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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292화 (292/307)

292화. 권기남의 춘정

식사를 하며 잠시 멈췄던 학교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바실리 최가 생각난 듯 말했다.

“참,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 재이주 문의도 심심찮게 오고 있습니다.”

“재이주요?”

“스탈린 때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됐던 이들이 소련 연방 붕괴 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두만강 국제 합작구가 생긴 게 거기까지 소문이 난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오신다면 우리야 좋지요. 여기도 인구가 많이 부족한데.”

“저도 같은 이야기를 해 주고 있지만, 문의만 많을 뿐 실제로 오겠다는 이는 얼마 안 됩니다.”

“왜요?”

의아해하는 진혁에게 바실리 최가 그쪽 고려인들의 사정을 들려주었다.

“그곳으로 강제로 이주당하고 벌써 4대째가 흘렀습니다. 이미 그곳에 동화되어 언어도 다르고 고려어도 잘 못한답니다. 단순히 선조들의 고향이라는 막연한 기대만으로 몇 대째 일궈 온 삶의 터전을 옮기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지요.”

“그건 그러네요.”

“당장 이곳으로 재이주해 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우리말과 문화라도 잊지 않았으면 싶습니다. 회장님이 바쁘신 줄 알지만 그들 역시 같은 한민족이라 생각하시고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시간 나는 대로 그쪽 고려인들에 대한 배려책도 고민해 보겠습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진혁은 희준과 함께 솔빈 센터를 나왔다.

숙소로 가는 길에 진혁이 물었다.

“그런데 아까 공장장님 좀 이상하시지 않았어?”

“이상했어. 그렇지 않아도 요즘 공장장님이 이상해지셨다는 말이 있어.”

“그래?”

“밤중에 나가셨다가 새벽에 돌아오시곤 한대.”

“밤에 나가 새벽에 돌아와?”

“같이 사는 곽 사장님이 그러시는데, 늙어서 잠이 안 와 동네 한 바퀴 돌고 오셨다고 하셨나 봐. 몽유병도 아니시고 왜 이 좁은 동네를 밤새 돌아다니시냐.”

숙소로 쓰고 있는 아파트는 한국의 20평대 정도로 방 두 개짜리였다.

진혁은 희준과 쓰고 있고 권기남은 옆집에서 두리이엔티 곽영섭 사장과 지내고 있었다.

제주도에서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배려해 준 것이었다.

숙소에 도착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진혁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권기남은 자신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이었다. 뭔가 문제가 있다면 당장 치료부터 받게 해야 했다.

띠리리릭.

도어락이 닫히는 희미한 소리에 진혁이 얼른 외투를 들고 일어났다.

일부러 잠까지 쫓으며 늦게까지 자료를 검색하고 있었다.

권기남 성격상 무조건 검사를 받자고 하면 벼락이 떨어질 터라 현장을 잡으려고 대기했던 것이다.

급히 밖으로 나온 진혁이 화들짝 놀랐다.

어두운 거실에 누군가 서 있었는데 희준이었다. 그 역시 옷을 차려 입고 있었다.

“어디 가려고?”

“문소리가 나는 것 보니 공장장님이 나가시나 봐. 따라가 보자.”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는 희준의 모습에 진혁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게 기특했다.

“자식, 제법인데?”

“너한테 중요한 분이시잖아.”

“……!”

희준은 권기남보다 진혁을 위해 나온 것이다. 역시 친구였다.

두 사람은 잠시 시차를 두고 문을 열고 나갔다.

“야, 천천히 따라가야지. 너무 바짝 붙으면 들키잖아.”

“지금 네 목소리가 더 크거든? 좀 조용히 해.”

둘이 토닥거리며 어둠 속에서 앞서 가는 권기남의 뒤를 밟았다.

권기남은 정말 산책이라도 나온 듯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여유로운 걸음으로 마을 외곽 길을 따라 걸었다.

그에 따라 진혁의 얼굴이 차츰 굳어갔다. 희준의 말대로 정상인의 행동이 아니었다.

한참 동안 걸어 권기남이 도착한 곳은 고려인 정착촌이었다.

그중 한 집의 초인종을 누르는 모습에 몸을 숨기며 따라온 희준이 급히 말했다.

“어? 저기 타냐 할머니 댁 아니야?”

“그러네.”

“야, 말리자. 괜히 할머니 잠 깨시겠다.”

희준에게는 권기남보다 타냐에 대한 마음이 더 큰 모양이었다.

진혁도 그냥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나서려는 순간, 문이 열리며 타냐가 나왔다.

“아이참, 그냥 기다리시라니까. 그러다 남들이 보면 어쩌시려고 자꾸 초인종을 누르세요.”

“이 야밤에 보긴 누가 봐. 일부러 한 바퀴 빙 둘러 왔고만. 다들 잠들어서 업어 가도 몰라.”

“요즘 회장 눈초리가 이상해요. 남들이 알면 민망하단 말이에요.”

“남자와 여자가 좋아하는 거야 자연의 이치이거늘 뭐가 민망해.”

“그래도…….”

“춥소. 얼른 들어갑시다.”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이 문 안으로 사라진 지 얼마 후 진혁과 희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 모두 얼굴 한가득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공장장님도 참…….”

“할머니가 저러실 줄은 몰랐다.”

“아무튼 우리가 걱정했던 상황이 아니라 다행이다. 그만 가자.”

숙소로 돌아가는 두 사람의 발걸음에는 왠지 힘이 없었다.

일이 잘 마무리된 것은 좋은데, 집을 떠나온 지 벌써 한 달째가 돼 가고 있었다.

희준이 결국 참지 못하고 속마음을 드러냈다.

“참 재주도 좋으셔. 여긴 오신 지 얼마나 되셨다고……. 엄청 부럽다. 우리 지현 씨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나도 그래. 우리 한국에 다녀오자.”

“정말?”

“대충 계획은 잡혔잖아. 서울 가서 처리해야 할 일들도 있고.”

“그럼 나야 좋지. 아자! 드디어 집에 가는구나.”

희준이 별이 총총 빛나는 하늘에 대고 두 손을 불끈 쥐고 흔들며 기뻐했다.

역시 가족과 지내는 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다음 날.

출근한 두 사람은 잠시도 자리에 앉아 있지 않고 바삐 움직였다. 한국에 다녀오는 동안 문제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직원들만 죽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삼 일 후 직원들을 일 더미에 파묻어 버린 진혁과 희준이 마침내 한국으로 떠났다.

* * *

주말을 오랜만에 가족과 보낸 진혁은 한 주가 시작되자 바쁘게 움직였다.

진혁과 희준이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AK 알라딘 화장품의 한지철 사장이었다.

사무실로 찾아가지 않고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회사로 찾아가면 다른 이들에게 부담을 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진혁이 넙죽 인사부터 했다.

“그간 편안하셨습니까?”

“편안하기는. 나도 너희들 따라 합작구로 갔어야 했어.”

“일이 힘드세요?”

“사업은 잘돼. 네가 동남아 시장을 개척해 놓은 데다 베트남에서 안근석 감독 효과 덕분에 한국 화장품 인기가 하늘을 찌를 지경이다.”

“그런데 왜……?”

“사업이 잘되는 것이랑 보람을 느끼는 것이랑은 다르지. 너희 둘과 정신없이 일을 벌일 때는 힘은 들었지만 보람이 컸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굳이 출근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아.”

씁쓸한 표정을 짓는 한지철에게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또 일거리를 가지고 왔잖습니까.”

“그래?”

반색하는 한지철에게 두만강 시티 개발 계획과 의료 구역에 대해 들려줬다.

“의료 관광 사업을 하겠다는 거냐?”

“당연하지요. 효과가 좋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덕분에 우리도 효과를 많이 봤고.”

진혁은 정인영이 태후 화장품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의료 관광에 대해 조언을 해 주었었다.

그에 정인영이 강남의 유명 성형외과와 연계해 미용 분야까지 사업을 확장해서 크게 호평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실무적인 일을 맡아 진행한 것이 한지철이라 누구보다도 그 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진혁이 물었다.

“강남 성형외과 쪽 사정은 어떻습니까?”

“그쪽도 치열하긴 마찬가지지. 좀 뜬다 싶으니까 너도 나도 개업하는 바람에 전체적으로 힘들다고 하더라. 관광객들이 그만큼 늘어나는 게 아니니.”

“두만강 합작구가 그들에게 탈출구가 될 겁니다. 선배님이 기존 거래처를 상대로 두만강 시티 계획을 적극적으로 홍보해 주십시오.”

“알았다. 걱정마라.”

한지철은 언제 따분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변했다. 드디어 자신이 집중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얼마간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노년의 사내가 다가와 물었다.

“혹시 서진혁 회장님이십니까?”

“맞습니다, 신호순 박사님.”

“급한 수술이 있어서 제가 좀 늦었습니다.”

“환자가 우선이지요. 앉으십시오.”

신호순이 옆에 앉자 한지철이 엉덩이를 들었다.

“그럼 나는 이만…….”

“아닙니다. 선배님도 함께 들으시면 좋은 이야기입니다. 신호순 박사님은 한국대 연구 부총장님이신데, 병원 소아외과장도 겸임하고 계십니다. 최근 남북한 공동으로 북한의 의료 실태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돌아오셔서, 그쪽 사정을 듣고 싶어 모셨습니다.”

“아, 예. 알라딘 화장품을 맡고 있는 한지철입니다.”

서로 인사를 하고 나서 진혁이 신호순에게 물었다.

“조사해 보시니 어떻던가요?”

“북한의 열악한 보건 위생과 빈약한 영양 상태를 나열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핵과 미사일 개발에 몰두하느라 주민의 건강을 도외시한 북한의 과거 지도자들에게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예상했던 일이라 다들 무덤덤하게 들었다.

하지만 이어진 신호순의 말에 반전이 있었다.

“역설적으로 그런 북한의 열악한 보건 위생 덕분에 북한은 의약 연구의 보고(寶庫)였습니다.”

“보고요?”

“작년에 귀순하다 총상을 입은 북한군 병사의 몸속에서 27센티 회충 등 수십 마리 기생충들이 발견된 건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북한 농촌의 기생충 감염률이 90%대에 이른다고 합니다. 대신 우리나라 어린이들에게 흔한 아토피 환자가 북한에는 없었습니다.”

“……?”

“기생충과 아토피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토피는 자기 면역 체계가 자기 신체를 공격하는 자가 면역 질환입니다. 좀 더 조사해 봐야겠지만, 자기 면역 체계가 외부 침입자인 기생충을 공격하느라 자기 신체를 공격할 여유가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수준 높은 의학 지식에 대한 이야기라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희망적인 부분이 있다는 말에 기대가 됐다.

신호순이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북한 기생충을 연구해 관련 항원을 찾아 약을 만들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어린이 아토피 증세가 심각한 일본 등에만 팔아도 연간 5조 원 이상이고, 이미 선진국에서 박멸된 터라 기생충 실물 표본을 만들어 팔기만 해도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 방법도 있군요.”

“이번에 함께 조사에 참여한 평양의대 교수가 들려준 북한의 소아 백혈병 양상도 흥밋거리였습니다. 또한 북한 천연물 임상 연구 결과와 우리 기술을 결합하면 천연물 신약 개발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막대한 수익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보건 의료 분야에서만 노벨상 10개는 나올 수 있는 아이템들을 확인한 게 개인적으로 이번 조사의 가장 큰 성과였습니다.”

신호순은 이어서도 적정 기술 활용해 남북이 함께 연구를 하면 의학적인 성과와 더불어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다며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설명을 다 듣고 난 진혁이 크게 고무된 기분으로 말했다.

“말씀 감사합니다. 북한을 도와줘야겠다는 생각만 했지, 그게 큰 사업거리가 될 거란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기대하시지는 마십시오. 의학 분야 연구라는 게 단시일 내에 성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보니 신약 개발에만도 수년은 기본으로 소요됩니다.”

“개발비라면 걱정 마십시오.”

“개발비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국가의 정책적인 의지도 있어야 하고, 다수의 연구원들이 참여해야 하는데, 현재 남북한의 의료 격차를 감안하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전과 달리 신호순이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지만 진혁에게는 준비한 복안이 있었다.

“국내에서라면 그렇지만 두만강 합작구라면 사정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두만강 합작구에서 이번 일을 벌이시겠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교수님을 뵙자고 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북한 의료 실상에 대해 알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더 큰 용건은 한국대 병원 분원 설치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진혁은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신호순에게 두만강 시티 내 의료 구역 건설 계획에 대해 들려줬다.

“분원 설치가 도움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당장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북한 주민의 열악한 생활 형편을 감안하면 병원에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꼭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습니다.”

진혁이 바로 내놓은 대안에 신호순은 물론, 함께 배석한 희준과 한지철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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