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화
하녀의 표정이 이상하다. 나는 파랗게 질린 안색을 하고 있는 하녀를 보다가 말했다.
“힘든 일을 시켰나?”
내 질문에 하녀가 곧바로 고개를 휙휙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기, 죄송합니다. 그, 꼭 맨발이어야 합니까?”
“그래, 양발을 다 내밀 필요는 없고. 한 발이면 된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는 잠깐 주저하다가 왼쪽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침대 위에 올려.”
내 말에 하녀가 다시금 기겁한다.
“제가 어찌, 천한 발을 도련님의 침상 위에.”
아 진짜, 뭐 좀 확인하려고 하는데 되게 오래 걸리네.
“잡소리 그만하고 올리기나 해.”
내 말에 하녀가 몸을 덜덜 떨면서 한 발을 침대 위로 올렸다. 나는 줄자를 가져가서 하녀의 발 치수를 확인했다. 약 240mm. 다음으로는 내 발 치수를 확인할 차례다. 약 275mm.
이 세상의 사람들이라고 발 치수가 지구 사람들에 비해 유달리 크거나 한 건 아닌 모양이다.
굳은살과 때 같은 것이 보인다. 예쁜 발은 절대로 아니다. 뭐,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지. 애초에 하녀가 발이 예쁘다면 그건 직무유기일 가능성이 크니까.
거기에 더해서 발뒤꿈치에 큰 물집이 보인다. 생긴 부위를 보면 이건 신발이 너무 큰 게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신발이 큰 모양인데.”
내 말에 침대 위에 발을 올려놓고 덜덜 떨고 있던 하녀가 어음…… 하는 소리를 낸 다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약간 큽니다.”
개뿔이나. 약간 큰 걸로 발뒤꿈치에 이렇게 커다란 물집이 잡히지는 않는다.
“요청해서, 발에 맞는 신발로 바꿔 신도록 해.”
하녀가 잠깐 주저한다. 아무래도 그런 걸 요청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 모양이다.
“네가 요청하기 곤란한 문제라면, 내가 따로 이야기를 해두지.”
말을 마친 나는 침대 위에 올려진 발을 잠깐 본 다음 말했다.
“언제까지 올려둘 생각이야?”
내 말에 하녀가 기겁하면서 곧장 발을 침대에서 내렸다. 그 이후로, 나는 하녀의 몸 치수를 더 측정해 보았다. 혹시 뭐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의 몸과 큰 차이가 있는 곳이 있을까 싶어서.
하지만, 별다른 특이한 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좋아, 이제 볼일은 끝났다.
“이름이?”
내 말에 하녀가 곧바로 대답했다.
“아, 안젤라입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에 누우며 입을 열었다.
“그래 알았다. 안젤라, 오늘 밤에는 더 부를 일 없을 테니 돌아가 쉬어.”
잠깐 눈치를 살피던 안젤라가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침대에 누운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팔자 참.”
인생이 원래 어떻게 될지 모르는 물건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뜸 다른 세상의 귀족 자제 몸뚱어리에 쑥 하고 들어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딱히 내가 뭘 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귀족이니까. 방금 발 치수를 잰 것도 그냥 순수한 호기심이었지, 이걸로 뭔가를 해보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게 아니다.
거지 같았던 인생에 대한 보상이라도 되는 걸까.
“마음 같아서는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었지.”
레드우드 백작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는 두 개였다. 하나는 로델린이라는 여자의 약지에 끼워진 것과 같았지만, 다른 하나는 아니다. 혹시, 마누라가 둘인 게 아닐까. 하지만, 그걸 물어볼 수는 없었다.
기억상실에 대한 이야기는 함부로 새어나가지 않는 편이 좋다고 백작이 말했으니까. 설마하니 아들이라는 녀석이 자기 아빠 마누라가 몇 명인지도 모를 리가 없잖아.
“백작의 마누라가 둘이라면, 언젠가는 만나보겠지.”
지금 당장 검증할 수 없는 가설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하면, 가설이 이성을 속이게 된다. 증거에 가설을 맞추는 게 아니라 가설에 증거를 맞추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더 생각하지 말자.
나는 잠에 들었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씻고 싶은데.”
세면대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참 난감하다. 멍하니, 창밖에 낀 성에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안젤라가 들어왔다.
“목욕물이 준비되었습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하, 마침맞게 딱 오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안내를 받아 이동했다.
그 와중에, 손에 편지를 든 사람 한 명이 급하게 걸어가다 나를 보고 당황하며 인사를 한 다음,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간다.
도착한 곳 안에는 배수를 위한 시설과 함께, 커다란 통 안에 김이 오르는 물이 가득 담겨있었다. 이제 씻으면 되는데, 뒤편에 여전히 서 있는 안젤라가 의심스럽다.
“뭔데, 등이라도 닦아주게?”
나는 상관없는데.
“혹시, 물 온도가 너무 뜨거우신지 확인을…….”
나는 그 말에 아, 하는 소리를 내고는 손을 물속에 집어넣었다. 이 정도면 될 것 같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젤라가 들고 있던 수건을 고리에 걸어두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다면 불러주십시오.”
안젤라가 나가고, 나는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아침 식사는 혼자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식당에서 하시겠습니까?”
“식당에서.”
어차피 기억을 잃었다고 하는 카드가 있는 이상 지금 당장 내가 그 사람들에게 쫄아 있을 필요는 없다. 기억을 잃어서 저런다, 라고 하는 게 일종의 면책사유가 되니까.
“알겠습니다.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안젤라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식당에는 이미 누군가 앉아있었다. 안내를 마친 안젤라는 밖에서 대기하겠다 말했고, 나는 문을 열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아, 누군가 했더니. 마틴인가.”
나이는 20대 초반. 밤색의 머리카락은 나와 같은 색깔이다. 키는 178정도, 몸무게는 68-70kg 정도. 오른손 중지 마디에 굳은살이 눈에 들어온다. 펜을 많이 쓰면 생기는 굳은살이다. 백작과 달리, 근육은 발달하지 않았다. 굳이 비유하자면 문과 체질이라고 해야 하나?
“누구신지요?”
내 말에 그가 웃었다.
“기억상실이라고 했었지. 네 배다른 형님 되신다.”
그래, 백작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두 개일 때부터 어쩐지 이럴 거라고 생각했지.
마누라가 둘이라니, 다른 사람들은 마누라가 하나만 있어도 죽을 것처럼 힘들어하던데 역시 백작 정도 되면 배포가 크구나.
“그렇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형님. 이름을 여쭤봐도 될까요?”
“데이먼.”
“그럼 데이먼 형님이라 부르면 되겠네요.”
대답을 마친 녀석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뭐지, 내가 좀 띠꺼운 건가? 내가 이 식탁에 앉지 못할 이유는 없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데이먼을 훑어봤다.
소맷자락에 튄 잉크 몇 방울과 촛농 방울. 그리고 검지에 끼워진 반지에도 촛농 자국이 눈에 띈다. 그렇게 살펴보고 있으려니 데이먼이 질문을 던졌다.
“맨날 쓰고 다니던 그 가면은?”
나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이제 막 만난 참이다. 적대할 이유가 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굳은 표정을 유지할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도 아버지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얼굴 반쪽을 가리는 가면이라니. 기억을 잃기 전의 저는 어지간히 유치했나 봅니다.”
내 말에 데이먼이 픽 웃고는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다. 기억을 잃은 편이 훨씬 좋군그래.”
다시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온다.
“마틴…….”
시선을 돌려보니, 거기에는 로델린이 놀란 표정으로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어머님.”
“그래. 푹 쉬었니?”
잠깐 당황하고 있던 로델린이 이내 내 인사를 받아주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두 명이 함께 들어왔다. 하나는 어제 찾아왔었던 나의 아버지 되는 백작이고,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여자다. 나이는 내 어머니와 비슷해 보인다. 들어온 여자는 나를 보고는 살짝 얼굴이 구겨졌다가 다시 펴진다.
“로델린 부인,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로델린은 그 인사를 받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여자는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마틴, 기억을 잃었다지. 몸은 좀 괜찮은 거냐?”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기억이 없어서 그런데……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시지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작의 시선이 나에게 꽂힌다.
“기억을 잃어버렸는데 그건 어떻게 알고 있느냐.”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아버님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두 개인데, 하나는 제 어머니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와 비슷하고, 다른 하나는 함께 오신 부인의 반지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럼 저 여자도 백작의 부인이겠지. 뭘 대단한 거 알아냈다고 그렇게 노려봐.
“둘째 부인이라는 점은?”
역시 어려울 거 없지.
“저 여성분은 존댓말을 했고, 어머니는 반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군.”
“다만, 저는 아직 아버지와 부인의 이름을 모릅니다.”
사람 이름을 맞추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내 방 안에서 나온 것도 오늘 아침부터였으니까. 내 말에 백작이 큼,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겠군.”
레드우드 백작의 이름은 레온이었다. 그리고 둘째 아내이자 데이먼의 어머니 되는 사람의 이름은 제인이었다.
“그럼, 식사하지.”
그 말과 함께 문이 열리고, 아침 식사가 테이블 위에 차려진다. 백작이 식사를 시작하고, 이후에 우리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식사 예절 정도는 어떻게든 눈치로 때려 맞출 수 있다. 자잘한 실수는 어쩔 수 없어도, 큰 실수를 하지 않을 자신은 있다.
식사를 하던 와중, 데이먼이 입가에 묘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입을 열었다.
“모자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제 마음이 다 편안합니다, 부인. 이렇게 함께 식사하는 게 얼마 만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구나.”
로델린은 짤막하게 대답을 하고 나서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디 불편한 곳이 있거든 말하렴.”
“괜찮습니다. 의사도 오늘부터는 평상시처럼 생활해도 좋다고 했으니까요.”
내 말을 듣고 있던 데이먼이 음, 하는 소리를 냈다.
“평상시처럼이라…… 그것 참, 기쁜 소식인지 어떤지 잘 모르겠군요. 마틴의 행실이라는 게 좀 이야기가 많지 않습니까.”
로델린의 표정이 살짝 안 좋아진다.
저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아까부터 살살 성격을 긁는 기분인데. 아프라고 저주를 하지 그러냐.
빙글빙글 돌린 악담을 듣고 있으려니 영 기분이 좋지 않다. 차라리 얼굴에 대고 쌍욕을 하던가. 이런 식으로 살살 시비를 걸겠다?
물론 이게 다 이 몸의 원래 주인께서 해놓은 일이 있다 보니 발생하는 일이겠지.
그래, 뭐 좋아. 밥 먹으면서 할 것도 없었는데 잠깐 놀아줘 볼까.
“데이먼 형님은, 일어나시고 나서 많이 바쁘셨던 모양입니다. 아침에 급하게 편지를 쓰셨지요? 내용이 뭔지 궁금해지네요.”
내 말에 식사를 하던 데이먼의 손이 딱 멈췄다.
“네가 그걸 어떻게.”
데이먼의 질문에 나는 포크를 들어 그의 소매를 가리켰다.
“소매에 잉크와 굳은 촛농 몇 방울이 묻어있습니다. 데이먼 형님 검지에 끼워진 반지에도 촛농이 약간 붙어있는데, 신기하게 색깔이 소매의 촛농과 같군요.”
게다가 반지의 장식이 딱 도장처럼 생겼다. 도장 같은 거 찍기 좋게 말이다.
씻으러 가면서 만난 하인이 편지 몇 장을 들고 있던 기억이 있다. 그 녀석이 들고 있는 편지봉투가 전부 촛농으로 봉인되어있었지.
고로, 저 반지에 촛농이 묻은 건 편지를 봉인하기 위한 것이리라.
“어젯밤에 편지를 쓰셨다면 오늘 씻으시면서 옷을 갈아입으셨을 테니, 소매에 잉크나 촛농이 묻어있을 이유는 없죠.”
오늘 아침 씻고 나서 옷 갈아입고 쓴 거다. 그것도 꽤나 급하게. 급하게 써야 했던 이유는 지금으로서는 모르겠지만.
“아, 아침에 쓰신 편지는 혹시 말하기 곤란한 내용입니까? 그렇다면 미안하군요.”
말을 마친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얘, 밥이나 먹으렴. 아침 댓바람부터 얌전히 있는 사람 성격 긁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