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화
다음 날이 되었다. 오늘부터는 딱히 아침 식사를 레온 백작과 함께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내 길은 정해졌고, 어제 함께 아침 식사를 한 것도 레온 백작이 아침 식사에 누구와 함께 올지 궁금해서 찾아가 본 것뿐이었으니까. 차를 한 모금 마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차에 향이 섞여 있는데.”
알고있는 향이다. 베르가모트 오렌지. 말려서 홍차에 향을 낼 때 쓰는 경우가 있다. 이탈리아 특산품인데. 이 세상에서 비슷한 냄새를 맡게 될 줄은 몰랐다.
“네, 이전에 테네스 공국에서 주문한 물건입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차를 마실 때 꼭 넣어 먹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구만. 질문을 하기 전에 그냥 스쳐 지나가는 간단한 대화였을 뿐이다. 잡담을 마친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지?”
아침 식사를 마친 내가 질문을 던지자, 안젤라가 곧바로 대답했다.
“지금이라면 집무실에 계실 겁니다.”
좋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레온 백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나는 이제 이 집에서 예의 같은 거 안 지킬 거다.
“뭐냐.”
레온 백작이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나를 바라봤다.
“나흘 뒤에 로티샤 호수로 가볼까 합니다.”
내 말에 레온 백작이 나를 바라봤다.
“네가 빠졌던 호수로 알고 있는데.”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이유가?”
나는 그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한 달 뒤면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는데, 내가 이 꼴이 되게 만든 호수 가서 오줌이라도 싸갈겨 볼까 합니다.”
내 말에 레온 백작이 잠깐 눈썹을 꿈틀하고는 대답했다.
“한 달이라는 시간으로는 게롯과 함께 훈련하는 것만으로도 빠듯할 텐데.”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 말에 레온 백작이 약간 구겨진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죽기 싫으면 열심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을 저보고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알아들었는데, 아닙니까?”
내 말에 레온 백작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네가 알아서 하면 될 일 아니냐.”
“동행하고 싶은 아랫사람들이 있는데, 가려면 아버지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내 말에 레온 백작이 손을 휘휘 저었다.
“가고 싶다면 가라. 네 말대로 네가 알아서 해야 하는 일이니.”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나섰다. 허락을 받았으니 이제 더 이상 저 인간에게 찾아갈 일이 없었으면 한다. 밖으로 나온 나는 곧바로 연무장으로 향했다.
“시간 맞춰 오셨군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괜찮겠냐, 어제 그 개고생을 했는데. 나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풀면서 대답했다.
“안 괜찮으면 어떻게, 오늘은 쉽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쉬라고 해도 쉴 생각도 없었고.
“오전에는 육체 단련을 하고, 오후에는 마력을 느끼는 연습을 할 겁니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신다면, 이후에는 혼자서도 틈틈이 해주셔야 합니다.”
말을 마친 게롯이 연무장을 가리켰다. 뛰라는 거겠지.
“헤ㅤㄱㅔㄱ…… 흐에ㅤㄱㅔㄱ…….”
퍼런 하늘이 누렇게 보일 정도로 달리고 나서 양손으로 무릎을 짚고 헐떡거리고 있자, 게롯이 나에게 검을 한 자루 내밀었다.
검은 연습용이라, 군대에서 주는 총검처럼 날이 죽어있었다.
나는 잠깐 숨을 몰아쉬며 내민 검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게롯의 지시에 따라 나는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기본자세부터, 검을 휘두르는 방법과 방어 자세 같은 것들이었다.
막싸움이야 흥신소 하면서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라서 어느 정도 자신이 붙어있지만, 이렇게 사이즈가 큰 칼을 들고 휘둘렀던 경험은 없기에, 모든 것이 전부 새로웠다.
“쿠르스트 산맥에 도착하시면, 다시금 교육을 받을 기회가 주어질 겁니다. 그럼, 잠시 쉬었다가.”
나는 검으로 땅을 짚은 채 입가를 한 번 훔치고 검을 들어 올린 채 잠깐 비틀거린 다음 흘러내린 땀을 훔치고 말했다.
“잠시 쉬긴.”
누구 맘대로, 아직 괜찮아. 게롯이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공격하시겠습니까?”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방금 전에도 공격이었는데. 계속 공격만 할 수는 없죠.”
“그럼 방어를.”
말을 마친 게롯이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고, 나는 거기에 맞춰 공격을 방어하기 시작했다.
“쿠르스트 산맥의 국경 수비대는 오랜 기간 하이랜더들과 싸워왔습니다. 적을 사람으로 상정하고 배우는 지금의 기초 검술과는 다를 겁니다.”
바닥에 침을 한 번 뱉은 나는 신고 있는 신발로 가래침을 비빈 다음 대답했다.
“기초라는 게 원래 다 그렇지요.”
피아니스트가 연주회에서 하농 연습곡 치는 거 봤냐. 하지만 그 피아니스트들도 집에서 연습할 때는 일단 하농부터 한 바퀴 돌리고 시작할걸? 아니면 말고.
“그렇지요. 기초라는 게 원래 다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공격으로?”
게롯은 내 말에 동의하고 나서 다시금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게롯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공격을 성공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게롯에게 배운 것을 최대한 따라서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검을 더 휘두르던 나는 그대로 들고 있던 검을 놓고는 드러누웠다.
“더 못합니다.”
한계다. 이 이상 해봤자 몸만 망가질걸. 나라고 운동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니니까.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지는 대충 감을 잡는다.
“네, 저도 슬슬 멈추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말에 동의한 게롯이 애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내 말에 게롯이 대답했다.
“레온 백작님의 말씀과는 다른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나는 그 말에 흐흐, 하고 웃음을 흘린 다음 대답했다.
“아버지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네요.”
그 인간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궁금하지 않거든.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나흘 뒤에는 제가 잠깐 자리를 비울 일이 있습니다. 한 2-3일 정도는 걸릴 것 같은데.”
내 말에 게롯이 음?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도련님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시간이 없지.
“없는 시간 쪼개서라도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내 말에 게롯이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자리를 비우게 된다고 해도 완전히 손을 놓는 게 아닙니다.”
내 말에 게롯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옆에서 지켜보고 문제점을 짚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합니다. 한번 검을 휘두르는 버릇이 잘못 들면 돌이키기 힘듭니다.”
그렇겠지.
“그래서 말인데, 어차피 오신 목적이 저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 아닙니까?”
내 말에 게롯이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동행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말을 마치 나는 그대로 잠깐 눈을 감았다. 더럽게 피곤하네.
“도련님, 점심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나는 그 말에 눈을 떴다.
“저기, 하지만 정말 이걸로 괜찮으신지.”
나는 그 말에 연무장 한쪽에 마련된 식탁 위를 바라봤다.
“시킨 대로 잘했네.”
운동하고 난 다음에 먹으면 좋은 거야 뻔하지. 위장에 쏟아 넣으면 포도당 나오는 거랑, 단백질 나오는 거. 닭가슴살이랑 고구마.
가슴살에 쓸데없이 뭐 뿌리면 죽여버리겠다고 엄포를 했기 때문에 별다른 양념이 되어있지는 않았다. 후추랑 소금 정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에 앉아 죽은 닭의 시체와 식물 뿌리에 달린 덩어리를 씹어 식사를 끝냈다. 한 10분 정도 쉬고 있으려니, 게롯도 식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래서, 저는 뭘 해야 하는 거죠?”
내 말에 게롯이 내 등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일단은, 앉아 계시면 됩니다. 몸 안에 흘려 넣은 마력을 계속해서 인지하고 있는 게 중요합니다.”
다시금 느껴지는 심장의 지끈거림과 이물감. 꼭, 심장에 쥐라도 난 것 같은 느낌이다.
“느껴지는 이물감을 무시하고, 몸 안에 느껴지는 흐름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말 참 쉽게 한다. 발바닥에 가시가 박혔는데, 그거 무시하고 걷는 게 차라리 이것보다 더 쉽겠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애써 심장의 이물감을 무시하기 위해 애쓰며 억지로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조금 괜찮아지셨습니까? 이제 움직이겠습니다.”
이야, 방금 전에 그 대사,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5분 정도 뒤에, 게롯이 입을 열었다.
“좀 느껴지십니까?”
“심장을 잡아 뜯는 고통을 말하는 거라면…… 확실히 느껴지네요.”
내 말에 게롯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다시 해보죠.”
그렇게 약 다섯 번 정도 게롯이 내 심장에 박힌 금속 쪼가리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일곱 번째 시도에서 마침내 나는 심장에서 꿈틀거리는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
심장의 통증 속에 가려져 있던 감각.
“훌륭합니다. 고작 일곱 번 만에 체내의 마력을 느끼는 데 성공하셨다면 재능이 뛰어나신 편입니다. 어지간히 두각을 나타내는 왕국의 신예 기사 정도는 되어야 일곱 번 안에 마력을 느끼니까요.”
그래? 그거 다행이네. 난 일곱 번이나 실패해서 재능이라고는 코딱지만큼도 없는 줄 알았거든.
“잠시 쉬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는 그 말에 게롯을 보고 말했다.
“게롯 경이 피곤하시다면 그러지요.”
나는 괜찮다. 사실 한 일이라고는 그냥 얌전히 앉아서 심장에 쥐 난 것 같은 기분을 참는 거 말고는 없었으니까. 정작 마력을 움직였던 건 게롯이니, 피곤하다면 게롯이 피곤할 것이다.
“저는 괜찮습니다.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거 참 정력 찬 발언이군.
“그럼 계속해주세요.”
말을 마친 나는 눈을 감았다.
“최대한 주입하는 마력의 농도를 엷게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대기 중에 흩어져 있는 마력은 이것보다 더 농도가 엷습니다. 실제로 대기 중의 마력을 느끼시려면 더 노력하셔야 할 겁니다.”
알았어, 계속해줘. 나는 눈을 감고 몇 번이나 게롯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환하던 연무장에 석양이 진다. 그리고 이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후우, 후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얼굴을 구기고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이거 참 환장하겠네. 그런 나를 보고 있던 게롯이 한마디 한다.
“기사들의 사망원인 1순위가 적의 공격이고, 2순위가 심장마비입니다. 허허허.”
자기가 한 농담이 꽤나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게롯이 웃음을 터뜨렸지만, 나는 하나도 재미없다. 저게 그냥 농담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심장이 얼얼하니까.
“그럼, 저는 이만…….”
간단하게 인사를 마친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서 눈을 감았다. 훨씬 더 엷다 그거지?
“찾기 힘든 거 찾아내는 건 또 내가 전문이지.”
분야가 다르긴 하지만, 그냥 이런 식으로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붉은 가지를 찾아내서 사용할 수 있게 된다고 해도 스스로가 강해지지 않는다면 결국 좋은 무기를 든 비실한 머저리 1호일 뿐이니까.
눈을 꾹 감은 나는 방금 전까지 게롯이 심장에서 움직였던 마력의 움직임을 떠올리며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당장 오늘 안에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력을 모으기 시작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길지도 않을 것이다.
게롯이 한 달 정도 꾸준히 수련을 한다면 쿠르스트 산맥에 끌려가서도 너무 나대지만 않는다면 죽지 않을 것이라 말했으니까. 그 말은 아무리 늦어도 한 달 안에는 마력을 느끼고, 내 심장의 구심점 안에 축적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재능이 아예 없다면 모를까.”
이 몸에는 재능이 깃들어 있다. 오랜 시간 레드우드 가문이 구심점의 이물 반응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다듬은 혈통과, 어린 시절 심장에 박아넣은 미스릴 조각. 뛰어난 환경과 나쁘지 않은 재능이 있다면 그 이후로 만들어지는 성과는 결국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노력은 결국 집중한 시간과 비례하지. 그렇게 앉아서 눈을 감은 채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