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위험한 가족 여행
“일단 지켜본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위험에 대한 대비도 있어야 한다. 서진혁에 대한 감시도 병행한다.”
“알리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놈은 사업가지 요원이 아니다. 테러에 대한 공포감으로 오히려 일을 망칠 수 있다. 우리만 알고 있는 것으로 한다.”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쿠렌코의 선택은 빅브라더의 몰락이었다.
나머지는 후순위였다.
지금까지 칭찬했던 진혁의 안전까지도.
* * *
훈춘에서 회담 장소와 장관들이 묵을 숙소 등을 섭외하고 우수리스크로 돌아온 다음 날.
“아이고, 죽겠다.”
“나도 다리가 뻐근해. 알이 밴 것 같다.”
사무실로 돌아온 희준이 앓는 소리를 하자, 평소라면 핀잔을 줬을 진혁이 오늘은 맞장구를 쳤다.
그만큼 힘든 여정이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준비를 마친 상태라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 나머지는 중국 공안에서 알아서 할 일이었다.
두만강 합작구의 치안과 국방은 해당 지역의 각 나라에서 책임지기로 되어 있었다.
진혁이 쇼파에 등을 기대고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우리도 며칠간은 좀 쉬자. 회담일이 다가오면 또 바쁠 테니.”
“그래. 쉬자. 그런데 공장장님 만나서 좀 말려라.”
“공장장님이 왜?”
“결혼식을 올리시겠다고 하시나 봐.”
“타냐 할머니랑?”
“자식들까지 인사를 시키셨다고 하더라. 그럼 그냥 사시지, 그 나이에 무슨 결혼식을……. 다들 뒤에서 수군거려.”
“내가 한번 만나 뵙고 이야기를 나눠 볼게.”
갑자기 튀어나온 고민거리에 진혁이 생각에 잠기려고 하자 희준이 얼른 말했다.
“나 이번 주에 한국에 다녀오면 안 돼?”
“무슨 일 있어?”
“지현 씨 본 지도 오래됐고, 애도 보고 싶고……. 이번 지나고 다음 주말이면 회담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아 가기 힘들잖아?”
“나도 본 지 오래됐거든. 쓸데없는 생각 말고 일이나 해.”
“에라이, 악덕 고용주 같은 놈아.”
“지민 씨가 가족들 데리고 이리로 오기로 했어.”
“정말?”
“다음 주말에 어린이날이 끼어서 연휴라더라. 바쁠 거 알고 그렇게 결정한 모양이야.”
“그럼 진작 이야기하지. 가서 열심히 일할게.”
언제 욕하며 화를 냈냐는 듯이 활짝 핀 얼굴로 나가는 희준의 모습에 진혁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역시 가족은 힘든 업무에 청량제 같은 존재였다.
퇴근한 진혁이 솔빈 센터에서 기다리고 있자 권기남이 들어왔는데 시선이 삐딱했다.
앞에 와서 앉자마자 권기남이 속사포처럼 쏘아붙였다.
“네래 다른 아새끼들처럼 말리면 내래 다시 볼 생각 하지 마라. 나 좋자고 식 올리겠다는 게 아니야. 타냐 할망구 때문이지. 형편이 어려워서 식도 못 올리고 정한수 한 대접 떠 놓고 첫날밤을 치렀다고 하드라. 그런데 또 죄인처럼……. 절대 그럴 수는 없다. 애들하고는 이미 상의가 끝났다.”
“하세요.”
“계속 말리면 가족들끼리……. 뭐?”
“결혼식 올리시라고요. 제가 아주 성대하게 열어 드리겠습니다.”
“참말이가?”
“그럼요. 공장장님이 제게 어떤 분인지 누누이 말씀드렸잖습니까. 공장장님 결혼식은 당연히 제가 준비해야지요. 아무 걱정 마시고 날짜만 잡으십시오. 두 번 사는 인생, 제대로 시작해야지요.”
“고맙다. 역시 너밖에 없다. 내래 이래서 너를 좋아하는 기다!”
권기남이 활짝 핀 얼굴로 크게 소리쳤다.
진혁이 다른 이들과는 달리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격려까지 해 주니 고맙기 그지없었다.
사실 진혁은 희준의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말리려고 했었다.
하지만 오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비록 지금 겉모습만 보면 권기남이 두 배는 더 먹어 보이지만 진혁의 지난 삶까지 더하면 비슷한 나이였다.
자신도 회귀해서 새 가정을 꾸렸는데 권기남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100세 시대였다. 이왕 사는 것, 누가 뭐라든 자신이 행복하면 그만이었다.
이후 진혁이 권기남의 결혼식을 직접 열어 준다는 소식에 고려인 정착촌이 한동안 들썩거렸다.
거기에 더해 진혁의 가족이 이곳을 방문한다는 소식도 함께 퍼져나갔다. 입이 싼 희준이 때문이었다.
덕분에 고려인 정착촌까지 손님맞이와 행사 준비 관계로 덩달아 바빠졌다.
* * *
두만강 합작구가 여러 이유로 바쁘게 돌아갈 때 베이징의 총리실은 긴장에 휩싸여 있었다.
국가안전부에서 올린 보고서 때문이었다.
“훈춘에서 러시아 연방보안총국 요원들이 자주 목격되고 있다고?”
“그렇다더군. 아시아 메가 전력망 회의에 대한 보안 때문이라면 우리 측에 먼저 양해를 구했을 텐데, 그러지 않았어. 은밀히 활동하는 게, 아무래도 뭔가 다른 일 때문인 것 같다고 하네.”
“이번 일에 어떤 문제라도 생기면 안 되네.”
왕칭린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말했다.
중국의 작년 경제 성장률은 개혁 개방 정책을 편 이래 최악을 기록했다. 구조적인 문제도 있지만 미국이 벌인 무역 전쟁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다고 포기하려는 순간 아시아 메가 전력망이 튀어나왔다.
전기 수급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로 인해 그동안 동서경제벨트 정책으로 소원해진 여러 국가들과 자연스럽게 관계 개선을 할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그간 견원지간으로 지낸 인도와의 평화 회담은 중국 경제에 단비가 될 게 틀림없었다.
인도는 세계 2위 인구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로,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는 신 시장이었다.
미국의 수입 금지 조치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수출업체에 호재였다. 덕분에 미국과의 무역 전쟁 협상에서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됐다.
리광잉이 호응을 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네. 아시아 메가 전력망 사업의 성패에 따라 세계 질서가 요동을 칠 거야.”
“맞아. 당장 안전부에 두만강 합작구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라고 지시하게. 작은 문제라도 즉시 보고하라고 하고.”
“알겠네. 바로 조치하겠네.”
리광잉이 서둘러 일어나 나갔다.
두만강 합작구가 뜨거운 첩보 전쟁터로 변하고 있었다.
* * *
그 시각, 카지노 월드 일행이 머물고 있는 훈춘의 한 호텔에서도 심각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엠마가 검은 사제복을 입고 있는 이에게 물었다.
“조셉, 준비는 다 된 건가요?”
“완벽하게 마쳤습니다. 조그마한 가방 모양이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위치만 정해지면 됩니다.”
조셉은 오메가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대장이었다. 폭탄 준비가 완료됐다는 말이었다.
엠마가 이마를 찡그리고 말했다.
“아버지께서 연락하셨는데, 최근 이곳에 러시아는 물론 중국 측 요원들이 대거 투입됐다고 해요. 아무래도 놈들이 뭔가 낌새를 맡은 것 같아요.”
“그럼 취소되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임무는 완수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런 상황이라면 서둘러야 합니다. 움직임도 최소화하고요.”
“알아요. 문제는 장소인데, 놈이 자주 가는 곳들은 알라딘 시큐리티 직원들이 밀착 경호를 하고 있어 쉽지 않아요.”
“그럼 이곳으로 불러들입시다.”
갑자기 끼어드는 주드 모건의 행동에 엠마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진혁의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한 행동을 보면 꼴도 보기 싫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계획을 듣고 마음을 바꿔 곁에 머물게 하고 있었다.
어차피 자신 대신 희생양이 되어 사라질 자였다.
엠마가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당신이 무슨 재주로 그자를 이곳으로 불러들이겠다는 건가요?”
“난 그자를 두 번이나 상대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놈의 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단점?”
“놈 자체는 완벽합니다. 직접 공격해서는 승산이 없어요. 그가 가장 아끼는 것으로 유인해야 합니다.”
“아끼는 것?”
“가족. 그중에서 딸.”
“……!”
엠마는 물론 조셉마저 눈이 커졌다.
설마 모건이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들고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정보에 의하면 이번 주말에 놈의 가족들이 이곳을 방문한다고 합니다. 그때 딸을 납치해 이곳으로 불러들인다면 반드시 올 겁니다.”
“…….”
“놈에게 연락하는 것도, 이곳에서 놈을 기다리는 것도 모두 내가 하지요.”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엠마에게 모건이 말했다.
“당신은 내가 왜 모든 것을 버리고 카지노 월드를 찾아갔는지 가장 잘 알잖습니까. 내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 놈을 몰락시키는 겁니다.”
“좋아요. 당신이 목표를 이룰 수 있게 우리가 돕죠. 조셉, 준비하세요.”
“알겠습니다.”
조셉이 차가운 표정으로 일어났다.
이제 며칠 후면 서진혁의 목숨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 * *
어린이날 연휴를 이용해 진혁의 가족을 비롯한 일행이 두만강 합작구에 도착했다.
양가 부모님과 희준 가족까지.
열 명이 넘어 적지 않은 인원이었다.
소식을 들은 고려인 연합회에서 솔빈 센터를 통으로 내놓았다.
“어르신들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폐를 끼칠 수 없다며 호텔에서 지내겠다고 사양하던 진혁은 아버지 서명수의 한마디에 포기했다.
부모님들은 어색한 호텔보다는 고향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고려인 정착촌이 더 마음에 드신 모양이었다.
다음 날, 진혁은 가족들과 함께 연해주 관광을 하고 저녁에 솔빈 센터로 돌아왔다.
고려인들이 마련한 푸짐한 음식을 배불리 먹은 진혁이 숟가락을 놓고 일어났다.
너무 많이 먹어 속이 더부룩할 정도였다. 산책이나 하며 배를 꺼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던 진혁이 동작을 멈췄다.
혜주가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쪼그리고 앉아 흙바닥에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진혀이 옆에 쪼그리고 앉으며 물었다.
“혜주야, 여기서 뭐 해?”
“그냥 심심해서…….”
힘없는 목소리로 답하는 혜주의 모습에 진혁은 아차 싶었다.
부모님을 배려한다고 숙소도 솔빈 센터로 정한 데다, 오늘 관광도 역사 유적지 위주로 돌았다.
혜주 또래 아이들에게는 지루했을 법했다.
혜주가 다시 말했다.
“여긴 재미없어.”
“그럼 혜주는 어디가 좋았는데?”
“그랜드 캐니언!”
혜주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랜드 캐니언의 웅장한 모습에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더니, 그곳이 가장 기억 속에 남았던 모양이었다.
“그럼 이번 여름휴가는 거기로 가자.”
“정말?”
“그럼. 언제 아빠가 혜주한테 거짓말한 적 있어?”
“아닌데……. 아빠는 맨날 바빠서 옆에도 없잖아.”
혜주의 투정에 진혁은 가슴이 아려 왔다.
지난 삶에서 딸에게 못해 준 게 미안해서 회귀까지 했는데, 다시 사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부족한 아빠로 행동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당장 모든 것을 접을 수도 없었다.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고 혜주와 함께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혜주야, 아빠가 준 팔찌 하고 있어?”
“응, 여기.”
혜주가 자랑이라도 하듯 소매를 걷어 올리고 마법 펜던트 팔찌를 보여 줬다.
“그래. 이 팔찌는 아빠랑 같아. 아빠가 비록 옆에 없지만 이게 널 지켜 줄 거야. 아빠가 필요할 때는 이걸 꽉 붙잡고 빌어. 그럼 아빠가 짠 하고 나타날게.”
“치. 거짓말.”
혜주는 올해 초등학생이 된 터라,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그래도 효과는 있었는지 시무룩한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내일은 혜주가 재미있게 놀 수 있는 곳으로 가자.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약속!”
혜주가 내민 새끼손가락에 진혁도 손가락을 걸고 도장까지 찍고 복사까지 마쳤다.
다음 날은 약속대로 블라디보스토크 구경에 나섰다.
그렇다고 혜주랑 마냥 놀 수는 없었다.
정신 연령이 비슷한 희준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자신은 부모님을 안내해야 했다.
서로 기호가 다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두 팀으로 나뉘어 움직였다.
김상균이 이상한 낌새를 차린 것은 그때쯤이었다.
방금 지나간 관광객 차림의 남녀는 좀 전에 선물 가게에서도 봤던 이들이었다.
김상균이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고 급히 진혁에게 다가갔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
“감시를 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장 아이들을 부르세요.”
“알겠습니다.”
김상균이 급히 핸드폰을 꺼내 멀어졌다. 그쪽도 알라딘 시큐리티에서 파견 나온 직원들이 경호하고 있었다.
그때 진혁의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연결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