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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299화 (299/307)

299화. 꼬리가 드러나지만

쿠렌코 총리가 운집해 있는 기자들 앞에서 당당한 목소리로 발표했다.

“‘아시아 메가 전력망’은 친환경 전원을 공동 개발하고, 아시아 국가들 간 전력망을 연계하여 상호 기술 및 경제적 이익을 향유하며, 역내 평화 증진에 기여하게 될 겁니다. 이를 통해 미세 먼지 감축과 온실가스 저감도 자연스럽게 이루질 겁니다.”

워낙 갑작스러운 발표인 데다 아시아 대륙 전체를 어우르는 큰 규모에 기자들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쿠렌코 총리가 주변에 서 있는 각 국가의 정상들을 둘러보고 흡족한 표정으로 발표를 이어 갔다.

“이를 남북한, 중국, 일본, 몽골의 동북아 5개국과 서남아시아의 인도 정상이 우선 합의했습니다. 이의 구체적인 논의를 위해 다음 달 두만강 합작구에서 관계 장관 회의를 가지기로 했습니다. 그때는 오늘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우리 계획에 동참을 희망하는 아시아 국가들도 함께하게 될 겁니다.”

그 후 쿠렌코 총리는 얼마간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는데, 기자들이 서로 앞다퉈 질문하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비행기 시간 때문에 서둘러 기자 회견을 마쳤지만 기자들의 호기심은 끝이 없었다.

기자들이 흩어져 개별 지도자들을 상대로 질문을 퍼붓는 바람에 현장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 * *

“으아아악!”

와장창!

괴성이 들리더니 책상 위의 물건들이 바닥에 쏟아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놀란 비서가 급히 들어왔다가 잔뜩 일그러진 뉴트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나갔다.

뉴트가 폭주하고 있었다. 또 뭐가 맘대로 안 됐는지 괜한 것에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그냥 두는 게 최선이란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TV에서는 쿠렌코 총리가 제안한 아시아 메가 전력망에 대한 심층 취재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중국 왕칭린 주석은 아시아 메가 전력망에 적극 동참을 천명했습니다. 이를 통해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환경규제 완화 조치에 따른 부작용을 만회하겠다는 청사진도 발표했습니다.

-아시아 메가 전력망 사업의 최초 제안자는 전 알라딘 그룹 회장이며, 현 두만강 합작구 행정청장인 서진혁 씨로 알려졌습니다.

“개자식. 절대 가만두지 않는다.”

뉴트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진혁의 사진을 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 * *

다음 날.

슈왑은 갑자기 들이닥친 뉴트에게 곤욕을 치러야 했다.

“서진혁이 스위스에 간 것을 오메가 기사단이 몰랐다는 게 말이 됩니까?”

“워낙 급작스럽게 결정된 출장이어서 엠마도 나중에 알았다고 하더라.”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십니까? 서진혁 정도라면 밀착 감시를 했어야지요.”

“그래서 엠마를 보냈는데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고 하더라. 계속 밀어붙이면 반발만 커질 것 같아 시간을 두고 천천히…….”

“그렇게 한가한 상황이 아닙니다. 이번 일을 막지 못하면 우리가 계획했던 일이 모두 물거품이 된단 말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록펠러 가문의 원로원에서 경고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이번 제 계획이 틀어졌을 때는 심각한 상황이 도래할 거라고.”

“……!”

슈왑 회장도 그제야 뉴트가 이렇게 재촉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원로원에서 직접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은 그만큼 최근의 상황을 심각하게 지켜보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카이저는 권력을 쥐고 있으니 임기가 끝날 때까지는 함부로 할 수 없지만, 뉴트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원로원으로부터 신뢰를 잃으면 뉴트가 차기 백악관 주인이 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를 대통령에 당선시켜 베어링 가가 빅브라더를 장악하겠다는 자신의 원대한 계획도 수포로 돌아간다.

뉴트가 다시 재촉했다.

“다음 달로 예정된 장관급 실무 회담은 무조건 막아야 합니다. 아시아 메가 전력망이 완성되면 어렵게 쥔 에너지 패권도 무용지물이 될 겁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서진혁 그자입니다. 무조건 그 전에 제거해야 합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해. 무리하다가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가문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어. 최소한 빠져나올 방법은 강구한 다음에…….”

“지금 뒷일을 생각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니까요! 엠마에게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오메가 기사단을 움직여 무조건 결행하라고 하세요. 서진혁만 제거하면 모든 게 원상태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설득이 통하지 않는 뉴트의 모습에 슈왑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일을 진행할 때는 항상 만일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짜야 했다.

실패했을 때 변명이라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한 다음에 움직이는 게 기본이었다.

특히 엠마는 자신의 딸이었다.

최소한 그녀만이라도 빼 올 방법은 있어야 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슈왑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서진혁을 제거하고 싶어 하는 자는 뉴트만이 아니었다.

‘주드 모건!’

진혁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평생 이룬 명성마저 버린 채 이곳으로 직접 들어와 카지노 게임 개발자로 살아가고 있었다.

“장인!”

“잠시만 기다려 봐라.”

재촉하는 뉴트를 막고 슈왑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지자 말했다.

“마침 이번 일의 희생양으로 쓸 적당한 놈이 그곳에 가 있다.”

“누군데요?”

“주드 모건이라고…….”

슈왑이 뉴트에게 주드 모건에 대해 들려줬다. 물론 진혁과의 악연도 함께.

뉴트가 당연히 반색했다.

“아주 제대로 찾으셨네요. 그런 악연이 있다면 놈이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서진혁을 테러했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그렇지. 그럼 엠마도 혐의를 피해 갈 수 있고.”

“당장 준비해 주십시오.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두 사람은 이후 한동안 머리를 맞대고, 진혁을 제거한 뒤 그 죄를 주드 모건에게 씌울 전략을 짰다.

하지만 그들은 노트북 카메라가 자신들을 향한 채 깜빡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한편, 주드 모건은 지구 반대편 두만강 합작구 내 훈춘의 한 호텔에서 뉴트와 슈왑이 모의하는 장면의 녹화 파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겠다는 말을 듣고도 주드 모건은 놀라거나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싸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자신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바로 그때가 왔다.

4차 산업 기술의 비약적인 발달은 인간에게 편리함을 가져다줬지만 사생활 유출이라는 심각한 문제도 안겨 줬다.

사물 인터넷 보안은 초기 단계라 매우 취약했다.

노트북 컴퓨터의 카메라, 각종 가전제품에 탑재된 사용자 음성 인식 기능, 심지어 핸드폰까지.

스톰고까지 만들어낼 정도로 뛰어난 컴퓨터 천재인 주드 모건에게 그걸 해킹해 원격 제어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주드 모건은 슈왑 회장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길 만큼 어리숙하지 않았다. 카지노 월드를 택한 것은 그들이 가진 힘이 필요해서일 뿐이었다.

슈왑 회장의 사무실에서 벌어진 일을 녹화하기 시작한 것은 합류하고 채 며칠이 지나지 않은 뒤부터였다.

“더러운 자본가 놈들. 일단은 네놈들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하지만 난 결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아. 기다려라, 서진혁.”

중얼거리는 주드 모건의 눈에서는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 * *

“쿠렌코는 왜 회담 장소를 두만강 합작구로 잡아서…….”

“그러게 말이야. 날짜라도 좀 넉넉하게 잡든지. 빌어먹을 인간.”

훈춘에 도착한 진혁 일행은 입이 댓 발이나 튀어나와서 투덜거렸다.

다보스 포럼에 간 일은 100%가 넘는 목표 달성 덕에 뿌듯했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쿠렌코가 사전 상의 없이 아시아 메가 전력망 장관급 실무 회담 장소를 두만강 합작구로 발표하는 바람에 일이 급격하게 늘어 버렸다.

이제 개발하기 시작한 터라 회담 장소가 훈춘 외에는 전무한 실정이었다.

하지만 모스크바의 분위기는 봄날이 따로 없었다.

다보스 포럼에서 돌아와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쿠렌코 총리에게 세르게이 대통령의 아부가 이어졌다.

“정말 큰일을 해내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서 회장이 물건이었어. 탕분헝 총리와 나즈마 총리가 입이 마를 정도로 칭찬한 이유가 있었어. 서 회장 같은 사람이 내 곁에 한 명만 있었어도 지금의 러시아는 달라졌을 거야.”

“그자야 아이디어만 낸 거고, 총리께서 각국 지도자들의 동의를 이끌어내서 성사시키신 일입니다. 아시아 메가 전력망이 완성되면 아시아 대륙은 우리 러시아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될 겁니다. 이제 더 이상 미국 놈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됐습니다.”

세르게이는 답변을 하면서 은근히 진혁의 역할을 낮추는 말을 앞에 붙였다.

그가 비록 영원한 2인자지만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처세술 때문이었다.

정적으로 성장할 만한 자들을 온갖 감언이설로 쿠렌코의 마음에서 멀어지게 한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 어느 때보다 밝았던 쿠렌코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면서 방 안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세르게이는 자신의 답변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고민이 있으십니까?”

“네 말이 맞다. 너무 일이 쉽게 풀리다 보니 내가 놈들을 잊고 있었다.”

“누굴……?”

“미국. 아니, 빅브라더. 놈들이라면 우리가 힘을 키우는 것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무 안일했다.”

“……!”

세르게이의 얼굴마저 잔뜩 굳어졌다.

2차 대전 종전 후 미국과 함께 세계를 이끌던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는 강력한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재건) 정책 때문이었다.

사회, 경제, 정치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급진적인 시장 경제 전환은 보수 사회주의자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양측의 극한 대립으로 혼란에 빠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 틈을 미국이 놓칠 리가 없었다.

우크라이나를 충동질해 분리 독립 요구를 하게 해서 결국 러시아를 중심으로 15개국으로 해체시켜 힘을 약화시켰다.

당시 쿠렌코는 KGB에 근무하고 있었기에, 그 일을 유대 자본인 빅브라더가 주도했음을 알고 있었다.

쿠렌코가 집권하자마자 러시아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과두 재벌부터 대대적인 숙청해 버린 것도 그들을 경계해서였다.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쿠렌코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노크 소리와 함께 니콜라이 국장이 빠르게 들어와 말했다.

“빅브라더의 꼬리를 잡았습니다.”

니콜라이는 KGB의 새로운 이름인 러시아 연방보안총국(FSB)을 맡고 있었다.

니콜라이 역시 유대 자본의 위험성을 알고 있어, 항상 그에 대한 감시망을 가동하고 있었다.

쿠렌코가 바로 물었다.

“어디냐?”

“블라디보스토크입니다. 암시장을 통해 다량의 폭탄이 거래된다는 제보를 받고 조사하다가 알게 됐습니다.”

“그럼 당장 잡아들여야지요.”

“기다려라.”

세르게이의 의견을 쿠렌코가 바로 막고 니콜라이에게 물었다.

“누가 제보한 것이냐?”

“그건…… 익명의 메일로 와서 현재 IP를 추적 중에 있습니다.”

“감시는 붙였겠지?”

“놈들이 훈춘에서 카지노 월드 관계자들과 만나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역시 두만강 합작구에서 열리는 아시아 메가 전력망 장관급 회담을 막겠다는 생각이군.”

“그럼 큰일입니다. 당장 서진혁 행정청장에게…….”

“나서지 말라고 했다!”

쿠렌코의 호통에 전화기를 잡아가던 세르게이의 동작이 그대로 멈췄다.

두 번째 경고였다.

여기서 한번만 더 호통이 터지면 자신의 자리가 위험해진다.

쿠렌코가 니콜라이에게 물었다.

“연방보안총국의 의견은?”

“어렵게 잡은 기회입니다. 지금 잡아봤자 피라미들뿐이고 대어들은 다 빠져나갑니다. 좀 더 지켜보다가 결정적인 상황에 덮쳐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쿠렌코의 이마가 좁혀졌다.

연방보안총국의 의견은 옳았다. 빅브라더를 무너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문제는 위험성이었다.

이쪽에서 눈치챘듯이 저쪽에서 감시를 알아차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두만강 합작구는 물론 아시아 메가 전력망 계획까지 좌초될 수 있었다.

니콜라이는 물론 세르게이마저 숨죽인 채 쿠렌코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항상 모든 결정은 그가 했다. 누구의 의견도 듣지 않았다.

꿀꺽.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세르게이가 침을 삼키는 순간 쿠렌코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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