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295화 (295/307)

295화. 북극항로

그날 저녁, 진혁은 때 아닌 곤욕을 치러야 했다.

진혁이 그간의 노고를 치하한다고 오필구에게 밥을 사 주겠다고 한 게 문제의 발단이었다.

술이 들어간 오필구의 수다가 끊이질 않았다.

원래부터 정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외국에서 오래 머물다 보니 고국 사람이 그리웠는지 그 정도가 심했다.

하지만 그 원인이 자신 때문임을 알기에 진혁은 참고 들어 줘야 했다.

덕분에 지겨워서 중간에 도망치려던 우상우도 속절없이 자리를 지켜야 했다.

* * *

다음 날.

출근한 진혁에게 곽영섭 사장이 찾아왔다.

진혁이 준 돈으로 미수 채권을 회수하고 두리이엔티를 다시 신설해 과거의 직원들과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지금은 하산 역 인근에 대형 물류 창고를 짓고 있었다.

“어딜 좀 다녀와야 해서 일주일간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 가시게요?”

“아닙니다. 몽골에 갑니다.”

“몽골요?”

“예전 태양광 사업 할 때 도움을 많이 줬던 이가 이번에 몽골 정부에서 발주하는 사업에 입찰하게 됐다며 도와달라고 해서요.”

“도움을 받았다면 응당 갚아야지요. 다녀오십시오.”

“감사합니다. 현장은 단속을 단단히 해 놔서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어련히 잘들 해 주시겠지요. 오랜만에 친한 분을 만나시는 것일 텐데, 공장장님도 계시니 여긴 걱정 말고 편히 쉬다 오십시오.”

“아닙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곽영섭이 나가자 진혁은 책상에 수북이 쌓은 서류철을 보고 한숨을 쉬다가 하나씩 결재를 해 나갔다.

장차민은 그날 이후로 더 이상 반항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과할 정도로 열심히 일을 해 진혁이 오히려 말릴 정도였다.

로마노프는 여전히 시키는 일만 하고 끝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희준이와 커피 타임을 갖다가 진혁이 물었다.

“북극 항로에 대해서 공부는 좀 했어?”

“치사한 놈. 했다, 했어.”

“읊어 봐.”

“북극 항로는 북미와 유럽을 잇는 캐나다 해역의 북서 항로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러시아 해역의 북동 항로로 구분돼. 총 길이는 만 오천 킬로미터로…….”

조사를 열심히 했는지 희준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설명을 길게 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만족할 진혁이 아니었다.

“북극 항로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당연히 알아봤지. 첫째는 시간 및 비용 절감 효과야. 거리가 7천 킬로미터 줄어들고 운항 일수는 30일에서 20일로 10일 단축돼. 두 번째는 북극 및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자원과 이에 대한 원활한 수송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고. 마지막이 제일 중요한데, 한반도가 북동 항로의 출발점이라는 거지. 이를 잘 활용해 허브항으로 기능을 갖추면 입지 강화와 물동량 증가, 수출 시간 단축 및 운영비 절감 등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는 거야.”

“공부 좀 했네.”

“그럼. 내 예전 별명이 오조사였어. 맘만 먹으면 네가 지금 입고 있는 팬티도…….”

“됐고, 나가자.”

“어딜?”

“한국에서 손님이 오기로 했어. 네가 아는 사람이 올 거야. 썩 반갑지는 않겠지만.”

“누군데?”

“가 보면 알아.”

“치사한 놈.”

희준이 투덜거리면서도 따라 일어나는 것을 보니, 고국 사람이 그리운 것은 오필구만이 아닌 듯했다.

두 사람은 블라디보스토크 공항 인근의 한 호텔로 들어갔다.

우수리스크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이라 신 공항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나와야 했다.

커피숍으로 가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안 부사장님, 문 사장님.”

TG중공업의 안태현과 오양중공업의 문성수였다.

조흐르 가스전 개발 업체 선정 당시 ‘코리아 컨소시엄’에 참여했던 이들이었다.

각기 부사장과 사장이 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회장님.”

“요즘 많이 바쁘시다면서요?”

“그게 다 회장님 덕분입니다. 해양 환경 규제 시행을 앞당겨 주신 덕분에 LPG 선박 교체 수요가 일어, 중국에 빼앗겼던 조선업 1위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LPG 선박 교체가 한국에서만 가능하진 않죠. 수주를 따낸 것은 두 분이 열심히 한 덕분입니다.”

“그래도 회장님이 먼저 나서 주…….”

문성수의 칭찬이 길어질 것 같아 진혁이 얼른 말을 자르고 물었다.

“그런데 태후조선에서는 아무도 안 왔습니까?”

“오시긴 오셨는데…….”

말끝을 흐리는 문성수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진혁의 옆구리를 희준이 찔렀다.

“야.”

희준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옮긴 진혁의 얼굴이 단박에 굳어졌다.

화장실 쪽에서 걸어온 이는 태후 그룹 회장 정진호였다.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진혁은 정인영이나 정호영이 올 줄 알았다.

문성수가 말을 조심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급이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회장님.”

희준이 허리를 90도로 꺾어 인사하는 모습에 진혁도 따라 인사를 했다.

“회장님이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제 김선혁 회장님을 만났습니다. 드릴 말씀도 있고 해서 왔습니다.”

진혁의 어금니가 절로 물렸다.

김선혁에게 ‘코리아 컨소시엄’을 재구성해야겠다며 각 기업에 연락을 부탁했는데, 태후는 정진호에게 직접 이야기한 모양이었다.

정진호가 말했다.

“제가 와서 불편하신 겁니까?”

“아닙니다. 앉으시지요.”

각자 자리에 앉자 진혁이 부른 이유를 설명했다.

“러시아 정부에서 추진하는 2차 ‘야말 LNG 프로젝트’에 대한 운영권을 획득했습니다.”

“……!”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총 사업비만 200억 달러에 매년 각 600만 톤 용량의 세 개의 트레인이 가동돼 전체 1,800만 톤 규모의 LNG를 생산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지분의 51%는 가스텍에서 갖고 있지만 운영을 제가 맡는 것에 쿠렌코 총리께서 동의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3사가 ‘코리아 컨소시엄’을 구성해 이번 개발을 맡았으면 합니다.”

안태현과 문성수는 눈을 번들거리며 기대 어린 모습이었지만, 반대로 정진호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난 1차 때는 태후 조선이 쇄빙선 15척을 전량 수주했다.

계약 금액만도 48억 달러가 넘어 어려운 재정에 단비가 돼 줬다.

큰 문제가 없이 진행돼 내심 이번 2차도 기대했는데, 컨소시엄에 참여한다면 안정적이긴 하지만 물량은 1/3로 줄어들게 된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정진호가 빠르게 평온을 찾고 수긍하는 모습에, 진혁의 눈에 이채가 띄었다. 생각보다 빠른 포기였다.

진혁이 다음 말을 했다.

“코리아 컨소시엄은 쇄빙선만이 아니라 플랜트 설비 전반을 맡아서 진행하게 될 겁니다.”

“헉.”

당장 입에서 헛바람 소리가 났다.

플랜트 설비 전반이라면 LNG의 생산, 저장, 하역을 위한 설비 전체로 백억 달러 규모였다.

지금 한국 조선 업계는 LNG 선박 수요로 근근이 버텨 가는 중이었다.

나머지 한 축인 플랜트 분야는 여전히 중국의 저가 공세에 밀려 수주 실적이 전부만 상황이었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안태현과 문성수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정진호도 그 정도는 아니지만 고마움을 함께 표했다.

진혁이 마지막 말을 했다.

“제가 ‘코리아 컨소시엄’을 재결성하고 프로젝트 전체를 맡긴 것은 단순히 이번 프로젝트 때문만이 아닙니다. 러시아가 LNG 수송비 절감을 위해 자체 쇄빙선 개발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당연히 비용 절감을 위해 자체 개발하고 싶겠지만, 기술력이 워낙 낮아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맞습니다. 현재 국내 조선 업계의 쇄빙선 건조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러시아와는 월등히 차이가 나는 상황입니다.”

안태현과 문성수가 강력하게 반발했다.

진혁이 순순히 수긍했다.

“물론 불가능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흘러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서 회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는 조선업 세계 1위라는 자만감에 취해 중국에 추월당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겨우 되찾은 자리인데 여기서 또 자만한다면 얼마 못 가 더 큰 나락으로 떨어질 겁니다.”

정진호가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모습에 의외라는 표정을 짓던 진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꼭 러시아만이 아닙니다. 조만간 다른 나라들도 쇄빙선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지정해 육성하려고 들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신 근거라도 있으십니까?”

“북극 항로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이유가 아닌 군사적인 목적 때문입니다.”

“군사적 목적이요?”

“북극 항로를 차지하기 위한 강대국들의 치열한 군비 경쟁이 벌어질 겁니다. 러시아는 이미 북극 사령부까지 창설했고, 중국은 한발 더 나아가 핵 쇄빙선까지 확보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에 미국은 북극 함대 창설도 검토 중이고, 캐나다도 해군 소속의 쇄빙 전투함 건조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

“지금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외국에서 수입했지만, 자국의 안보가 걸려 있다면 아무리 돈이 들어가도 자체 개발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정을 들어 보니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다들 심각함을 깨닫고 고민하느라 침묵만 지키자 정진호가 진혁에게 물었다.

“서 회장께서는 어떻게 해야 우리나라 조선업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협력만이 상생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길입니다.”

“협력요?”

“각 사가 자체 개발한 특화된 선박 제조 기술로 세계 선주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 것이라고 보십니까?”

“…….”

“다른 사업과 마찬가지로 조선업도 4차 산업 기술이 적용된 ‘스마트 선박’으로 진화하고 있는 게 요즘의 추세라는 것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각 사가 독자적인 스마트 선박 플랫폼과 솔루션을 개발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만, 결국 아직까지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지요. 협력하셔야만 합니다.”

진혁의 따끔한 지적에 아무도 대꾸도 못하자 이번에도 정진호가 나섰다.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재작년 해수부의 제의로 스마트 선박 공동 개발을 위해 3사가 모여 논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서로 각자의 플랫폼을 쓰자고 주장하다가 결렬됐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지난해 3사는 1척당 선가의 5%인 약 100억 원 정도를 로열티로 외국 회사에 지급했습니다. 스마트 선박 기술도 마찬가지입니다. 핵심 기술을 선도하지 못하면 결국 기술을 선점한 외국 업체의 배만 불려 주는 하청 업체로 전락하게 될 겁니다.”

“제가 서 회장님께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현재 한국에서 4차 산업 기술과 관련해서는 알라딘 연구소가 가장 뛰어납니다. 그곳에서 3사의 플랫폼과 솔루션을 분석해서 한국형 스마트 선박 기술 표준을 만들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정진호의 말에 진혁은 물론 나머지 두 사람도 크게 놀랐다.

각 사의 선박 플랫폼과 솔루션은 보안 등급이 최상위로 분류될 정도로 절대 외부로 유출할 수 없는 기업 비밀이었다.

그걸 선뜻 내놓겠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진혁이 잠시 정진호를 바라보다가 문성수와 안태현에게 물었다.

“두 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도 내놓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당연히 내놔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장님께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해서요.”

“안 부사장님의 입장은 이해합니다. TG중공업이 참여하지 않겠다면 태후와 오양이 개발한 기술만 가지고 작업을 하지요. 알라딘 연구소의 모든 역량을 집중해 최단 시간 내에 ‘한국형 스마트 선박 기술 표준’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진호가 다시 진혁에 머리를 깊숙이 숙이는 모습에, 지켜보는 희준의 얼굴은 곤혹스럽게 변했다.

한때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높아 보였던 정진호였다.

그가 자신의 친구에게 머리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복잡한 심정들이 교차했다.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에 대해 희준이 다시 한번 정리를 하고 나서 식사를 했다.

식사 후 희준이 안태현과 문성수를 상대하는 사이, 진혁은 정진호와 따로 자리를 가졌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하나 난감해하는 진혁에게 다행스럽게도 정진호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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