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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2화 (2/275)

002화

나에게 기억상실증이라는 참 형편 좋은 변명거리를 제공해준 의사는 내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지만 만약을 대비해 하루 정도 안정을 취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내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백작 부인 로델린은 의사의 말에 동의했다. 덕분에, 나는 방 안에서 아무도 없이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어디 보자.”

나는 아까 하다 만 조사를 다시 이어가기로 마음먹고, 방 안을 살펴보았다.

바닥에 가구가 끌린 자국 몇 개가 보인다. 그것뿐 아니라 파인 홈 같은 것들도 보인다. 누군가 뭔가로 바닥을 강하게 찍을 일이 없으면 생길 리가 없는 흔적들.

테이블 아래에서, 천장의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굉장히 작은 유리 파편 두어 개를 발견했다. 테이블 밑으로 손을 넣어 가볍게 손가락을 비비자, 말라붙은 피가 손가락에 약간 묻어나온다.

그 흔적들을 통해 세울 수 있는 가설.

나는 누군가에게 엄청 맞고 살았거나, 아니면 누군가를 엄청 때리고 산 것 같다.

“맞고 살았으면 하녀가 그렇게 나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잖아.”

흥신소를 운영하면서 내가 했던 일들은 외국의 사립탐정이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얻어낼 수 있는 정보를 최대한 확보하고, 그 정보를 분석한다. 그리고, 나는 그걸 엄청 잘하는 편이다.

8000개가 넘는 대부분의 흥신소와 나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 차이점이 내가 다른 흥신소는 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돈을 많이 받는 이유였지.

어쨌든, 방을 돌아다니며 찾아낸 정보를 분석한 결과는 의외로 싱거웠다.

“내가 사람을 막 때리고 다녔었나?”

그렇다면 방금 전 여자와 의사의 태도가 이해된다. 다시 방 안을 돌아다니던 와중에, 서랍을 열자 술병이 한가득 튀어나왔다.

“술이라. 왜 아니겠어. 사람 칠 때 술이 없으면 섭하지.”

심지어 대부분의 병은 내용물이 절반 이하만 남아있다. 술을 어지간히도 즐기는 모양인데. 나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중얼거렸다.

“장남일세. 미성년자 주제에 술 먹고 사람 치는 게 취미지.”

레드우드 백작가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본다. 애초에, 지금 이 세상이 현대는 아닌 것 같다.

“불가능한 것을 제외하고 남은 것이 아무리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진실이다.”

셜록홈즈에 나오는 말이었지. 그래, 그 논리대로라면 지금 이 상황에서 진실은 결국 하나다.

흥신소 일을 하다 덜미가 잡혀 바다에 다이빙한 나는,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가 용궁에 떨어진 것처럼…… 지구가 아닌 어떤 세상의 귀족 가문 장남으로 뚝 하고 떨어진 거다.

노크 소리가 들린다.

“누구지?”

“도련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문이 열리고, 제일 처음 내가 깨어난 것을 확인했던 바로 그 하녀가 트레이를 밀고 들어와 인사했다.

“의사는 갑작스럽게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몸에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말을 하며, 하녀는 내 침대 위에 상을 차렸다. 메뉴는 검소했다. 야채를 넣어 끓인 묽은 수프와 물 정도가 전부였다. 나는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한 입 먹었다.

“식사는 입에 맞으신지요.”

“아니, 맛없어.”

굳이 비교하자면 병원밥 수준이 아닐까. 내 말에 여자의 안색이 확 하고 변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는 없는데. 의사가 이렇게 먹으라고 했다면야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어차피 상한 음식이 아니라면 위 속으로 들어간 다음은 다 거기에서 거기다. 위장에 미뢰가 붙어있는 것도 아니니까.

식사를 마친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 사이, 하녀는 내가 먹은 그릇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내 말에 하녀가 그릇을 정리하다 말고 곧바로 정자세로 선 다음에 말했다.

“네, 도련님. 듣고 있습니다.”

“그릇 정리하고 나서, 심심풀이로 읽을 만한 책 한 권과 사전을 가져다줘.”

내 말에 하녀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이유가 뭘까.

“책과…… 사전 말씀이십니까. 그리하겠습니다. 따로 원하시는 책이 있으십니까.”

“그냥 심심풀이로 읽을거리면 충분할 것 같은데.”

어차피 책이 목적이 아니라 사전이 목적이다.

사전을 보면 확실해지겠지. 정말로 인터넷이나 콘센트 같은 게 아예 없는 세상이라면 사전에 그런 단어가 적혀 있을 리 없다.

정리를 마친 하녀가 나갔다가 얼마 뒤 다시 돌아왔다. 책과 두꺼운 사전이었다. 하녀가 돌아가고, 나는 사전을 펼쳐 쭉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건 뭐야.”

슥슥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던 내 시선을 잡은 건 마력이라고 하는 단어였다. 세상 만물을 유지하고 파괴하는 근본된 기운?

지구 어디를 뒤져봐도 마력이라는 단어를 이런 식으로 설명한 사전은 없을 것이다. 그 단어를 읽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중년 남자 한 명이 서 있다.

입고 있는 근사한 옷과 잘 다듬은 콧수염. 그리고 기름을 발라 정돈한 머리. 키는 182 정도, 몸무게는 발달한 근육을 생각해보면 80-85kg 정도 될 것 같다. 중년은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는데, 손잡이를 감싼 가죽이 많이 닳아 있었다. 검 같은 걸 쓰는 사람인가.

약지에 끼워진 반지는 로델린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와 그 형태가 닮았다. 그럼, 이 사람이 내 아버지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두 개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누구십니까?”

내 말에 서 있던 남자가 하, 하는 소리를 내고는 나를 바라봤다.

“네 아버지 되는 사람이다.”

그렇군, 그럼 저 남자가 레드우드 백작인 건가.

백작의 목소리는 우렁차고, 다소 격양되어 있었다. 이유가 뭘까. 정신을 잃었던 아들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 기쁨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이 있는 걸까.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사전을 덮었다. 그제야, 남자의 시선이 내가 보고 있던 사전으로 향했다.

“책이라? 평생 책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으려 기를 쓰던 네가? 정말로 기억을 잃기는 한 모양이구나.”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도, 사실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뻔질나게 쓰고 다니던 그 흉해 빠진 반쪽짜리 가면은?”

“가면?”

무슨 가면. 아, 내 몸의 원주인은 뺨의 화상 자국이 있었다. 그 흉터에 나름대로 트라우마 같은 게 있었던 모양이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나에게 시선을 주고 있던 남자는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베른은 뛰어난 의사다. 그가 오진을 했을 리 없지. 기억을 잃었다니. 그것 참.”

말을 마친 그는 잠깐 눈을 감고 있다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로델린은 슬퍼하는 모양이지만, 어쩌면 차라리 이게…… 다행일지도 모르겠구나. 남들에게 알려져서 좋을 일은 없으니. 일단 베른으로 하여금 입단속을 시켰다.”

백작은 그 말을 끝으로 방에서 나갔다. 다행이라. 나는 그 말에 턱을 쓰다듬었다. 밖을 보니, 날이 제법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이렇게 지나갈 모양이다.

* * *

레드우드 백작가의 마틴 레드우드. 그 어린 녀석을 일컫는 별명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두 가지다.

올가미 도련님. 가면을 쓴 반푼이.

마틴 레드우드가 실신했을 때, 가솔들은 기쁜 마음을 감추기 위해 기를 써야 했고, 다시금 마틴 레드우드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반대로 슬픈 마음을 감추기 위해 기를 써야 했다.

그 또라이가 병상에서 일어났다. 소문에 따르면 몸도 멀쩡하다고 한다.

“어디 다친 곳은 없어?”

안젤라는 마틴 레드우드가 깨어났을 때 그 자리에 있던 하녀였다. 그리고, 그날 마틴 레드우드의 잔심부름을 담당하는 당번이기도 했다. 몇몇 하녀들이 그런 그녀 쪽으로 와서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어본다.

“네, 오늘은 별일 없었어요.”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가. 그 미친 올가미가…….”

하녀들 중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여자가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의 목을 살짝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마틴 레드우드는 어린 나이에 술만 먹으면 개가 되어서 사람을 패기가 일쑤였지만, 그것보다 더 지독한 일도 하곤 했다.

올가미. 마틴 레드우드는 조금이라도 하인이나 하녀들이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면 그대로 그 녀석의 목에 올가미를 걸고 기절할 때까지 꽉 조이는 버릇이 있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절대로 얼굴을 보지 마. 알았지? 목에 올가미가 걸릴 거야.”

마틴 레드우드는 자신의 뺨에 난 화상 자국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누가 그걸 쳐다보는 것 같다는 느낌만 받아도 미친 듯이 날뛴다.

경험많은 베테랑 하녀의 조언에 안젤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자신이 오늘 그 올가미 도련님의 얼굴을 본 횟수를 떠올리며 속으로 의문을 품었다.

“앞으로 5일이야.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빠진 것 같으면 엎드려서 빌어. 그럼…… 아마 올가미까지 걸리지는 않을 거야. 두들겨 맞기는 하겠지만.”

마틴 레드우드의 잔심부름을 담당하는 하녀는 6일에 한 번씩 바뀐다. 한 명을 전담으로 두면 그 사람의 몸이 성하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매일 바꿨다가는 레드우드 백작가에서 일하는 하녀 전부가 부상을 입은 채 일을 해야 할 거다.

그 미친놈의 시중을 든 보상으로, 6일간 마틴 레드우드의 당번으로 들어갔던 하녀는 그 이후 6일간 자유시간을 가진다.

가문의 주치의인 베른에게 치료를 받을 수도 있고, 그 자유시간을 이용해서 가족의 얼굴을 보러 갈 수도 있다. 안젤라가 이번에 자원한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무릎이 계속 욱신거리긴 하지만, 일단은 가족 얼굴을 보고 싶다.

레드우드 가문의 하녀로 들어간 지 4개월, 그녀는 집이 너무나도 그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조심할게요.”

오늘 무사히 지나간 건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른다. 안젤라는 침을 꿀꺽 삼킨 다음,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마틴 레드우드의 방 옆에 있는 작은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6일 동안은 어지간해서는 꼼짝없이 여기에서 마틴 레드우드의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

“무사히 넘어가기를.”

안젤라의 중얼거림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틴 레드우드의 침실과 연결된 신호줄의 방울이 딸랑거렸다. 안젤라는 순간적으로 그 사악한 방울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을 삼키고 노크를 한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문 너머의 대답을 듣고, 안젤라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방 안으로 들어간 안젤라는 곧장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얼굴을 보면 안 된다.

실수를 한 하녀들의 목에 며칠이 지나도록 남아있던 그 섬뜩한 자국을 안젤라는 기억하고 있다. 방금 전에는 운이 좋아서 그냥 넘어갔지만 이제는 허용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키실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해주세요.”

하지만, 안젤라의 말에 돌아온 마틴의 대답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마틴을 볼 수밖에 없었다.

“줄자를 하나 가져와 줬으면 하는데.”

줄자? 설마 그걸로 목을 조르려는 걸까. 엄마, 아빠…… 보고 싶어요.

“바로, 챙겨오겠습니다.”

마틴의 말에 안젤라는 무서운 상상을 하면서 떨리는 음색으로 대답했다. 방을 나와, 성의 개보수를 담당하는 인부들의 창고로 향한 안젤라는 거기에서 줄자 하나를 찾아내 다시 마틴의 방으로 향했다.

제발, 이걸로 목이 졸리고 싶지는 않은데. 다른 용도이기를 간절히 빌면서 다시금 안젤라는 마틴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고맙다, 밤도 늦었는데.”

고개를 푹 숙인 채, 양손으로 줄자를 앞으로 내민 다음 안젤라는 자신의 목에 저 줄자가 감기는 지독한 상상을 하면서 다음의 일을 기다렸다.

“잠깐 신발 벗고, 발을 좀 내밀어줘.”

뭐? 그 말을 들은 안젤라는 자신도 모르게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마틴을 바라봤다.

“아…….”

너무 당황해서 실수로 얼굴을 봐버렸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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