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따로국밥
“우리 김치 공장을 세우자.”
“김치 공장?”
“김치 맛을 봐 봐. 한국에서 먹던 것이랑 똑같아. 식당에서 나오는 중국산 김치하고는 차원이 다르다니까.”
“그런데?”
“여기는 러시아 정부가 유전자 변형(GMO) 식품을 전면 금지해서 다 유기농이래. 무엇보다 연해주는 백두대간이 이어지는 곳이라 한국과 토질이 비슷해 우리 입맛에 맞는 채소 재배가 가능하고. 중국에 진출한 김치 공장들이 반한 감정으로 어려움에 처했다니 여기로 옮기면 딱 좋을 것 같아.”
“우리가 여기 김치 공장 세우러 왔냐?”
“……!”
“생각 좀 하고 살아라. 한국 식품 회사에 이곳 상황을 알려 주고 공장 유치를 협의해 봐. 우리가 할 일은 그런 거야.”
“알았다.”
희준이 두말없이 일어났다.
호들갑을 떨며 좋아했는데 결국 일거리만 하나 떠안게 됐다.
이후 진혁은 여러 사람들과 환담을 나눴는데, 두리이엔티 송진용이 술을 한잔 걸쳤는지 벌게진 얼굴로 연신 고맙다며 인사를 하는 바람에 민망할 정도였다.
그가 미리 와서 조사해 보니 빈 땅이 천지였다. 물류 창고와 공장을 지어야 할 곳들이 차고도 넘쳐났다.
김영복이 달려와 얼른 데려간 덕분에 진혁은 곤란한 상황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 * *
다음 날 우수리스크 시 청사에 마련된 임시 행정청장실에서 진혁은 처음으로 부청장들과 대면했다.
이용순, 로마노프, 장차민으로 각기 북한, 러시아, 중국 정부가 임명한 인물들이었다.
“3개 정부가 큰 기대를 갖고 적지 않은 영토를 내놓아 어렵게 확대된 합작구입니다. 그에 걸맞게 세계 최고의 물류, 관광 도시로 만들겠다는 게 제 계획입니다.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깊이 고개를 숙이며 하는 진혁의 부탁에 이용순과 로마노프도 마주 고개를 숙였는데, 장차민은 고개만 까닥였다.
개발국장 자격으로 배석한 희준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진혁이 말을 이었다.
“그간 제 나름대로 조사를 해 봤는데, 교통 인프라는 잘 갖춰져 있는 반면 호텔 같은 숙박 시설과 공항이 부족해 이를 우선적으로 확보할 생각입니다.”
“그건 쓸데없는 중복 투자 같습니다.”
장차민이 바로 반대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 쪽에 연길 국제공항과 장춘 용가공항이 있습니다. 그리고 훈춘에도 최근에 호텔들이 많이 지어져서 그것을 이용하면 충분합니다.”
“물론 그렇지만 제가 계획한 두만강 합작구 건설이 완료되면 현재의 시설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듭니다.”
“그건 그때 봐서 결정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처음 계획과 달리 기업과 관광객 유치가 순조롭지 못하면 애물단지가 되기 십상이지 않겠습니까?”
“아니, 이 사람이…….”
“나서지 마라.”
참지 못하고 폭발하려던 희준을 진혁이 막고 장차민에게 물었다.
“그럼 부청장님께서는 어떻게 개발하는 게 맞다고 보십니까?”
“단계적으로 개발해야지요. 제일 잘 개발된 훈춘을 중심에 둬야 합니다. 그다음에 이곳 우수리스크 지역을 먼저 개발하고 가장 낙후된 함경북도 쪽은 천천히 개발해도 됩니다. 솔직히 그쪽은 나진항 말고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이용순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하지만 지도자와 수시로 독대하는 진혁이 있는 자리라 반발하지는 못했다.
로마노프는 그런 모습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뿐 대화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이후에도 진혁이 이런저런 계획을 이야기할 때마다 장차민은 어김없이 태클을 걸었다.
장차민은 다 잡은 고기를 통째로 진혁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간 갖은 공작으로 조선족의 비율을 낮췄다. 이제는 때가 됐다고 판단해 지난 양회에서 조선족 자치주를 연변시로 전환하는 계획까지 발표했었다.
그렇게 되면 시장으로 입지가 올라가 중앙 진출까지 바라볼 수 있을 거라고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느닷없이 날아온 돌이 그 꿈을 산산조각 부셔버렸다.
진혁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장차민이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중국 정부의 잘못도 있었다.
진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려면 그의 활약도 알려야 하는데, 그 대부분이 동서경제벨트를 무력화시킨 일이라 밝힐 수도 없었다.
결국 두루뭉술하게 잘 협조하라는 말만 해 준 바람에 장차민은 진혁을 운 좋은 사업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장차민이 계속 방해를 하는 바람에, 회의를 절반도 진행하지 않았는데 점심시간이 되어 버렸다.
“식사들 하시고 말씀들 나누시지요.”
로마노프가 회의석상에서 처음으로 의견을 내놓은 게 ‘밥 먹자’였다.
“그럽시다. 제가 모시지요.”
장차민이 화답하자 모두 일어났다.
뒤에 처진 희준이 앞서가는 장차민의 뒤통수에 대고 분통을 터트렸다.
“아우, 저 자식을.”
“중국인을 상대로 먼저 흥분하면 지는 거다.”
“그건 아는데, 진짜 밉상이다.”
진혁도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희준과 달리 자신은 성질대로만 할 수 없는 위치였다.
자신이 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이들을 설득해 협조하게 만들어야 했다.
일행이 도착한 곳은 우수리스크 시내의 번화가였다.
장차민이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여기가 극동 최대의 시장인 ‘키타이스키 고로드(중국인들의 도시)’입니다. 우리 중국인은 2%밖에 되지 않지만 천오백 여개의 가게 대부분을 운영하고 있지요.”
“…….”
“중국에서 직접 공수해 온 다양한 질 좋은 제품을 인근 블라디보스토크의 1/3 가격에 판매해 아주 인기가 좋습니다. 이곳이 우수리스크 시에 가장 많은 세금을 내고 있을 겁니다. 안 그런가요, 로마노프 부청장.”
“맞습니다. 우수리스크 시의 보물 상자입니다.”
“한때 북한인들도 종업원들을 많이 고용해서 북한 경제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었지요.”
로마노프와 달리 이용순은 맞장구를 치지 않았지만 반박도 못 하는 게 사실인 듯했다.
그거 보란 듯이 진혁을 한번 쳐다본 장차민이 일행을 데리고 들어간 곳은 중심에 위치한 ‘만보각’이라는 차이니즈 레스토랑이었다.
장차민의 언행에는 거침이 없었다.
안내한 종업원에게 사장을 불러오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일행마저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보다 못한 희준이 한소리 했다.
“청장님을 모시고 온 자리입니다. 예의를 지키세요.”
“괜찮습니다. 여기 사장이 연변에서 주방장으로 있을 때 내게 큰 도움을 받은 자입니다. 이곳에 와서 성공했다면서 꼭 한번 찾아 달라고 어찌나 전화질을 해대는지.”
오히려 더 거들먹거리는 모습에 희준이 성질 같아서는 확 뒤엎어 버리고 싶었지만, 진혁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그럴 수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이 허겁지겁 나타나자 장차민이 혀를 찼다.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어야지. 청장님을 모시고 온다고 했잖아.”
“어디 계십니까?”
“……?”
“청장님 말씀입니다. 아, 소문원입니다, 회장님.”
“제가 아니라 이쪽이…….”
갑자기 인사를 받은 희준이 눈짓으로 옆을 가리키자 소문원이 허리를 90도로 꺾어 가며 다시 인사를 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회장님.”
“절 아십니까?”
“리카렁 회장님이 직접 전화를 주셨습니다. 라이꾸두 회장과 화인 기업가 분들도 전화해 한 점의 소홀함이 없게 하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저를 포함해 극동에 진출한 화교들은 회장님의 일을 적극 돕겠습니다. 무엇이든 시켜 주십시오.”
다시 고개를 팍 숙이는 소문원의 행동에 장차민의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진혁은 자신이 생각했던 그저 그런 사업가가 아니었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화교 대표 기업 회장이 직접 전화해 부탁할 정도로 거물이었다.
이곳에 진출한 화교의 힘을 믿고 거들먹거렸던 건데, 큰일이었다.
소문원이 작심한 듯 직접 만든 최고급 요리를 연달아 내놓아 다들 맛있게 먹었지만 장차민은 그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다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장차민이 나가자 로마노프가 말했다.
“총리께 극동에서 중국세의 확장이 우려스럽다고 보고를 드렸더니 청장님만 믿으면 된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맞았습니다.”
“여기 사장님이 과하게 받아들이신 겁니다. 다들 저를 좋게 봐주신 덕분이지요. 그나저나 로마노프 부청장님은 왜 의견을 말씀하시지 않으시는 겁니까?”
“저야 청장님이 결정하시는 대로 따르면 되지, 무슨 의견이 있겠습니까.”
“그러다 장차민 부청장님 말씀대로 계획대로 안 돼 애물단지로 전락하면 어쩌시려고요?”
“우리나라는 땅이 아주 넓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지지요. 제 생각은 묻지 마시고 편하게 지시해 주십시오.”
소련 연방이 해체됐다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국토가 넓은 나라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로마노프는 두만강 합작구에 내놓은 땅 정도는 망가져 봤자 별거 아니라는 태평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진혁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장차민 같은 자도 문제지만, 이런 식의 무사안일주의자인 로마노프도 문제가 있었다.
이런 자들을 보낸 왕칭린과 쿠렌코가 미워지려고까지 했다.
어떻든 그날 이후로 장차민은 더 이상 진혁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고 순순히 지시에 따랐다.
덕분에 일이 빠르게 진행됐다.
* * *
며칠 후 진혁은 희준과 함께 중국 측 접경 지역인 방촌의 둔덕에 올라서 있었다.
저 아래 두만강물이 흘러 바다로 모습이 보였다.
“이곳을 경계로 삼국이 나뉘어져 있어. 난 복합 쇼핑몰 두만강 시티를 여기에 조성할 생각이다. 각국 경계에서 0.5 제곱킬로미터씩 떼어서 총 1.5 제곱킬로미터, 즉 150만 제곱미터가 되겠지. 완성되면 세계 최대 복합 쇼핑몰로 등재될 거야.”
“엄청 넓겠는데?”
“두만강 시티는 단순한 쇼핑몰이 아니야. 백화점, 명품 매장 등 쇼핑 시설들도 들어오지만 호텔, 카지노, 그리고 테마파크, 공연장, 전시장 등 테마별로 개발하되 상호연계를 통해 관광객들이 지칠 때까지 놀 수 있는 공간이 될 거야.”
“다 좋아. 그런데 평지도 많은데 꼭 여기에 지어야겠어? 두만강 때문에 연결다리를 놓으려면 공사비가 많이 들 텐데…….”
그런 우려는 희준만이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인갑 사장도 같은 문제를 제기했었다.
하지만 진혁은 받아들이지 않고 무조건 그렇게 건설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진혁이 무거운 어조로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은 마음속의 비밀을 털어놨다.
“희준아, 우리가 여기에 완성한 거대 도시가 100년 후에는 어떻게 될까?”
“그거야 당연히…….”
무심코 답을 하던 희준이 말을 멈추고 커다랗게 변한 눈으로 진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 설마……?”
“맞아. 난 내 아이들, 그리고 또 그 아이들에게 이곳을 물려줄 생각이다.”
진혁은 임차 기간이 끝날 100년 후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획을 잘 세워야 해. 상호 연관에 최대한 초점을 둬서 하나로 묶어 그 가치가 유지되게 해야 해.”
“그래서 여길 택한 거구나.”
“맞아. 게다가 두만강 시티뿐만 아니라 나머지 지역의 개발도 최대한 많은 외국 기업들이 참여하게 할 거야. 그래야 되돌려달라고 못할 테니까.”
“무서운 놈……. 좋아. 내가 죽더라도 내 아이들이 여기 와서 날 기억할 수 있도록 도울게. 암튼 넌 내 친구지만 정말 멋진 놈이다.”
희준도 진혁의 속마음을 알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 * *
행정청으로 돌아왔을 때는 반가운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함반토타 항 운영 주식회사 권오일 부사장이었다.
부산항만공사 운영본부장으로 있다가 진혁의 제안으로 합류해 함반토타 항을 세계 최고의 항만으로 만든 핵심인물이었다.
진혁은 그에게 나진항을 둘러보고 계획을 세워 보라고 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나진항을 직접 보시니 어떻던가요?”
“개발하다 말아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였습니다. 시설들도 구식이라 거의 수작업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주변 인프라도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고요.”
“아마 그럴 겁니다. 어차피 싹 다 뜯어내고 함반토타 항 같은 스마트 항으로 개발할 거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심각한 문제라니요?”
진혁이 놀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