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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293화 (293/307)

293화. 일본 합류

“원격 진료가 있잖습니까.”

전혀 생각지 못한 방법이었다. 진혁이 던진 한마디에 장내가 침묵에 휩싸였다.

그만큼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사전적인 의미의 원격 진료는 온라인을 통해 수행하는 종합 의료 서비스였다.

의사가 하는 다섯 가지 진찰인 문진, 시진, 촉진, 타진, 청진을 비롯해 소변검사, 혈액 검사, 심전도 검사 등까지 가능했다.

공간 제약 없이 진단, 처방, 치료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원격 진료는 불법이었다.

새벽 진료는 응급실 아니면 못 한다. 새벽에 문을 연 약국 찾기도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였다.

그에 반해 외국은 속속 원격 진료를 도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익 집단 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인해 일부 섬 지역을 상대로 제한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게 대한민국 원격 의료가 처한 현실이었다.

진혁이 그 민감한 문제를 들고 나왔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두만강 합작구는 한국의 법을 따르지 않아도 되니 법적인 문제는 전혀 없습니다. 거기에 북한도 수준 높은 한국의 의료 서비스를 받게 될 테니 반대할 이유가 없고요. 또한 알라딘은 스마트 기술 연구소와 헬스 케어 부분의 사업을 진행하니, 원격 의료 서비스를 위한 준비는 모두 갖춰져 있습니다.”

“회장님의 사업에 적극 동참하실 수 있도록 이사장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신호순이 즉시 화답했다.

이런 조건이라면 무조건 참여해야 할 사업이었다.

두만강 합작구는 북한만이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까지 어우르고 있었다. 한국 의료 기술을 세계로 전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다음으로 진혁이 찾아간 곳은 광화문에 있는 남북 경협 사무실이었다.

주명근 위원장이 반갑게 맞아 줬다.

“어서 오시오, 서 회장.”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그리고 이제는 행정청장입니다.”

“사업가는 사업가로 불려야지. 그 호칭은 관료 느낌이 나서 별로네.”

주명근에게 진혁은 여전히 한국 재계를 책임질 재목이었다.

자리에 앉아 비서가 차를 내놓고 돌아가자 진혁이 물었다.

“개척단 모집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신청자가 너무 많아서 골치 아파.”

진혁은 행정청을 북한 주민과 고려인, 조선족으로 꾸리려고 했는데 거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서로 말만 통할 뿐 한국에 대해 너무 몰랐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아래 지낸 세월이 길어 시장 경제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떨어졌다.

이에 진혁은 급히 주명근에 연락해, 관련 업무 경험이 있는 한국의 경력자를 모집해 달라고 했었다.

‘극동 개척단’이란 이름으로 각 나라별로 만 명씩 모집 공고를 냈었다.

숙식 제공에 기존 경력까지 인정해 준다니 지원자가 물밀듯이 밀려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접수되는 대로 저희 쪽에 보내 주시면 선발해서 개별 통보하겠습니다.”

“그것보다 다른 문제가 있어. 청년들이 문의가 빗발치고 있네. 인턴이라도 뽑아 달라고 사정하는데, 직원들이 곤욕을 치루고 있어.”

“아, 청년 실업!”

중장년층의 재취업보다 더 심각한 게 청년 실업이었다. 아무런 사회 경험이 없어 취직에서도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진혁이 말했다.

“그럼 청년 인턴도 각 만 명씩 뽑겠다고 공고해 주십시오.”

“본격적인 사업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닌가?”

“말씀 드렸잖습니까, 이번 사업에 제 모든 것을 걸겠다고.”

“……!”

“적응해서 계속 일해 주면 좋지만, 귀국하더라도 그곳의 경험이 그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걱정 말고 추진해 주십시오.”

“……알겠네.”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과의 약속을 실천하는 진혁의 행동에 주명근도 초심으로 돌아가 더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후 두 사람은 그간의 사업 진행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었다.

* * *

진혁은 다음 날 청와대에 들러 이현국 대통령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고, 저녁에는 알라딘을 맡은 김선혁 회장과 저녁을 같이 먹었다.

그 이후는 주말이라 희준 가족과 함께 강릉의 부모님 댁으로 건너갔다.

강원도는 남북 화해 분위기에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서울에 올라온 진혁은 서서히 떠날 준비를 했다.

자신이 벌여 놓은 일 때문에 현지에서 고생하는 직원들을 생각하니 마냥 가족들과 편히 지낼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진혁의 결정은 하루 미뤄야 했다.

갑자기 찾아온 손님 때문이었다.

카페로 가자 쇼다 대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 이렇게 무작정 찾아왔습니다.”

쇼다는 말처럼 정말 급한 일이 있는지 표정까지 다급해 보였다.

진혁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말씀해 보십시오.”

“쿠렌코 총리께서 그간 논의했던 일-러 간 해저 터널을 중단하시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셨습니다. 혹시 그것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글쎄요. 지난번에 뵈었을 때 북한을 통과하는 가스관 건설에 대해 합의를 했습니다. 아마 그 때문에 그쪽 해저 터널에 대한 필요성이 줄어들어서 그런 결정을 내리신 것 같네요.”

진혁이 모른 척 적당히 둘러댔다.

원래는 쿠렌코 총리와 일본을 다급하게 만들어 자신을 찾아오게 하면 진혁이 협상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쇼다의 얼굴이 당장 낭패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북한의 도발에 따른 국제 사회의 제재를 기회로 러시아와 해저 터널을 뚫어 부족한 가스를 확보하고 철도를 연결해 극동의 물류를 장악하려 했다.

마침 재정 악화에 시달리는 쿠렌코 총리도 적극적이라 사태를 낙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북한의 지도자가 바뀌고 나서 남북이 화해하며 분위기가 한순간에 바뀌어 버렸다.

“국가 간의 신의라는 게 있는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논의 중단을 통보한 것에 총리께서 심히 불쾌해하고 계십니다.”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귀국의 요청으로 한-일 간에 해저 터널을 논의하다가 일방적으로 러시아로 방향을 튼 총리께서 화내실 일은 아닌 것 같네요.”

진혁의 날카로운 지적에 괜히 말을 꺼냈던 쇼다의 입이 콱 막혀 버렸다.

결국 쇼다는 전법을 바꿨다.

진혁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사업이 한국까지만 연결되고 끝나 버리면 일본은 철저히 고립된 채 대륙 진출의 꿈을 접어야 했다.

무조건 엎드려 빌어야 할 상황이었다.

“도와주십시오, 회장님.”

쾅!

쇼다가 머리를 너무 깊숙이 숙이는 바람에 테이블에 부딪혔다.

상당히 아팠을 텐데도 쇼다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마땅찮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진혁이 입을 뗐다.

“고개 드십시오. 그렇게 해서는 말씀을 드릴 수 없잖습니까?”

“그럼 도와주실 겁니까?”

“그 전에 몇 가지 조정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간 논의됐던 한-일 간 해저 터널은 일본 가라쓰 시에서 대마도를 거쳐 부산으로 연결하는 A 노선과 거제도로 가는 B 노선이었다.

그중에 A노선이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른 상태였다.

“그간 조사된 바로는 공사비가 100조 원에 달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40조 원은 양국이 공동 투자하고, 60조 원은 아시아개발은행으로부터 1% 저리로 차관을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투자비가 크지만 양국이 얻는 경제적인 효과는 그보다 훨씬 더 큽니다.”

일본 측 추장에 따르면 한국은 54조 원, 일본은 88조 원의 경제적 파급 효과를 얻는다고 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양국 정부가 일정 지분을 출자하되 민간이 경영권 행사를 주도하는 ‘민관(民官) 합동 법인’ 체제가 합리적이라고 판단해 한국 정부에 제안해 놓은 상태입니다.”

“청와대로부터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거기에 문제가 좀 많더군요.”

“……?”

“한일 해저 터널 개통으로 한국이 얻는 이익이라고는 양국 간 관광 산업 발전과 일본으로 오가는 물류비용 절감 정도입니다. 그에 반해 일본은 대륙 진출로 확보, 남북한, 중국, 유럽과의 교역 및 인적 교류 확대 등을 꾀할 수 있게 됩니다. 이건 누가 봐도 일본이 훨씬 남는 장사잖습니까?”

진혁의 따끔한 지적에 쇼다가 찔끔한 표정을 짓다가 어렵게 답을 내놓았다.

“그래서 ‘민관 합동 법인’을 제안한 겁니다. 민간 기관이 양국의 경제적 이득을 철저히 파악해서 균등하게 나누면 불평등 문제는 해소될 것으로 보입니다.”

“대신께서는 양국 정부와 국민들이 서로가 내놓은 자료를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신뢰한다고 보십니까?”

다시 이어진 진혁의 냉철한 지적에 쇼다의 입이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일본이 침략 역사에 대한 반성은커녕 부인으로 일관하면서 오히려 군국주의 부활을 추진하는 모습에 한국인들의 반일 감정은 극에 달해 있었다.

일본 국민들 역시 이를 반한 감정으로 표출하고 있어 양국 국민들 간의 갈증의 골이 깊어진 상황이었다.

쇼다가 침묵만 지키자 진혁이 어쩔 수 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

“대신께서 아시다시피 전 일본에도 사업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지금은 지구촌 시대입니다. 서로 국경 장벽을 허물고 이웃처럼 협력해서 함께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귀국의 국수적인 형태는 심히 실망스럽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 해저 터널은 동북아 발전에 꼭 필요한 사업이긴 합니다. 제 의견을 받아들이신다면 저도 적극 돕겠습니다.”

“무엇이든 말씀만 해 주십시오. 최대한 반영하겠습니다.”

앞뒤가 꽉 막힌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라도 만난 듯 쇼다가 반색하며 답했다.

“먼저 현재의 계획은 철도와 도로를 동시에 건설하게 계획되어 있습니다. 이는 공사비의 증가는 물론 공사 기간이 길어지는 문제로 이어집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우선 철도부터 깔아 그 성과를 보고, 도로 건설은 그 이후 추진했으면 싶습니다.”

“그건…….”

“물류에 욕심을 내시면 아무것도 안됩니다.”

핵심을 찌르는 말에 쇼다의 눈이 커졌다.

일본이 해저 터널을 연결하려는 이유는 대륙과의 육상 운송로 연결이었다.

이를 통해 부산항이 가지고 있는 경제 지리학적 이점을 빼앗아 온다는 복안이었다.

“한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대통령께서 하시고 싶어도 국민 여론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계속 욕심을 부리면 일본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한국으로서는 전혀 아쉬울 게 없는 상황이니까요. 건설 비용도 수익자 부담의 원칙에 따라 일본 측이 전액 부담하는 게 맞습니다.”

“헉. 그건 너무 무리입니다. 우리 총리님께서도 국민을 설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겨우 철도 연결만으로…….”

“왜 철도만 보십니까? 가스관은요.”

“……가스관을 연결해 주시겠다는 겁니까?”

“원하신다면요.”

진혁의 말에 쇼다의 눈이 반짝였다.

일본은 지난해 LNG를 수입하는 데 사상 최대 금액인 7조 엔을 썼다.

전부를 러시아산으로 채울 수는 없겠지만, 그중 3조 엔만 가스관으로 대체해도 2조 엔을 줄일 수 있었다.

게다가 일본은 러시아의 사할린 가스전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고, 추가 가스전 개발 사업에도 계속 참여 중에 있었다.

그렇게 되면 수입 단가를 훨씬 더 낮출 수 있었다.

쇼다가 고맙다며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진혁의 말이 더 빨랐다.

“최근 양국 간의 관계가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배상 문제로 인해 악화된 것으로 압니다.”

진혁이 닛뽄 그룹의 허물을 덮어 주는 조건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재협상을 통해 일본 측의 배상을 받아낸 일이 있었다.

하지만 강제 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최근 한국 대법원이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이에 일본은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완전히, 최종적으로 소멸됐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쇼다의 얼굴이 당연히 곤혹스럽게 변했다.

가스관이 탐이 나긴 했지만, 강제 징용 피해자의 배상은 정치적으로 너무 큰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이를 수용한다면 내각의 존립마저 장담할 수 없었다.

막 입을 떼 거부하려던 쇼다가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진혁이 이런 문제를 모르고 제안했을까? 절대 아니었다. 그가 아는 진혁은 사고의 끝이 없는 사람이었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복안이 있으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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