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야말 LNG 프로젝트
“강제 징용 피해자의 배상은 소송을 당한 전범 기업들이 책임지면 됩니다. 정부가 나설 이유가 없습니다.”
한껏 기대했던 쇼다는 진혁의 답변에 크게 실망했다.
“그 기업들이 현재 일본을 이끌고 있어서 정부가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은 회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일본은 왜 전범 기업을 정리하지 않고 오히려 키운 것인지……. 쯔쯔쯧.”
혀까지 차며 강력한 뒤끝을 보여 준 진혁이 말을 이었다.
“쿠렌코 총리와 합의한 것은 가스만이 아닙니다. 전기도 함께 받기로 했습니다.”
“전기도요?”
“북한의 전기 사정이 열악해서요. 고속 철도를 깔아도 전기가 없으면 무용지물이지 않습니까. 이왕 가져오는 것, 좀 더 가져와서 나눠 드릴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진혁이 일부러 말을 길게 늘어뜨리는 사이 쇼다의 눈동자가 빠르게 돌아갔다.
한국전력이 독점적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각 지역별로 별도의 민간 전력 회사가 운영되고 있었다.
거기에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탈원전 정책을 펴고 있었다.
부족한 전력 확보를 위해 전력 소매 전면 자유화 조치를 단행해, 외국 기업까지 전력 사업을 할 수 있게 개방했다.
자본력이 앞서는 전범 기업들이 앞장서서 전력 소매 시장 선점에 나선 것은 당연했다.
쇼다가 물었다.
“배상금을 지급한 기업에게 전력을 공급해 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배상금과 전력 공급은 전혀 별개의 사안입니다. 다만 인지상정이라고, 아무래도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를 입은 한국인에게 배상하는 기업이라면 눈길이 먼저 가지 않겠습니까?”
“……!”
“더불어 일본이 물류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은 것에 대한 보상 대책도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두만강 합작구에서 조만간 항만 운영 주식회사를 발족할 겁니다. 나진항은 물론 인근 청진항과 지루비노 항까지 통합 관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공 지능을 이용하면 선박 크기와 용도에 따라 항만을 지정해, 최단 시간에 접안 및 하역 작업이 이루어질 겁니다. 거기에 인근에 대형 물류 센터도 운영할 예정입니다. 함께 참여하게 되면 일본 국내에서 직접 제품을 보내는 것에 대한 고민을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으실 겁니다.”
“지분 참여를 허락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허락이 아니라 부탁드리는 겁니다. 두만강 합작구는 어느 특정 나라의 소유물이 아니라 세계가 함께 이용하고 즐기는 공간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회장님의 뜻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총리님께 정확히 전달하겠습니다. 좋은 방안을 강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테이블에 머리를 찧을 정도로 머리를 숙인 쇼다가 돌아갔다.
진혁이 그제야 커피를 마셨는데, 이미 식어 버려 쓰기만 했다.
그간 한 형태를 봐서는 절대 해저 터널을 연결해 주고 싶지 않지만, 사업을 기분에 따라 할 수는 없었다.
현실적으로 가스관과 송전 설비의 설치 비용만도 막대한 자금이 투여된다.
이를 일본에 되팔면서 사용료를 받으면 투자비의 일정 부분을 충당할 수 있었다.
그런 경제적인 이득도 더 큰 게 정치 외교적인 효과였다.
한반도가 대륙 진출로의 역할을 하면서 에너지 공급 루트가 되면 일본은 한반도의 안정을 원할 수밖에 없게 된다.
거기에 물류 사업까지 참여하게 되면 발을 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진혁이 실질적으로 노리는 것은 바로 이점이었다.
* * *
한국의 일을 마무리 지은 진혁은 두만강 국제 합작구로 가서 현장 상황을 점검하고 바로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쿠렌코 총리에게 그간의 일에 대해 알리고 후속 조치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나즈마 총리가 서 회장은 나타날 때마다 큰 선물을 가져다준다며 기다리는 재미가 쏠쏠했다더니, 빈말이 아니었어. 단번에 그 콧대 높던 일본 놈들의 항복을 받아냈군.”
“일본도 더 이상의 자존심만 내세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그건 그렇지. 이번 기회가 아니면 영원히 섬에 갇혀 살아야 할 테니.”
“가스관을 일본까지 연결하면 상당량의 가스가 필요한데, 수급에는 문제가 없겠습니까?”
“가스 여유는 충분하니 걱정 말게.”
“유럽의 경기가 회복되어도 말입니까?”
호언했던 쿠렌코는 재차 이어진 진혁의 물음에 눈초리가 차갑게 변했다.
쿠렌코가 극동 개발을 서두른 것은 유럽 경기 위축으로 그쪽으로 가던 가스 수출이 줄어들어서였다.
유럽 경기가 되살아나서 가스 수출이 예전처럼 이루어진다면 양측은 쿠렌코의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실제로 쿠렌코는 우크라이나에서 반러 시위에 유럽 국가들이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가스관 밸브를 잠그는 초강수를 둬서 EU의 항복을 얻어낸 이력이 있었다.
그로 인해 유럽인들은 일주일간 추위에 떨어야 했다.
“지금 나를 의심하는 것인가?”
쿠렌코가 차갑게 일갈하자 옆에 있던 세르게이 대통령이 단박에 얼음이 됐다.
쿠렌코가 이런 목소리를 낸 다음에는 꼭 피바람이 불었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진혁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나중을 위해서라도 가스의 추가 확보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던 겁니다.”
“……그건 준비 중에 있으니 서 회장은 두만강 합작구 개발에만 신경 쓰면 되네.”
“아직도 중국을 믿고 계시는 겁니까?”
“……!”
날카롭게 빛났던 쿠렌코의 눈빛이 급격히 힘을 잃었다.
일부러 강한 눈빛을 내보내 진혁의 기를 꺾으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자신의 눈빛을 받고 오히려 역공을 하는 인물이 있을 줄은 몰랐다.
결국 쿠렌코가 본심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왕칭린이 이번에도 발을 빼려는 것 같아. 요즘 천연가스 가격 하락을 내세우며 가격 조정을 요구하는데, 핑계 같아.”
“잘 보셨습니다. 중국은 너무 일찍 칼을 빼 들었습니다. 지금의 힘만으로는 미국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맞아. 우리 연방이 해체된 이후로 미국을 상대할 국가는 없어졌다고 봐야지. 그나마 OPEC이 겨우 맞섰는데 이제 그마저도 힘을 잃었으니…….”
쿠렌코의 하소연에 진혁이 준비한 말을 꺼냈다.
“중국과 논의 중이던 2차 ‘야말 LNG 프로젝트’에 제가 참여하고 싶습니다.”
러시아 정부가 추진 중인 야말 LNG 프로젝트는 러시아의 북쪽 끝 중간 지점으로 북극해와 접한 야말 반도의 가스전을 개발하는 계획이었다.
1차 개발이 진행 중인데 러시아 국영 에너지 기업 가스텍이 51%, 나머지 49%는 중국계 기업 두 곳이 지분을 나눠 갖고 있었다.
2차 개발도 중국과 진행 중이었는데, 최근의 어려운 사정으로 미적거리며 시간만 끌고 있었다.
느닷없는 제안에 쿠렌코의 눈빛이 다시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네도 북극 항로에 관심이 있는 건가?”
“당연히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인류의 재앙이라는 지구 온난화는 역설적으로 21세기의 실크로드로 불리는 북극 항로를 가져다줬다.
급속한 지구 기온의 상승은 북극 해빙마저 녹여 북극을 통한 물류 수송이 가능하게 되는 뜻하지 않는 선물을 안겨 줬다.
북극 항로는 기존의 수에즈 운하나 파나마 운하를 도는 항로에 비해 거리와 기간이 크게 단축된다.
이는 당연히 물류비용의 절감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국제법상에 따라 공동 사용하는 남극과 달리 북극은 러시아, 캐나다, 노르웨이 등의 국가들이 영유권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미국과 중국 등 세계열강들도 북국 항로를 선점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진혁이 말을 이었다.
“총리께서도 아시다시피 알라딘은 해운 회사를 인수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지요.”
“음…….”
“총 사업비 200억 달러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절반인 100억 달러를 투자하겠습니다.”
“100억 달러를?”
“이왕 투자할 것, 화끈한 게 좋지 않습니까?”
천연덕스럽게 되묻는 진혁의 행동에 쿠렌코는 고민을 접었다.
호심탐탐 북극을 노리며 야말을 독식하려는 중국보다는 개인 사업가인 진혁을 상대하기 수월하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굳힌 쿠렌코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지. 하지만 우리나라 법에 따라 지분의 51%를 가스텍이 반드시 소유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
“압니다. 지분에 손해를 본 대신에 운영은 제게 맡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자네가 운영을?”
“제가 세계 최대 가스전인 조흐르 가스전의 소유자입니다.”
“…….”
“단순히 소유만 한 게 아니라 ‘코리아 컨소시엄’을 구성해 최단 시간 내에 개발해서 지금까지도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는 가스텍보다 저 같은 사업가에게 맡기시는 게 훨씬 낫습니다.”
가스텍은 러시아 국영 기업으로 전 세계 천연가스 매장량의 20%를 보유한 세계 최대의 가스 생산 업체였다.
덩치가 큰 만큼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다.
거기에 러시아가 사회주의 국가 체제다 보니 자유 시장 경제의 효율과는 거리가 먼 운영으로 규모에 비해 얻는 수익은 보잘 것 없었다.
쿠렌코도 그 문제는 잘 알고 있지만 에너지는 단순한 재화가 아니었다.
때로는 무기로 쓸 수 있는 강력한 자원이었다. 이를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는 게 왠지 꺼려졌다.
쿠렌코의 고민이 길어지는 모습에 진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가스텍이 51%의 지분을 가진 최대 주주입니다. 매년 사업 평가를 해서 마음에 안 들면 운영 주체는 언제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전 두만강 합작구 때문에 반발할 수도 없는 처지고요.”
“좋아. 자네에게 맡겨 보지.”
“감사합니다.”
쿠렌코의 결정에 진혁이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자신의 목표를 향해 또 한걸음 내딛었다.
밖으로 나온 희준이 당장 따지듯이 물었다.
“야,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100억 달러를 그렇게 퍼 주듯이 내놓는 게 어디 있냐? 쿠렌코가 완전히 횡재한 거야. 이번은 완전히 네가 손해 보는 거래였어.”
“단순히 계산상으로는 그렇게 나오겠지.”
“거기에 북극 항로는 또 뭐야?”
“그런 게 있어. 으이, 춥다. 얼른 가자.”
“야!”
희준이 소리쳤지만 진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기해 있는 차로 쏙 들어가 버렸다.
* * *
다음 날 가스텍과 계약을 하고 행정청사로 가자 반가운 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불가리아에서 건너온 버섯 박사 오필구였다.
우상우도 와서 오필구가 불가리아에서 스마트팜 버섯 농장을 얼마나 활성화시켰는지 같이 들었다.
“우크라이나, 핀란드 등 동유럽 국가뿐만 아니라 선진국인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우리 스마트 팜 시설을 도입하겠다는 문의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덕분에 베트남의 설비 공장이 바쁘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회장님이 그때 제 말만 듣고도 이렇게 믿고 밀어 주셔서 이룰 수 있었던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서로 고마움을 표하고 나서 진혁이 현실적인 문제를 물었다.
“이쪽 지역을 둘러보시니 어떻습니까?”
“역시 예상대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차가버섯, 송이버섯 같은 비싼 종류의 버섯들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는 굳이 스마트 팜을 이용할 필요 없이 그냥 자연산을 채취하는 게 여러모로 이득입니다. 아무리 스마트 팜이 좋다고 하나 자연산에 비해 약효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그렇군요.”
수긍하면서도 진혁의 표정은 편치 않았다.
지천에 널린 농지의 일부를 스마트 팜 시설로 채우려고 했는데 무산됐다. 어떤 용도로 활용해야 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왔다.
하지만 그건 이어진 우상우의 말에 바로 해결됐다.
“빈 농지를 걱정하시는 거라면 아무 문제 없습니다.”
“……?”
“우리나라의 밀 자급률이 1%밖에 안 됩니다. 옥수수는 더 낮은 0.7%에 불과하고요. 그로 인해 우리나라 식량 자급률은 50%밖에 안 됩니다. 대부분을 외국에서 수입해서 먹고 있는 실정입니다. 재배할 것들은 많으니 고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참,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불행이라고 해야 하나…….”
진혁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식량 자급률이 낮아 농지를 채울 걱정은 덜었지만, 그만큼 한국 농업의 현실이 어렵다는 반증이라 대놓고 기뻐할 수만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