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차도살인
-미스터 서는 내 가족이야. 그럼 혜주는 내 조카가 돼.
“백악관과 척을 질 수도 있습니다.”
-난 미국을 위해서 일하지, 그자의 종이 아니야.
“……고맙습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내가 직접 가서 구할 테니까 걱정 말고 위치나 말해.
“그랜드 캐니언입니다. 관련 영상을 핸드폰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오케이. 구하고 연락하자고.
잭슨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그 역시 서두르는 것이었다.
올가에게 부탁해 자료를 잭슨의 휴대폰으로 보낸 진혁이 희준과 함께 맥카렌 국제공항에 도착한 것은 해가 막 뜨기 시작할 때였다.
출국장을 나오자 잭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아빠!”
“……혜주야!”
두 부녀가 서로 달려가 부둥켜안고 뜨거운 상봉을 했다.
“무서웠지?”
“조금. 그래도 아빠가 팔찌에 기도하면 올 거라고 했잖아. 그래서 괜찮았어.”
“미안해, 혜주야. 아빠가 다시는 널 혼자 두지 않을게.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진혁이 혜주를 안은 팔에 더 힘을 주며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
흥분된 감정이 가라앉자 진혁은 혜주를 희준에게 잠시 맡기고 잭슨과 공항 내 카페에서 마주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몰라 바로 돌아갈 예정이라 미리 비행기 표까지 구입해 놓은 상황이었다.
“고맙습니다.”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 그런데 애가 어떻게 거길 혼자서 올라간 거야? 전문 암벽 등반가도 쉽지 않은 봉우리라고 하던데.”
“그래서 놈들이 거길 택했나 보지요.”
진혁이 준비한 핑계거리를 꺼내 놓았다. 솔직히 마법 펜던트에 대해 털어놔 봤자 의심만 더 살 게 분명했다.
잭슨이 진혁의 안색을 살피고 물었다.
“바로 돌아갈 거지?”
“부모님들까지 계실 때 벌인 일이라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십니다.”
“나쁜 자식!”
잭슨이 입에서 바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진혁의 다른 설명 없이도 그는 뉴트가 벌인 일이라는 말을 믿어 줬다.
고마운 사람이었다.
흐뭇한 표정을 짓던 진혁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CIA 국장 제임스였다.
“미안해. 국장님께도 비밀로 할 수는 없었어.”
잭슨의 변명에 이어 제임스가 말했다.
“잭슨도 실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도 두만강 합작구에서 모종의 작전이 진행 중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와 중국의 요원들이 그렇게 몰려드는데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지요.”
그런 상황에서 잭슨이 갑자기 비상 출동을 하겠다니 캐물은 건 당연했다.
제임스가 앞에 앉으며 물었다.
“그 일을 뉴트 특별 보조관이 주도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맞습니다.”
제임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짧은 답변이 오히려 진혁의 말에 신빙성을 더해 줬다.
제임스가 고민하는 모습에 진혁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절 막으실 생각이십니까?”
“이봐, 국장님은…….”
“괜찮다.”
잭슨의 입을 막고 제임스가 답했다.
“난 죄를 지으면 당연히 벌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어린아이를 이용하는 자들은 더 엄중하게. 뉴트가 아니라 대통령이 관여됐다고 해도 그 원칙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게 다른 형태로 변질될까 걱정이 되어서 나온 겁니다.”
“변질이라니요?”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이번 일을 중국과 러시아 양국 정부가 모두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이 돌아가시면 어떤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
진혁의 눈이 커졌다.
제임스가 뭘 우려하는지 느껴졌다.
중국은 현재 미국과 무역 전쟁 중이었다. 거기에 쿠렌코는 과거 소련의 명성을 되찾아 미국과 대등한 힘을 갖고 싶어 했다.
그들도 진혁이 주드 모건으로 받은 정보를 탐낼 것은 당연했다.
그걸 빌미로 백악관과 더러운 거래를 할 가능성도 농후했다.
그들에게는 혜주가 당한 일은 안중에 없었다. 그랬다면 요원들을 급파하면서 자신에게 먼저 위험을 알렸어야 했다.
두만강 합작구도 서로가 필요해서 만들어진 것일 뿐, 자국의 이익 앞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자료를 건네주지 않는다면 더 큰 위험이 도사린다.
빅브라더가 증거를 뺏기 위해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다.
세계 최강 미국마저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힘을 가진 집단이었다.
진혁이 가진 정보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자신을 해할 수도 있는 양날의 검 같은 존재였다.
진혁의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습에 제임스는 그가 현 상황을 충분히 인식했음을 알았다.
“우리가 잘못한 일이니 피할 생각은 없습니다. 미국인의 한 사람으로 부끄럽고 죄송스럽습니다. 어떻게 하실지는 서 회장님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고민해 보겠습니다.”
“염치가 없어서 더 머무르시라는 말씀은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잘 돌아가시고, 다음번에 만났을 때는 좀 더 여유를 갖고 편하게 뵙도록 하지요.”
벌써 비행기를 탈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잭슨과도 작별해야 할 시간이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서운하게 그런 말 마. 튀니지에서 미스터 서가 날 구해 준 것을 잊지 않고 있어. 미국에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해서 내가 더 미안해.”
“다음에는 정말 편하게 볼 수 있었으면 싶습니다.”
“그러자고. 핸드폰에 미스터 서 번호가 뜨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적당히 하고 살아.”
“저도 그러고 싶은데 주변이 가만 놔두질 않네요. 아무튼 노력해 보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헤어진 진혁은 희준과 함께 혜주를 데리고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혜주가 배고프다고 해서 식당에 들어가 스파게티를 시켜 줬다.
진혁과 희준은 간단한 음료만 마셨다.
희준이 앓는 소리를 했다.
“무슨 놈의 팔자가 열다섯 시간이 넘게 비행기를 타고 와서 고작 한 시간 머물다가 다시 열다섯 시간 걸려서 돌아가냐.”
“그러게 나 혼자 온다니까.”
“너 같으면 혼자 남아서 편하게 있을 수 있겠냐?”
정곡을 찌르는 희준의 반문에 진혁은 말문이 막혔다.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부모님의 걱정까지 받아 주려면 차라리 오는 게 속 편했다.
혜주는 배가 고팠는지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식당을 나온 진혁이 게이트 앞 의자에 혜주를 앉히고 나서 핸드폰을 들고 일어났다.
“아빠 전화 한 통 할게.”
“응. 걱정 말고 하고 와. 아빠 필요하면 여기 팔찌에 대고 말할게.”
혜주의 천진난만한 답변에 진혁이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다. 아이다운 답변이었다.
한쪽 구석으로 가서 전화를 연결하는 진혁의 얼굴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럭키 가이, 이거 얼마 만입니까?
“공기 좋은 곳에서 쉬니 편합니까?”
-가끔 미스터 서와 함께했던 치열한 현장이 그리운 것 빼고는 만족합니다.
NS통신의 조나단 기자였다.
그는 은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전원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조나단이 물었다.
-무슨 일인데 퇴물 기자에게까지 전화하신 겁니까?
“그럼 이제 기자가 아니신 건가요?”
-명예 기자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감이 떨어져서. 필요하시면 후배 기자들을 소개시켜 드릴 수는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퓰리처상을 후배 기자에게 양보하시겠다면 그렇게…….”
-어디십니까? 당장 찾아가겠습니다.
퓰리처상이라는 말에 조나단의 태도가 확 달라졌다.
진혁 덕분에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한 일본 정부와 일본전력의 거짓말을 폭로해 이미 수상했는데도 욕심은 여전했다.
“제가 지금 미국을 떠나야 해서 시간이 안 되기도 하지만,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됩니다. 자료만 보시면 충분히 어떤 상황인지 아실 겁니다.”
-큰 건입니까?
“지난번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혜주 곁으로 돌아간 진혁은 노트북을 꺼내 자료들을 확인한 후 조나단의 메일로 보냈다.
놈들을 단죄하면서 러시아와 중국 정부가 악용하는 것을 막을 방법은 공개적으로 터트려 버리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택한 게 조나단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도착해 핸드폰 통화가 가능해지자마자 조나단 기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아마 수십 번도 넘게 전화를 시도했을 것이다.
“잘 보셨습니까?”
-이게 정말 사실입니까?
“그 많은 영상을 조작할 수는 없지요.”
-이건 도대체…….
조나단이 말을 잇지 못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누볐던 종군 기자로 무서울 게 없는 조나단이었지만, 진혁이 건넨 자료는 그 이상이었다.
미국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핵폭탄이었다.
조나단이 말이 없자 진혁이 그간 벌어진 일에 대해 간략하게 알리고 말했다.
“기자님에게 선택을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저는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막 도착했습니다. 밖에는 연방보안총국 요원이 지키고 있겠지요. 러시아 정부도 그 자료에 관심이 많을 테니까. 물론 중국 정부도 마찬가지고요.”
-……!
“내가 그 자료를 넘겨 미국이 외교적인 곤욕을 치를지, 미국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고 관련자들을 단죄할지는 전적으로 기자님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선택해서 결정하는 게 맞습니다.
“그 또한 기자님이 결정하실 문제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시든 전 기자님이 기자로서의 양심에 따른 것이라 믿고 지지합니다.”
-제게 먼저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드시 한 점 의혹 없이 밝힐 것을 약속드립니다.
“시간을 끌어 정보가 새면 위험해지실 수도 있습니다. 이왕 터트리실 것이면 서두르십시오.”
-데스크에 연락해 두었습니다. 회장님과 통화했으니 바로 출발할 겁니다.
“조심하십시오.”
진혁이 서둘러 통화를 끝냈다.
예상대로 양복 차림의 사내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총리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족들에게 인사는 해야지요.”
“…….”
“힘든 일을 겪으신 분들입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끝내 주십시오.”
요원들도 어떤 상황인지 알기에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출국장 밖으로 나가자 눈물바다가 펼쳐졌다.
내내 씩씩한 채 행동했던 혜주도 지민을 보자마자 품에 달려가 대성통곡을 했다.
양가 부모님들은 그런 두 사람을 감싸 안고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에 진혁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
다시 한번 혜주를 곁에 두고 지켜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느 정도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진혁이 양가 부모님에게 양해를 구했다.
“쿠렌코 총리께서 찾으십니다. 모스크바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괜찮겠나?”
정보 계통의 일을 하는 김세동이라,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몰라도 진혁이 강대국의 세력 싸움에 말려들었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에 대비해서 미리 조치를 취해 두었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그래도 조심하게.”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김상균과 함께 보안 요원을 따라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탔다.
두 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모스크바에 도착하자 활주로에 총리 전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경찰 오토바이의 호위를 받으며 한 번도 막히지 않고 바로 총리실로 향했다.
쿠렌코가 얼마나 급하게 진혁을 만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는 조치들이었다.
총리실에는 쿠렌코 말고도 두 명이 더 있었다.
세르게이 대통령과 니콜라이 연방보안총국장.
러시아를 움직이는 핵심 3인방이 모두 모였다.
“아이를 무사히 구했다는 보고는 받았네.”
“늦었지만 많은 도움을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진혁이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이제 겨우 워밍업이었다.
쿠렌코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범인이 마지막에 폭탄을 터트려 자결하는 바람에 모든 증거가 다 사라졌다더군.”
“저도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충격에 정신을 잃었다가 나중에 들었습니다.”
“주드 모건이었다면서?”
“그렇습니다. 저하고는 악연으로 얽힌 자입니다.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다시 만났을 때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진혁은 그동안 주드 모건하고 일어났던 일에 대해 들려줬다.
쿠렌코가 보고 받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놈이 뛰어난 컴퓨터 천재였다는 것은 알겠는데, 이런 큰일은 단순히 머리만 있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조직의 힘이 있어야 해. 그것도 상당히 큰 힘. 그래서 나는 진범은 따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자넨 어떻게 생각하는가?”
쿠렌코의 눈빛이 더 날카로워졌다.
이제부터가 본 게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