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두만강 시티
이번 사업은 핵심은 나진항이었다. 그곳에 문제가 있다면 상황이 심각했다.
진혁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나진항은 태평양으로 향하는 출구로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반도로 둘러싸인 만 입구에 큰 섬 두 개가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는 지리적 특성은 대형 항구로 거듭나기에 충분했다.
중국이 나진항에 욕심을 냈던 것은 동북 3성에서 생산되는 상품이나 자원 때문이었다.
나진항을 통하면 내륙 운송에 비해 시간이나 비용을 절반 이상 줄일 수 있었다.
러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블라디보스토크 항이 부동항이라는 것은 반만 맞는 이야기였다.
매년 겨울 꽝꽝 얼어붙어 보일러로 덥힌 뜨거운 물을 퍼부어 가며 결빙을 막아야 하는 ‘인공 부동항’이었다.
거기에 군사항 역할까지 담당해야 해서 여유가 없었다.
좁디좁은 졸로토이로크 만(灣)에 갇혀 항만 시설을 확충할 수도 없었다.
인근에 자루비노 항이 있기는 하지만, 수심이 낮은 데다 섬들이 가로막고 있어 대형 선박의 접안이 불가능했다.
부동항의 확보가 시급해 어려운 재정 상황에도 불구하고 핫산-나진 간 철도를 놓은 것이다.
그런 나진항에 문제가 있다면 큰일이었다.
권오일이 말했다.
“부산항만이 위기에 처한 것은 세계 경기 불황으로 물동량이 준 것도 있지만, 보다 근원적인 것은 다수의 소규모 터미널 체계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물량이 분산되고 타 부두 환적 화물의 육상 운송을 위한 추가 비용과 시간이 발생했습니다. 또한 선박이 바다에서 대기하는 체선도 증가하면서 급격하게 경쟁력이 약화됐습니다.”
“대형화로 전환하지 않은 이유가 뭡니까?”
“전환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할 수 없었습니다. 외국 선사의 물량 유치를 위해 그들에게 각 터미널 운영을 맡긴 게 패착이었습니다. 각자 사정이 다르다 보니 대형화 전환에 대해 의견 조율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나진항 역시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현재 세 개의 부두 중 두 개가 중국과 러시아에 장기 임차된 상태고, 계획 중인 4, 5, 6번 부두는 중국과 계약된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국가에서 각자 관리하게 두면 부산항 같은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대책이 가장 시급합니다.”
권오일의 결론에 진혁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부산항의 사정은 몰랐지만, 진혁은 처음부터 나진항을 스마트 항만으로 개조할 생각으로 양국 정부로부터 양해를 받아 놓은 상태였다.
물론 나중에 항만 운영 주식회사가 설립되면 지분을 나눠 줘야겠지만, 진혁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괜히 놀랐잖습니까. 우리가 개발에서 운영까지 모두 맡기로 이미 합의를 했습니다.”
“역시 회장님이십니다. 전 그런 것도 모르고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만큼 애착이 많으시다는 방증이니 오히려 제가 감사하지요. 아무튼 부사장님은 나머지 일은 제게 맡기고 함반토타 항처럼만 만들어 주십시오.”
“그건 아니지요.”
“……?”
“함반토타 항은 처음 시도한 것이라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이제 충분히 경험을 쌓았으니 그보다 훨씬 더 멋진 항만을 만들어야지요. 지켜봐 주십시오.”
“하하하하. 부사장님이 사람 놀리시는 재주가 있으신지 몰랐습니다. 각오가 그러시다니 큰 기대를 하며 지켜보겠습니다.”
함반토타 항이 세운 하역 효율성 세계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권오일이 건설할 나진항이 기록 갱신을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되었다.
* * *
얼마 후 진혁은 일단의 외국인들을 만났다.
유럽 최대 복합 리조트 및 엔터테인먼트 기업인 EMC 그룹 관계자들이었다.
유럽 최대 복합 쇼핑몰 ‘몰 오브 EU’, 홍콩의 랜드마크 ‘하버 시티’를 직접 설계하고 시공까지 한 실력 있는 회사였다.
대회의실의 발표회장에서 EMC 그룹의 두만강 시티 개발 계획 설명회가 개최됐다.
희준이 개발국장으로 그간 진혁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했는지 원하던 모습의 조감도가 나왔다.
“이번 프로젝트의 컨셉은 ‘편리함’으로 잡았습니다. 각 테마별 유기적 연결과 4차원 최신 기술의 적극 도입을 통해, 관광객들이 쇼핑과 놀이에 집중할 수 있게 했습니다. 공항에서 짐을 찾을 필요 없이 도착하자마자 두만강 시티 관광을 하고 예약한 호텔로 돌아가면 짐이 도착해 있는 서비스가 대표적입니다.”
직접 설명에 나선 ENC 그룹 랑거 회장의 발표도 깔끔했다.
진혁이 박수를 치자 참석한 이들 모두 손바닥을 마주치며 EMC의 계획에 만족함을 드러냈다.
흡족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 물러나려는 랑거를 진혁이 얼른 붙잡았다.
“잠시만요.”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일부 구역이 빈칸으로 남아 있는데, 어떤 용도입니까?”
“아, 그건 두만강 시티가 세계 최대 규모다 보니 우리가 가진 아이디어만으로는 다 채울 수가 없어 여유 공간으로 남겨 뒀습니다. 사업을 진행하면서 이곳에 필요한 아이템을 찾아 채울 예정입니다. 좋은 의견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럼 제가 먼저 한 가지 의견을 내놓겠습니다. 북한 쪽 A-11 구역을 의료 단지로 조성했으면 합니다.”
“의료 단지요?”
랑거 회장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두만강 시티는 관광과 쇼핑, 놀이가 주 테마인데 의료는 너무 이질적인 영역이었다.
그건 비단 랑거만의 생각이 아닌 듯 다들 의아한 표정으로 진혁을 바라봤다.
진혁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치료라는 게 하루 이틀에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간단한 성형 수술만 하더라도 최소 일주일은 머물러야 합니다. 거기에 해외 의료 서비스를 받을 정도면 각 나라의 부유층이라는 방증입니다. 그들이 갑갑한 병실에서만 머물겠습니까. 실제 조사 결과에서도 의료 관광객들이 일반 관광객들에 비해 체류 기간이 길고 씀씀이도 크다고 나타났습니다.”
“……!”
“한국은 높은 의료 기술 수준과 뛰어난 인프라를 갖추고 있습니다. 작년에 의료 목적으로 한국을 찾은 외국인의 숫자가 30만 명 수준이고, 매년 30% 이상의 고성장을 해 오고 있습니다. 국적별로 보면 중국이 가장 높고, 그다음이 미국과 러시아입니다. 이곳과 직접 연결된 국가들이 상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는 매년 20만 명에 이르는 의료 관광객이 해외로 나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 진혁이 알라딘 그룹의 실질적인 주인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 알라딘의 주 무대가 중동이었다.
다들 눈이 반짝였다.
그들을 이곳에 불러들일 수만 있다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불러올 게 틀림없었다.
“회장님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랑거 회장이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듯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어 여러 사람이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놓는 바람에, 좀 더 시간이 지체된 뒤에야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밖으로 나온 진혁에게 희준이 옆에서 툴툴거렸다.
“그런 계획은 먼저 이야기했으면 미리 반영했을 것 아니야. 일부러 엿 먹이는 것도 아니고.”
“다른 쪽 일에 대해 조사하다가 떠오른 생각이었어.”
“그런데 왜 하필 A구역이야. 중국, 러시아 의료 관광객들이 많으면 그쪽으로 배치해야 하는 것 아니야?”
두만강 시티는 각 나라별로 구역이 나눠져 있었다. 북한, 러시아, 중국 순으로 A, B, C였다.
“북한 의료 수준이 최악이더라.”
“……!”
진혁의 말에 희준의 눈이 번뜩 뜨였다.
남북 경협은 한국 정부와 기업에 맡기고 자신은 극동 개발에만 전념하겠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는 이곳의 일을 챙기기도 바쁠 텐데 북한 사회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었다.
그간 일이 많다고 투덜댔던 희준은 배부른 투정이란 것을 깨달았다.
함께 식사를 마치고 행정청장실에 남아 둘이서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랑거 회장이 물었다.
“두만강 시티 개발에는 15억 달러가량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무래도 규모가 있으니 그 정도는 소요되겠지요.”
“투자 유치가 가능하시겠습니까?”
랑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정적 자금 확보는 EMC 그룹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간 각국이 경쟁적으로 대규모 개발 계획을 발표했지만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10%로 되지 않았다.
유럽발 금융 위기 이후 세계 경기가 하락한 데다 미중 무역 전쟁까지 겹쳐 각국의 재정 상황이 급격히 악화됐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막대한 오일 달러를 들고 건설 시장의 큰 손으로 군림하던 중동 국가들도 최근 저유가로 타격을 입었다.
계획을 축소하거나 취소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진혁이 답했다.
“투자 유치는 따로 받지 않을 겁니다.”
“그럼 한반도 펀드 자금이 투입되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 돈은 다른 지역 개발에 쓰일 겁니다. 두만강 시티 건설비는 순수하게 제 개인 자금으로 해결할 겁니다.”
랑거 회장의 입이 딱 벌어졌다.
진혁이 세계적인 부자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15억 달러는 적은 돈이 아닌데 그걸 선뜻 투자한다는 결정이 놀라웠다.
진혁이 말을 이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투자를 받으면 이런저런 요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중구난방으로 개발되기 십상입니다.”
“그건 그렇지요.”
“두만강 시티는 통으로 개발해야 최대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게 계획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건설까지 전적으로 제가 책임지고 진행할 겁니다. 운영만 전문 운영사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그러니 회장님은 각 분야별 최고의 건축 회사를 선정해 시공을 맡겨 주십시오. 국적은 상관 마시고요.”
“한국 업체에 우선권을 주시는 게 아니시고요?”
“전혀요. 두만강 시티를 세계가 참여하고, 세계인이 찾아오는 지구촌 공동축제의 장으로 만들겠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당연히 시공도 세계적 기업들이 맡는 게 맞습니다. 모든 지원과 협력을 아끼지 않을 테니 끝까지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정말 감사합니다. 청장님께서 자금까지 내놓으시고 믿어 주신 만큼, EMC도 모든 역량을 집중해 두만강 시티를 세계 최고의 복합 쇼핑몰로 만들겠습니다.”
랑거가 진혁의 결정에 진심으로 탄복하며 의지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진혁이 일부러 세계 기업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진정한 이유를.
* * *
퇴근한 진혁은 희준과 함께 고려인 정착촌으로 갔다.
그곳에는 전과 달리 번듯하게 100여 가구로 구성된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알라딘 건설에서 모듈러 공법을 이용해 보름 만에 완성했다.
그 빠른 속도에 이곳의 고려인은 물론 인근의 러시아인들까지 놀라 구경 올 정도였다.
솔빈 센터로 가자 바실라 최 회장과 서창목 회장이 먼저 와 있었다.
“저희가 좀 늦었습니다.”
“사업하시는 분이 바쁘셔야지요.”
“연변에 건설된 학교는 마음에 드셨습니까?”
진혁이 우선 서창목 회장에게 물었다.
이곳에는 한국인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위한 숙소를 먼저 지었지만 조선족 자치주 쪽에는 학교를 지어 줬다.
“너무 빠른 속도로 지어져서 다들 부실한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아주 튼튼하게 지어져서 다들 흡족해하고 있습니다. 다른 시설이나 기자재도 최신식이라 베이징의 웬만한 사립학교보다 낫다며 좋아들 하십니다.”
“선생님들 모집은요?”
“이곳 소식이 베이징까지 퍼져 돌아오겠다는 동포들의 문의가 끊이질 않아 문제없습니다. 다음 학기부터는 정상 운영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신설 학교가 세워지면 신입생부터 받아들이며 차근차근 학년을 늘려 가는 게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진혁은 과감하게 전학생까지 받아들여 전 학년 과정으로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잃어버린 한국어를 찾아 주는 게 시급해서였다.
모든 학년에 필수적으로 한국어 과목을 넣게 했고, 방과 후에는 주민을 상대로 한국어 교육도 병행하게 했다.
그건 이곳 고려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을 때 저녁 식사가 나왔는데, 쟁반에 반찬을 담아 나르는 이가 놀랍게도 권기남이었다.
“공장장님이 왜 여기서 반찬을 나르고 계십니까?”
“나르라잖아.”
“누가요.”
“할……. 아니다. 너는 주면 그냥 먹으면 되지, 괜히 물어서 사람 곤란하게 하냐.”
“……?”
“네가 이 나이에 이 멀리까지 와서 네놈 밥이나 챙겨 주고 있다니, 참 내 신세도…….”
괜히 화를 내고 투덜거리며 돌아가는 권기남의 이상한 행동에 진혁뿐만 아니라 나머지 사람도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직 바실라 최만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