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화
그 뒤로 일주일 정도는 딱히 하는 일 없이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애초에 나한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 모양이지.”
일주일 사이 읽은 책의 권수는 30권이 넘어가는 중이다. 나는 쌓여있는 책들 위에 막 다 읽은 책을 턱 하니 올려놓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나쁜 일은 아니다. 어쨌든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밥은 매 끼니 나오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리가 되지 않는 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돈 많은 백수라는 꿈을 나는 죽음을 겪고 난 다음에 가지게 된 것이다.
잠깐 턱을 괴고 내가 읽은 책들을 살펴보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에 몰두하는 건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앞으로도 방에 처박혀서 열두 시간이 넘도록 책만 바라보고 있기에는 지루함이 너무 많이 쌓였다. 뭔가 해볼 만한 일 없으려나.
창문을 통해 성문에 세워진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와 부지런히 움직이는 하인을 바라보며 이후에 뭘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안젤라가 노크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와 인사했다.
“백작님이 찾으십니다.”
아하, 안 그래도 할 말 있었는데.
“집무실?”
“네. 바로 와달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 양반이 나를 찾는 거지. 지난 일주일 동안 아침 식사 자리 말고는 만날 기회도 없었는데.
“바로 가지.”
그 길로 바로 방을 나선 나는 백작의 집무실 문을 노크했다.
“마틴이냐, 들어와라.”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처음 들어오게 된 백작의 방을 빠르게 훑어봤다. 벽에 붙어있는 지도에는 책에서 봤던 군대 용어와 부호가 쓰여 있다.
집무실 안의 책장에 꽂혀있는 책은 전략과 전술, 무기의 사용법에 관련된 서적들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간단한 읽을거리가 꽂혀있는 칸은 책 몇 권을 따로 빼놓은 모양인지 이빨이 빠져있다.
업무를 보기 위해 마련된 책상은 잉크병 하나 없이 깨끗하다. 앞에 앉아있던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라. 집무실로 부른 건 오랜만이군.”
“그렇습니까? 기억나는 게 없어서.”
나는 적당히 대꾸하면서 소파에 앉았고, 자리에서 일어난 백작은 내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요 근래 일주일, 별일 없이 보냈더구나.”
“그야, 딱히 할 일이 없지 않았습니까.”
내 말에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일주일이나 아무 사고 없이 책만 읽고 있다니, 평상시의 너답지 않다.”
나는 그 말에 살짝 인상을 쓰고 레온 백작을 바라봤다.
“이전의 제가 어떻게 지냈는지 별로 궁금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쌩양아치라는 사실 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내 말에 레온이 잠깐 나를 응시했다.
“네가 잊었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이전의 너를 기억하고 있다.”
“떠오르지 않는 기억까지 제 책임이라고 하신다면 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애초에, 그건 심지어 내 자신도 아니었다. 이 몸뚱아리의 원래 주인이 막 살았고, 덕분에 나에 대해서 사람들이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건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걸 나보고 뭐 어쩌라는 거야.
“너는 한 달 뒤 쿠르스트 산맥의 국경 수비대로 향한다.”
국경 수비대?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잠깐 레온 백작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못난 아들에 대한 훈계 같은 겁니까?”
군대 가서 정신 차리라는 식의 이야기는 꼭 한국에서 통용되는 이야기는 아닌 모양이군. 내 말에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쿠르스트 산맥의 국경수비대는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
나는 그 말에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레온 백작을 바라봤다. 지금 내가 이 친구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데.
“그러니까, 버리실 예정이었다는 거군요.”
“쿠르스트 산맥을 지키는 일은 명예로운 일이다.”
“원래 힘들고 고된 일 시킬 때는 다들 보람찬 일이라고 포장하기 마련이죠.”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이 더 이상 고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내 입에서 절로 이죽이는 말투가 튀어나왔다.
“아니요, 마음에 아주 쏙 듭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에게 버려져 돌아올 가능성도 거의 없는 군 생활을 해야 한다니. 마치 생일 선물이라도 받은 기분이네요.”
내 말에 레온 백작이 대답했다.
“쉽게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너는 잘못을 저질렀고, 나는 거기에 대한 징계를 해야 한다.”
나는 그 말에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어떤 잘못 말씀이십니까.”
내 말에 레온 백작이 나를 응시했다.
“호수에서 물에 빠진 건 너 하나만이 아니다. 너는 살아남았지만, 다른 한 명은 결국 죽었지.”
나는 그 말에 잠깐 멈칫했다. 사람의 목숨은 소중하지만, 귀족과 평민이 있는 이 세상에서는 사람의 목숨 가치가 계급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레온 백작이 나에 대한 징계 명목으로 뭐시기 산맥의 국경 수비대로 나를 보내야 한다는 건…….
“레브란트 후작가의 차남이 죽었다.”
그래, 나와 함께 물에 빠진 녀석 중 하나가 귀족이었다는 소리다. 레온 백작이 고개를 저은 다음 나에게 편지를 하나 내밀었다. 편지의 봉인은 뜯겨 있었다.
“레브란트 후작가는 해당 행위에 책임질 것을 요구했다.”
내용을 읽은 나는 눈을 잠깐 감았다. 젠장맞을. 자다가 벼락 맞은 기분이네. 남의 몸에 들어간 게 썩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좀 틀렸던 모양이다.
“잘은 모르지만, 기억을 잃기 전의 저는 딱히 검과는 인연이 없었던 것 같은데요.”
내 말에 레온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다.”
“설마, 이대로 끌려가라는 겁니까?”
“네가 쿠르스트 산맥으로 향하는 건 한 달 뒤다.”
이런 망할, 꼴랑 한 달 가지고 뭘 어쩌라고. 칼질이 무슨 한 달 빡세게 준비하면 붙을 수 있는 워드 자격증 시험이라도 되는 거냐?
“아무리 봐도 가서 그냥 죽으라는 뜻 같은데요.”
내 말에 레온 백작이 잠깐 자신의 눈가를 비빈 다음 대답했다.
“레브란트 후작가의 위세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청에 억지가 있다면 모를까, 레브란트 후작가에서 차남의 죽음에 대해 레드우드 백작가의 책임을 묻는 일은 정당하다.”
즉, 레온 백작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나는 잠깐 레온 백작을 바라보다가 깊게 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대답을 들어야겠습니다.”
“말해 보거라.”
나는 고개를 들어 레온 백작과 눈을 마주쳤다.
“저를 쿠르스트 산맥의 국경 수비대로 보내는 건 누구 머리에서 나온 생각입니까?”
너냐, 아니면 그 레브란트 후작이라는 녀석이냐. 레온 백작이 잠깐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나다.”
그 말에 나는 입가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뭐 이렇게 저렇게 말은 잘 꾸미셨지만, 결국은 겸사겸사라는 거군요.”
꼴 보기 싫은 녀석 하나 치워버리고 싶었는데, 마침맞게 후작가 차남의 죽음이라는 빌미가 생겼다.
“너는 말을 조심해라.”
“죄송하지만, 지금 굉장히 조심하는 중입니다.”
조심 안 하고 있었다면 내 입에서 오만가지 쌍욕이 다 튀어나왔을걸. 레온 백작은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이 자신의 용건을 간단하게 말했다.
“오늘 저녁 중으로 이후 한 달 동안 너에게 검을 가르칠 사람이 온다. 왕국의 반석 기사단에서 퍼스트 나이트로 의무를 다하고 은퇴한 게롯 홀필드다.”
아, 자기 할 말 끝나고 나면 내쫓으시겠다? 그러시든가, 나도 그렇다면 내 할 말 하마.
“그냥 맨몸으로 가서 죽은 다음 시체를 받아보시는 편이 더 행복할 텐데 뭘 또 그런 준비까지 해주시고 그러십니까.”
“네 죽음을 바라는 건 아니다.”
나는 그 말에 최대한 밝은 웃음을 지어주었다. 그렇겠지, 그냥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거지.
“그것 참 감동적이군요. 죽이기는 싫지만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건 보기 싫다니.”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중요치 않다. 쿠르스트 산맥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너에게 징계를 내리기로 한 이상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 정도가 전부니, 너는 목숨을 걸고 배워라.”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당연히 목숨을 걸고 배울 생각이다. 그 쿠르스트 산맥이라는 곳이 도대체 어떤 곳인지는 잘 모르지만 후작가 차남을 죽인 대가로 가는 곳에 비키니 입은 바텐더와 선베드가 있을 리는 없잖아.
“이 소식을 들으면 데이먼이 기뻐하겠네요. 더 하실 말 없으면 나가보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젠장맞을.”
기분이 더럽다. 차라리 내가 잘못해서 일이 이렇게 된 거면 화가 날 이유가 없는데. 나는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이 갑자기 어디에서 툭 튀어나와 트럭처럼 나를 들이받았다.
방 안으로 들어간 나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이마를 벽에 가져간 채로 한 번 강하게 들이받았다. 골통을 울리는 충격과 고통이 약간 정신을 차린 나는 이마에 벽을 가져다 붙인 채 중얼거렸다.
“일단은 그 쿠르스트 산맥인지 뭔지 하는 곳부터 뭐 하는 곳인지 찾아봐야지.”
가게 되는 것은 필연이다.
거기가 어떤 곳인지 모르면 대책을 세울 수 없다. 찾아봐야 할 것은 쿠르스트 산맥에 대한 정보와 그곳을 방어하는 국경 수비대. 서재에서 관련 있어 보이는 책들을 찾아낸 나는 쿠르스트 산맥과 국경 수비대에 대한 정보를 읽기 시작했다.
“하이랜더라.”
쿠르스트 산맥에서 국경 수비대가 주로 싸우는 적은 하이랜더라고 하는 것들이다.
[하이랜더는 두 개의 심장을 가진 것으로 추측된다. 하나로도 충분히 신체에 혈액을 공급할 수 있기에, 두 심장 중 하나를 파괴하는 것으로는 그 악마적인 돌격을 멈출 수 없다.]
그 내용을 읽어본 나는 기가 차서 웃음을 흘렸다.
“박지성이냐?”
이것들은 뭔데 심장이 두 개나 있어. 편의점에서 1+1 행사를 할 때 구매한 것도 아니고. 심장 두 개를 다 파괴하기 전까지는 문제없이 몸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한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또한, 머리가 파괴된 이후에도 약 30분 정도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 실전에서 확인되었는데, 학자들은 뇌가 파괴된 이후 척추가 임시적으로 뇌의 기능을 대체하는 게 아닐까 추측한다. 다만, 머리가 날아가면 시각을 상실하고, 척추의 뇌 기능 대체는 어디까지나 임기응변 수준이기 때문에 머리가 날아간 이후부터는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야수에 불과하다.]
이 책 쓴 새끼 누구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야수는 위험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대가리가 잘리고도 30분을 살아있을 수 있다는 건 이미 정상적인 생명체의 수준이 아닌데. 그리고, 왜 다 추측뿐이야. 니들 시체 해부 같은 건 안 하냐? 궁금하면 뜯어서 열어보면 될 거 아니야.
[잿빛의 가죽은 두꺼워서 어지간한 화살은 박히지도 않고. 숙련된 병사를 기준으로 하이랜더 한 마리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희생을 각오하더라도 최소 50명이 필요하다. 충분한 훈련을 거친 기사라면 능히 혼자서 한 마리의 하이랜더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하이랜더는 4-5의 인원이 뭉쳐 다니기 때문에 실전에서의 피해는 더 클 것으로 예상된다.]
대충 쿠르스트 산맥에 존재하는 하이랜더라는 괴물들에 대한 정보를 확인한 나는 책을 휙 던져버리고 이마에 손을 올렸다.
“저런 게 돌아다니는 곳에 보내면서 죽는 건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다니.”
거짓부렁을 해도 정도가 있지.
나는 계속해서 쿠르스트 산맥과 관련된 다른 책을 읽기 시작했고, 결론적으로는 이 쿠르스트 산맥이라는 곳은 파도 파도 괴담밖에 없다는 사실만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뷔페가 따로 없네.”
다른 곳에서는 보기도 힘들다고 알려진 괴물들이 쿠르스트 산맥에 세워진 국경 수비대의 성벽을 벗어나 조금만 들어가면 마구 튀어나오는 모양이다. 꼭 이 괴물에게 죽고 싶다! 라는 생각이 있다면 쿠르스트 산맥으로 향하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쿠르스트 산맥에 대한 서적을 읽어내려가며 밤이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