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몽골 공략
“서 회장님에게는 참 여러 가지로 면목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직간접적으로 태후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서 회장님은 우리를 그렇게 생각해주시는데, 우린 예전 태후 시절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서 회장님을 힘들게만 했습니다. 인영이도 그렇지만 호영이는 은혜를 원수로 갚았으니……. 아비 된 자로 차마 뵐 낯이 없었습니다.”
“다 지난 일들입니다.”
“방북 만찬장의 일도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거침없이 호통치는 회장님의 행동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알라딘을 내려놓고 이곳에 와서 또 다른 사업을 펼치는 모습을 보면서, 그간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각자 사정에 따른 것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닙니다. 옳은 것과 잘못된 것은 분명 다릅니다. 회장이라고 다들 내게 머리를 조아리자 난 내가 옳다는 착각 속에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회장직을 내려놓을 결심까지 했지요.”
“회장님!”
“그때 김선혁 회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만나 말씀을 드렸더니 크게 혼내셨습니다. 후계자 수업 때 꾸지람을 들은 이후로 처음이었습니다.”
당시 김선혁은 그의 신분을 몰랐던 데다 혈기가 왕성해 심하게 가르쳤다는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저보고 그러시더군요. 이렇게 떠나는 것은 은퇴가 아니라 도망치는 것이라고요. 호영이와 인영이에게 그런 아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냐고.”
“……!”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가 그 아이들의 아비구나. 내 아버님이 그러셨듯 나도 그들에게 당당한 모습으로 태후를 물려줘야 할 책임이 있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요. 아버지의 자리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진혁은 정진호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자신 역시 이전 삶에서 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크게 절망했었다.
“그들에게 서 회장을 보고 배우고 협력하라고 할 게 아니라 내가 먼저 모범을 보였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회장님…….”
“회장님께 알아달라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냥 제 마음이 그렇다는 겁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정진호가 고개를 숙이자 진혁도 얼른 같이 머리를 조아렸다.
우수리스크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희준이 물었다.
“정 회장님과는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나눈 거야?”
“가족 이야기. 그리고 아버지에 대해서도.”
“……?”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초심으로 돌아가 전면에 나서서 우리와 협력하시겠다며, 잘 부탁한다고 하시더라고.”
“좋은 일이긴 한데, 정호영이 한 짓을 생각하면…….”
“예단하지 말고 지켜보자. 아버지의 책임까지 거론하셨으니 다를지도 모르지. 아니면 그때 가서 그에 맞게 대응하면 되는 거고.”
“그래.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할 일도 산더미인데 벌어지지 않은 일까지 사서 고민할 필요는 없지.”
진혁이 2차 야말 LNG 프로젝트를 ‘코리아 컨소시엄’을 통해 진행하는 탓에 희준이 세부 실행 계획을 세워야 해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태산이었다.
그 일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암담했다.
그때 진혁이 믿기 힘든 결정을 내렸다.
“이번 일은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정말?”
“김선혁 회장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오예!”
희준이 크게 반기며 두 손을 불끈 쥐었다.
김선혁과 정진호가 손을 잡고, 알라딘과 태후가 협력한다면 그보다 더 큰 프로젝트도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았다.
자신과 희준은 그것 말고도 할 일들이 많았다.
* * *
다음 날.
행정청으로 일단의 서양인들이 찾아왔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소비재 글로벌 기업들의 중국내 현지 법인 CEO들이었다.
“두만강 합작구로 공장을 이전하고 싶습니다.”
중국 당국의 지나친 외국 기업 규제에 인건비 부담이 급격히 커지면서 중국에 진출한 해외 기업들의 공장 채산성이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거기에 무역 전쟁까지 더해지면서 중국 내 경기 둔화와 소비마저 위축되자 철수를 결정하게 됐다고 했다.
“하지만 중국은 여전히 빅 마켓입니다. 비록 성장률이 둔화되고 있지만 타 국가에 비하면 고속 성장 중이기도 하고요. 동남아시아도 지금은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임금과 땅값이 많이 올라간 상황입니다.”
결국 중국 시장을 지키면서도 규제를 피할 수 있고 저가의 북한 노동력이 있는 두만강 합작구로 공장을 이전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진혁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을 선봉 공단에 입주할 수 있도록 했다.
선봉 공단은 북한이 나진항과 함께 개발했지만 투자 유치에 실패하면서 비어 있는 상황이라, 당장이라도 입주가 가능했다.
희준이 밖으로 데리고 나가 투자에 따른 세부 내용을 협의하고 돌아와 물었다.
“선봉 공단은 한국 기업들을 입주시키는 게 낫지 않아?”
“한국 기업들은 훈춘에 조성 중인 공단에 입주시킬 거야. 중국 기업은 러시아 쪽 공단을 배정할 거고.”
“왜?”
“100년 후를 대비해서.”
“……!”
희준이 그제야 진혁의 속뜻을 이해했다.
그는 두만강 합작구를 각국에 돌려주지 않고 영구히 존속시키고 싶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 의도적으로 서로 이해관계가 얽힌 국가의 지역에 입주시키려는 것이다.
‘고슴도치 전략’으로 그곳에 진출한 기업들이 자국 정부를 압박해 두만강 합작구의 해체 반대에 힘을 보태게 하겠다는 복안이었다.
하지만 희준은 진혁의 속마음 전부를 알지는 못했다.
진혁이 한국 기업을 중국 땅인 훈춘에 입주시키려는 것은 그곳이 가장 중국 내륙과 가깝고 발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기도 했다.
두만강 합작구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대부분이 중국으로 수출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한국 기업들이 물류비에서 조금이라도 이득을 보게 하겠다는 배려였다.
* * *
그 시각, 미국에서 뉴트는 록펠러 가문 앤서니 회장의 항의 방문을 받고 있었다.
“도대체 저유가 기조를 언제까지 유지할 생각인가?”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중국이 조만간 손을 들게 될 겁니다.”
“그건 몇 달 전부터 했던 이야기일세. 자네는 그놈들이 양보안으로 제일 먼저 석유 제품에 대한 금수 조치를 해제할 것이라고 했지만, 틀렸어.”
뉴트는 날이 추워지면 난방 수요 때문에 중국이 미국산 석유 제품에 대한 수입 제한 조치를 풀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국은 일단 급한 대두에만 수입 금지를 푼 이후에 버티기 작전에 돌입했다.
중국은 석탄 난방이 70%를 차지할 정도로 후진국형 에너지 구조였다.
그로 인해 베이징은 스모그 지옥이 됐고, 이는 인근 나라까지 악영향을 미쳤다.
이에 중국 환경 당국은 화석 연료를 에너지원으로 하는 공장 가동을 전면 중단시키고, 석탄을 사용하는 가정 난방까지 금지하는 초강수로 대기질 개선에 주력해 왔다.
하지만 미중 무역 전쟁으로 경기가 하락할 조짐을 보이자 환경보다는 경기 부양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됐다.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공장 가동을 허용하는 등 화석 연료 사용 규제와 미세 먼지 절감 목표를 완화했다.
미국산 석유 제품 수입 공백을 기존의 석탄을 사용해 메우고 있었다.
뉴트가 싸늘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조만간 국제 환경 단체가 전 세계적으로 대규모 시위를 벌일 겁니다.”
“환경 단체가?”
“중국의 석탄 연료 재사용과 대기질 악화를 규탄하는 시위입니다.”
“……!”
“이에 각국 정부에서 중국을 비난하고 중국 제품에 대한 규제를 시작하기로 약조가 다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왕칭린은 결국 항복하고 우리 석유 제품의 수입 금지를 풀게 될 겁니다. 수요가 늘면 가격이 오르는 것은 당연한 시장 원리입니다.”
“그런 복안이 있었군.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호들갑을 떨었네. 믿고 기다리지. 하지만 이번에도 자네의 예측이 틀린다면 심각한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게. 원로원에서 가만있지 않을 거야.”
“걱정 마십시오. 반드시 중국의 항복을 받아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 세기 동안은 우리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겁니다. 원로원의 사과는 그때 받지요.”
그러나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뉴트의 모습에 앤서니는 오히려 불안감을 느꼈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을 텐데…….
* * *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진혁에게 이틀 전 일주일의 휴가를 받고 떠났던 곽영섭이 찾아왔다.
“아니, 왜 이렇게 일찍 돌아오신 겁니까?”
“괜히 헛물만 켰습니다.”
곽영섭이 씁쓸한 표정으로 몽골에 다녀온 일에 대해 들려주었다.
몽골 정부가 어려운 재정 때문에 당초의 계획을 절반으로 축소한 데다 중국 업체들이 대거 참여하는 모습에 포기했다고 했다.
“중국 업체와 가격 경쟁을 하면 답이 없습니다. 출혈 경쟁을 해서 수주를 따내도 결국 적자라 버텨내질 못하고요. 상의 끝에 입찰을 포기하기로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해서 저도 일찍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됐군요.”
“자체 기술을 개발해 특허까지 받았다며 의욕이 대단했는데…… 어깨가 축 처진 채 돌아가는 모습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곽영섭이 얼마간 더 하소연을 하고 돌아간 뒤, 진혁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져들었다.
* * *
며칠 후.
진혁은 몽골의 수도 울란바트로의 칭기즈칸 공항에 도착했다.
“윽……. 이게 뭐야?”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희준이 기겁하며 얼른 손으로 입과 코를 가렸다. 하늘은 뿌연 연무로 가득했고 유황 냄새까지 났다.
“난민들이 원시적 난로에 석탄, 목재 등 타는 것은 아무것이나 집어넣어 난방을 하는 바람에 대기 오염이 심각하다고 합니다.”
“난민이라니요? 여기 어디서 전쟁이 났습니까?”
“그게 아니라…… 먹고살기 힘들어진 유목민들이 도시로 몰려 정부에서 급히 임시 가옥으로 난민 캠프를 운영하고 있답니다.”
지구 온난화로 몽골은 매년 혹독한 추위와 ‘주드(눈보라)’를 겪고 있었다.
최대 피해자는 유목민들이었다.
기르던 가축들이 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동사하자 어쩔 수 없이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다.
울란바토르의 난민 캠프 지역 주민은 이 도시 전체 인구 180만 명 가운데 무려 60%를 점하고 있을 정도로 인구의 도시 집중화가 심각했다.
희준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곽영섭에게 물었다.
“몽골은 세계 7대 자원 부국이라면서요?”
“맞습니다. 매장량 기준 세계 순위로 구리가 2위, 석탄 4위, 몰리브덴 11위 및 전 세계 희토류 매장량의 16%를 보유한 자원 부국입니다.”
“그런데 난민 캠프에서 원시적인 난로로 난방해요?”
“구슬이 서 말이면 뭐 하냐? 꿰어야 보배지. 그만 투덜거리고 따라와.”
핀잔을 주고 앞서가는 진혁의 등을 바라보는 희준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로서는 느닷없는 출장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할 일이 많은데 진혁이 갑자기 몽골로 가자고 하는 바람에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했다.
그건 곽영섭도 마찬가지였다. 씁쓸한 기억만 있는 곳이라 다시 오고 싶지 않은 나라였다. 안내역으로 데려왔나 보다 하고 따라온 처지였다.
“서진혁 청장님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총리실에서 나왔습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양복 차림으로 기다리는 사내는 몽골 정부에서 마중 나온 이였다.
총리실로 가서 체렝바트 몽골 총리를 만났다.
“두만강 합작구 행정청장 서진혁입니다. 면담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 회장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찾아 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이쪽은 이번 태양광 사업 프로젝트 업체로 선정된 차이나솔라의 판광 회장님이십니다.”
체렝바트 몽골 총리가 함께 있던 판광을 소개해 줬다.
인사를 나누면서 판광은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입찰 결과가 발표된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도 체렝바트는 계약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느닷없이 진혁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진혁이 판광에게 바로 치고 들어갔다.
“이번 프로젝트에 쓰일 태양광 패널이 작년 EU 반덤핑 관세 부과로 팔지 못한 재고품인 게 맞습니까?”
“……!”
판광이 놀란 눈으로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사실이었다.
EU 집행 위원회가 저가 공세로 급격히 시장을 잠식하는 중국 업체를 제재하기 위해 합의 위반을 이유로 반덤핑 관세를 부과했었다.
EU 수출 길이 막히면서 남은 재고였다.
체렝바트 총리가 날카롭게 변한 눈으로 물었다.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만 아무 문제 없는 새 제품입니다. 에너지부 담당자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판광이 억울하다며 항변하자 체렝바트 총리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담당자가 알면서도 낙찰자로 발표한 상황이라 절차상으로 문제를 삼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진혁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음으로 준비한 질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