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크게? 더 크게!
진혁이 급하게 스위스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이었다.
공항은 한가했지만 검문은 철저했다.
다보스 포럼은 세계 각국의 정계, 관계, 재계의 수뇌들이 모여 각종 정보를 교환하고, 세계 경제 발전 방안 등에 대하여 논의하는 큰 행사였다.
비록 민간 재단이 주최하는 회의지만 세계 유력 인사들이 대거 참가하다 보니 중대 발언이 나오기도 하고, 수뇌 회담이 열리는 등 국제적 영향력을 가진 살롱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올해는 카이저 대통령은 물론 미국 대표단도 오지 않아 김빠진 분위기였다. 그래도 2천 명이 넘는 주요 인사가 온 터라 스위스 정부가 보안에 신경 쓰고 있었다.
진혁은 택시를 잡아타고 바로 한국 대표단이 머무르는 센트럴 호텔로 갔다.
연락을 받은 김세동이 호텔 현관까지 나와 있었다.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중국 측 의지가 너무 강해 교착 상태야.”
“대체 그놈들이 어떻게 알고…….”
“그건 나중에 생각하게. 대통령이 기다리시네.”
“올라가시지요.”
이현국의 방으로 갔다.
그는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는데, 잠을 제대로 못 잔 듯 피곤한 얼굴이었다.
인사를 하고 앉아 바로 물었다.
“현재 상황이 어떻습니까?”
“중국이 자신들까지 포함한 6개국의 ‘동북아 공동 전력망’을 제안하고 나왔습니다.”
“각국의 반응은요?”
“몽골은 중국 측 제안에 적극 찬성입니다. 남북한도 나쁠 게 없다는 판단입니다만, 문제는 러시아와 일본이 반대하고 있다는 겁니다.”
“일본은 왜요?”
“쿠렌코 총리가 워낙 강하게 반대하니 거기에 맞추는 느낌입니다. 쿠릴 열도 문제도 있고, 우리와 러시아 사이가 나빠지면 자신들 나라로 직접 연결하겠다는 복안인 것 같습니다.”
각국이 이해득실을 따지며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형국이었다.
고민하던 진혁에게 이현국이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 회장님이 약속받았던 중국 경제 보복 해제에 대한 것도 이번 일과 연계하겠다는 압박까지 하고 있습니다.”
“……!”
“중국 정부가 이번 일에 사활을 걸고 달려드는 느낌입니다.”
중국 측 사정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빨리 결정지어 버리려고 했던 건데…….
이현국이 말을 이었다.
“지금 현재로는 쿠렌코 총리의 양보를 얻어내는 게 유일한 해법인 것 같습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진혁은 답을 하지 못했다.
쿠렌코는 논리가 통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기분에 따라 핵 버튼도 주저 없이 눌러 버릴 정도로 감정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갑자기 중국이 끼어들어 판을 키우는 것에 기분이 상한 게 틀림없었다.
리광잉이 미리 자신과 상의했다면 어떻게든 잘 구슬려 허락을 받아냈을 텐데, 이젠 그마저도 물 건너갔다.
진혁이 침묵하자 다들 심각한 표정만 짓고 입을 열지 못했다.
오늘이 나흘간 열린 행사 마지막 날이었다.
여기서 결론을 내지 못하면 언제 또 만나 합의를 이룰지 기약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번 일을 슬기롭게 풀지 못하면 지금까지 이뤄 놓은 게 모두 허사가 된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연결과 가스관 매설, 전기 도입까지.
한일 해저 터널을 이용한 가스와 전기 판매로 남북 경협 비용 부담을 줄이겠다는 계획이 물 건너간다.
거기에 두만강 합작구의 지위마저도 불안해진다.
진혁은 자신이 너무 안일했다고 자책했다. 중국을 조심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역시 뒤늦은 후회임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쿠렌코 총리의 기분을 풀어줄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진혁은 이 방의 모든 이가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것에 심한 부담감이 느껴졌다.
이럴 때 탕분헝 총리나 만길라 총리가 곁에 있다면 같이 상의라도 해 볼 텐데.
‘……!’
고심하던 진혁이 갑자기 소리쳤다.
“지도!”
“어……. 잠시만.”
역시 희준이었다.
다들 놀라 멍한 얼굴만 하고 있는 것에 반해 희준은 재빨리 가방을 열어 지도를 꺼내 테이블에 펼쳐 놓았다.
잠시 동안 지도를 뚫어지게 노려보던 진혁이 벌떡 일어났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어딜……?”
“다녀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진혁이 서둘러 나가는 모습에 희준이 얼른 지도를 갈무리하고 따라 나갔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진혁의 방문에 쿠렌코 총리의 눈에서는 푸른빛이 느껴졌다.
그만큼 분노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서 회장,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하는 것인가.”
“죄송합니다. 제가 보안에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이번 일이 잘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 사이에 나눈 많은 이야기들이 의미 없는 것이 될 것이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는 진혁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어디 어떤 대책을 가지고 왔는지 들어 보지.”
“그 전에 한 분을 더 모셨으면 합니다.”
“……?”
“들어오십시오!”
자신의 허락도 받지 않고 소리치는 진혁의 예의 없는 행동에 쿠렌코가 호통을 치려다가 들어오는 이를 보고 놀랐다.
“만길라 총리께서 어떻게……?”
“좋은 일이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수더분하게 인사하고 앉는 만길라 총리의 모습에 쿠렌코가 의문의 시선으로 바라보자 진혁이 입을 열었다.
“총리께서 ‘아시아 메가 전력망’을 제안해 주십시오.”
“아시아 메가 전력망?”
“동북아시아뿐만 아니라 동서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까지, 아시아 대륙 전체 전력망을 연결하자는 겁니다.”
진혁은 더 큰 그림으로 왕칭린의 동북아 공동 전력망 구상을 깨려고 했다.
쿠렌코의 눈이 반짝였다.
“자세히 말해 보게.”
“몽골의 고비 사막에서 태양광과 풍력으로 생산할 수 있는 전력은 한일 전체 소비 전력의 두 배 규모입니다. 거기에 러시아는 향후 개발될 남극까지 합치면 그 규모를 감당하기 힘듭니다. 현재 논의 중인 국가만으로 그걸 전부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그렇지.”
“그래서 사업 지역을 아시아 전체로 확대하자는 겁니다. 동서남아시아의 관문은 인도가 될 겁니다.”
“경제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우리도 전력 수급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기회를 주시면 최대한 수입할 의향이 있습니다.”
만길라 총리의 말에 쿠렌코가 물었다.
“연결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중국이 아시아 메가 전력망에 동의한다면 우리 역시 평화 회담에 적극 나설 겁니다.”
인도와 중국은 인접국으로, 국경 침범 문제로 인해 전쟁까지 벌이면서 앙숙지간으로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 발전에 꼭 필요한 전력 수급에 중국이 협조한다면 자신들 역시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말이었다.
진혁이 말을 이었다.
“발전소 설치만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니 당장 실현될 일은 아니지만, 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존재감을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런 큰일을 해내실 분은 총리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그렇지. 욕심 많은 왕칭린이나 기회주의자인 일본 총리가 해낼 수는 없는 일이지. 좋아. 아시아 메가 전력망으로 가자고.”
쿠렌코가 흡족하게 변한 얼굴로 크게 말했다. 진혁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는 방증이었다.
예년과 달리 아무런 빅 이슈 없이 끝날 것 같았던 다보스 포럼은 진혁이 나타나는 순간 크게 술렁였다.
항상 큰 사건으로 몰고 다니기로 유명한 인물이라 지루해하던 기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봤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연이어 국가 정상들과 만난 뒤 정상들은 식사도 거른 채 비밀 회동을 갖기 시작했다.
그 시각.
진혁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한국 대표단의 면면도 화려했다.
남북 경협 위원장 주명근, 한국경제인연합 회장 정진호, 알라딘 그룹 회장 김선혁.
한 사람 한 사람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인들이었다.
“기자들이 하도 쳐다봐서 체할 것 같아. 이게 다 서 회장 때문이야.”
“그럴 리가요. 회장님들 인터뷰를 따려고 그러는 것이겠지요.”
진혁이 모른 척 능청을 떨자 주명근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정상들이 밥까지 거르면서 회동을 하는 건가?”
“그걸 왜 제게 물으십니까. 저도 모릅니다.”
딱 잘라 말하는 진혁의 행동에 김선혁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나머지 두 사람을 보고 말했다.
“서 회장에게 더 들을 말이 없을 것 같으니 우리끼리 자리를 옮겨 말씀을 나누시지요.”
“그럽시다.”
주명근 위원장이 맞장구를 치며 엉덩이를 드는 모습에 진혁이 얼른 앓는 소리를 냈다.
“아이고, 회장님들, 이렇게 가 버리시면 저 기자들에게 볶여 죽습니다.”
“그럼 이야기를 하든지.”
김선혁의 말에 진혁은 자신이 외통수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할 거야?”
“……말씀드리겠습니다.”
결국 진혁이 결정을 내렸다.
기자들에게 밝힐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도 있었다.
진혁은 목소리를 낮춰 아시아 메가 전력망까지 논의하게 된 과정에 대해 들려줬다.
“헉. 엄청난 사업이 되겠는데.”
“맞습니다. 그 파급 효과가 상당할 겁니다.”
“그렇더라도 중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상황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정진호가 현실에 입각한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현재 세계 10위권 내 태양광 업체에 중국이 일곱 개나 들어갈 정도로 중국세가 득세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중국이 제안한 동북아 공동 전력망을 깨기 위해 내놓은 진혁의 아시아 메가 전력망이 결국 중국 업체의 배만 불리는 일이 될 수 있었다.
진혁이 말했다.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
진혁은 몽골에서 차이나솔라의 판광 회장과 나눈 대화를 들려주었다.
사정을 알고 있는 김선혁이 바로 물었다.
“한국제철의 전기차 폐배터리 재활용기술을 활용할 생각이냐?”
“맞습니다.”
김선혁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주명근과 정진호에게 한국제철이 보유한 기술에 대해 들려줬다.
이번에는 주명근이 의견을 내놓았다.
“뛰어난 기술이긴 하지만, 그 필요성을 깨달을 때가 30년 후라는 게 문제네. 경제가 어려운 나라들은 그것까지 고려할 여력이 없어. 무조건 투자비가 적게 드는 방식을 받아들일 거네.”
“당연히 재활용 기술 하나만으로 단가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세 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작년 5월 태후전선에서 세계 최초로 고압직류송전(HVDC) 케이블의 공인 인증을 받았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서 회장님은 모르는 게 없으시군요.”
정진호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HVDC는 대용량의 전기를 장거리로 보낼 수 있는 기술로, 대륙 전체의 전력망 같은 넓은 지역의 송전선을 연결하는 데 꼭 필요한 핵심 기술이었다.
진혁은 이번에 주명근을 보고 말했다.
“TG산전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추적식 상업 태양광 발전소를 건설해서 운영한 노하우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맞네. 해를 좇아 움직이니 타 발전소보다 우수한 효율을 내고 있네.”
이번에는 김선혁을 보고 말했다.
“구필준 소장님께 여쭤보니 태양 추적 기술에 미사일 추적 기술 응용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실시간으로 태양광 패널이 자동으로 태양을 쫓을 수 있게 될 거라고 하시더군요.”
“……!”
“거기에 현존하는 스마트 배전 솔루션에 블록체인의 암호화 기술을 도입하면 안정성을 훨씬 높일 수도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진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진호가 말했다.
“야말 LNG 프로젝트처럼 한국 업체끼리 협력해 대응하라는 말씀입니까?”
“맞습니다. 단순히 태양광 패널만 납품하는 게 아니라 발전소의 설치, 송전, 운영, 재활용 등 선진 기술을 결합한 토탈 패키지로 대응해야 중국의 저가 공세에 맞서 이길 수 있습니다.”
“태후는 서 회장의 계획에 따르겠습니다.”
“TG도 마찬가지네.”
“알라딘 연구소에 이야기하마.”
세 사람의 동의를 받은 진혁이 마지막 말을 꺼냈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추가로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야기하십시오.”
“극비 기술이 아니라면 가능한 해당국에 기술 이전을 해 주십시오.”
“기술 이전을요?”
다들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관련 기술 개발을 위해 엄청난 시간과 자본을 투입해서 겨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걸 내놓으라니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진혁이 말을 이었다.
“아시아 메가 전력망의 완성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겁니다.”
“그렇겠지. 나라만도 40개가 넘고 각 나라가 처한 사정들이 다를 테니.”
“그래서 국제적인 신뢰를 쌓아야 합니다. 먼저 설치한 나라에 기술 이전까지 해주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다음 국가는 당연히 그쪽을 선택할 겁니다.”
“알겠네. 그렇게 하겠네.”
주명근의 결정에 정진호와 김선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당탕탕!
그때 기자들이 앉아 있던 테이블에서 갑작스러운 소란이 일어났다. 급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넘어지며 내는 소리였다.
그곳만이 아니었다. 큰일이라도 난 듯 기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급히 식당을 빠져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