국의 이익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그건 정치적인 이해관계고, 사업가인 자네가 얻고 싶은 이익은?”

역시 쿠렌코는 늙은 여우답게 예리했다.

“총리께서 추진 중이신 극동 바이칼지역경제사회 발전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투자야 언제든지 환영이니 꼭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았나?”

“정정하겠습니다. 총리님께 극동 바이칼 지역경제사회 발전 프로그램 공동 추진을 제안합니다.”

“……!”

천하에 무서울 게 없는 쿠렌코지만 진혁의 제안은 너무도 오만했다.

“자네가 제안한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아는가?”

“압니다.”

“여러 국가들이 달려들어 추진하는 빅 프로젝트일세.”

“중국이 빠져나간 자리를 제가 대신할까 싶습니다.”

“허어……. 자네가 재산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네. 하지만 중국이 투자했거나 투자하기로 한 금액은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야.”

“산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총리께서 간과하고 계시는 점이 있습니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쿠렌코에게 진혁이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중국은 이미 그 지역에 한 발을 들여 놓은 상황입니다. 비록 나머지 한 발마저 넣으려다가 미국의 공세에 주저하고 있지만, 이미 들여 놓은 발은 쉽게 빼지 못할 겁니다. 손실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렇지.”

“저 혼자 중국의 몫을 감당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대한민국과 북한, 그리고 일본과 에너지에 관심이 많은 국가들을 끌어모을 겁니다.”

“하하하하. 자네가 그런 쪽에 전문이었지. 탕분헝 총리께서 미국을 상대하려면 자네를 꼭 잡으라고 하시더군. 나즈마 총리도 칭찬을 멈출 줄 몰랐고.”

쿠렌코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진혁을 조사하다가 두 나라 정상에게 직접 전화까지 해서 확인했던 터였다.

둘 다 극찬한 것은 당연했다.

들은 대로 이번에도 주변에서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을 모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었다.

쿠렌코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물었다.

“좋아. 일단 자네의 계획을 들어 보자고. 어떤 식으로 공동 추진 하자는 말인가?”

“저유가는 한동안 지속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 재정으로 극동, 바이칼 모두를 개발할 수는 없습니다.”

“한쪽을 포기하자는 말인가?”

“아닙니다. 나누자는 겁니다. 총리께서 바이칼을 맡아 주시면 극동은 제가 책임지고 개발해 드리겠습니다.”

“왜 그렇게 나눈 것인가?”

“바이칼은 이곳과 가까운 시베리아 내륙이고, 극동은 한반도와 가깝기 때문입니다. 또한 최근에 그쪽에 문제가 있어 러시아 정부가 개입하는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최근 쿠렌코에게 한 통의 편지가 전달됐는데, 바이칼호 부근 주민들의 청원서였다.

중국인들의 바이칼호 부근 토지 거래를 금지시켜 달라는 내용이었다.

바이칼호는 러시아 시베리아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깊은 호수로 관광의 명소였다.

베이징에서 두 시간 거리라 최근 중국인 관광객들이 급속히 늘고 있었다.

셈이 빠른 중국인들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토지를 사들여 숙박업에 진출하면서 무분별한 개발과 불법 폐수 방류 등으로 지역 생태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이에 러시아 원주민들이 반발하고 있었다.

쿠렌코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모르는 것이 없군.”

“국가와 마찬가지로 기업 경영도 정보력 싸움입니다. 이 일을 위해 알라딘의 모든 정보 자원이 투입됐습니다.”

“내가 극동을 맡기면 어떤 식으로 개발할 것인가?”

“연해주의 ‘국제 관광 합작구’를 확대해 주셨으면 합니다.”

“국제 관광 합작구를?”

“그렇습니다. 이를 연해주 전역으로 넓혀 주십시오.”

국제 관광 합작구는 일명 ‘국경 없는 국제 관광구’로 불렸다.

중국 정부의 제안으로 북한, 러시아 3개국이 두만강 하구 삼각지에서 각기 10만 제곱킬로미터 토지를 내놓아 만든 관광 특구였다.

세 나라 국민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도 별도 비자 없이 방문해 3국 문화를 체험하고 면세점 쇼핑을 즐길 수 있었다.

호응이 좋아 최근 확대하자는 이야기가 나오는 중이었다.

쿠렌코가 물었다.

“연해주만도 16만 제곱킬로미터가 넘네. 설마 우리만 내놓으라는 것은 아니겠지?”

“중국의 동북 3성중 하나인 지린성 면적이 17만 제곱킬로미터로 비슷합니다. 북한도 나진특별시가 포함된 함경북도까지 확대하게 될 겁니다. 면적은 1만 5천 제곱킬로미터로 작지만, 국토가 좁은 점을 감안해 주셨으면 합니다.”

“면적이야 나중에 조정하면 되는 것이고. 어떻게 개발할 생각인가?”

“100년간 임대해 주시면 홍콩이나 싱가포르 같은 물류와 관광 중심의 국제도시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100년간이나?”

“어차피 자유항과 선도 개발 구역 임차 기간이 70년이니 큰 차이가 없습니다. 총리께서 동방 포럼까지 여시면서 투자 유치에 애쓰지만, 중국과 일본을 제외하고는 관심을 갖는 곳이 없습니다. 중국은 동해 진출에 대한 야욕 때문이고, 일본은 쿠릴 열도 문제 완화를 위해 시늉만 하고 있고요.”

“…….”

“다른 나라들이 투자를 꺼리는 것은 러시아의 재정에 대해 확신이 없고 중국의 급격한 성장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서입니다. 제삼국 출신인 제가 맡아서 운영한다면 그런 불신은 사라질 겁니다.”

진혁이 고심하는 쿠렌코에게 마지막 말을 했다.

“이번 합작구 확대는 시작일 뿐입니다. 현재 남북한 사이에 철도 연결에 대한 논의가 활발합니다. 그게 완성되면 총리께서 원하시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의 연결도 가능하게 됩니다. 러시아가 미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환동해권 패권 경쟁에 한발 앞서가는 계기가 될 겁니다.”

머릿속으로 이해득실을 따지던 쿠렌코가 생각을 멈췄다.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진혁이 정확히 맞췄다.

하지만 쿠렌코는 늙은 여우였다.

속마음을 숨긴 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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