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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15화 (15/275)

015화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는 굉장히 상대적이다. 빠르게 흘러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하지만, 제한 시간이 걸려있는 경우 대부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마치 지금처럼.”

나는 마차를 타고 쿠르스트 산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내가 한 잘못도 아닌 것 때문에. 로델린은 목이라도 맬 것 같은 표정을 지었고, 데이먼과 제인은 얼굴로 '마침내 저 새끼가 사라지는구나.' 라고 말하고 있었다. 레온 백작의 경우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일단, 받아야 할 건 다 받았네.”

게롯이 약속한 것을 번복하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어부의 집에서 일어났던 살인 사건의 가해자를 특정하는 데 도움을 준 대가는 분명히 제공해주었다. 아마, 이미 게롯이 보낸 연락이 닿았을 것이다.

“도리안이라.”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게롯이 절친한 사이라고 말한 기사다. 성격 자체는 쾌활한 편이지만,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면이 있어서 왕국 기사단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다, 결국 쿠르스트 산맥으로 발령났다고 한다.

“도련님, 조금만 더 가면 락벨리에 도착합니다.”

쿠르스트 산맥 인근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라고 부를 만한 규모로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쿠르스트 산맥 인근에서 이 마을뿐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국경 수비대는 새로 들어온 사람들을 받아, 쿠르스트 산맥으로 올려보낸다.

그리고, 이 마차에서 내려 국경 수비대가 내 신병을 확보하는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레드우드 가문의 장자 마틴 레드우드가 아니게 된다. 다시금 내 이름을 찾고 싶다면 쿠르스트 산맥에서 국경 수비대가 맞서 싸우고 있는 하이랜더 50마리를 제거해야 한다.

“……하이랜더라.”

요점은 간단했다. 게롯에게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책으로도 계속해서 하이랜더라고 하는 녀석들에 대해서 살펴봤다.

“타고난 전사.”

하이랜더는, 저 단어로 일축할 수 있다. 타고난 육체와 끈질긴 생명력을 기반 삼아 본능에 몸을 맡기고 날뛰는 괴물들이다.

물론 쿠르스트 산맥에는 하이랜더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손이 제대로 닿지 않는 쿠르스트 산맥에는 온갖 괴물과 기괴한 생명체들이 자리 잡고 있다.

국경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을 제외한 다른 곳에는 치안이라고 할 만한 게 거의 없기 때문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싶지 않은 중범죄자들도 쿠르스트 산맥으로 기어들어 온다.

굴러가던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한다. 락벨리에 도착한 모양이다.

“도련님. 도착했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국경 수비대로 챙겨 갈 수 있는 짐은 내 몸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마차에서 내린 나는 락벨리 마을 앞을 한번 슥 훑어봤다. 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지만, 사실 그 단어가 아까울 지경이다. 좀먹은 나무판 위에 시커먼 타르로 '술집'이라고 적어놓은 다 무너져 가는 집이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건물 중 하나였으니까.

그 술집 옆에, 혼자서만 그럴듯하게 세워진 건물 위에 왕국을 상징하는 깃발과, 국경수비대를 상징하는 깃발이 나란히 서 있다. 저기로 가면 될 것 같은데.

“이름.”

내가 건물 쪽으로 다가가자, 건물 입구에 서 있던 병사가 나를 보고 말했다.

“마틴 레드우드, 국경 수비대에 자원했는데.”

내 말에 병사가 명단을 꺼내서 확인해보고는 옆으로 비켰다. 나는 잠깐 녀석을 보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분위기하고는.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내 쪽으로 시선을 모은다. 국경 수비대에 자원한 사람들을 모아두는 장소인 모양이다. 사실, 징용과 다를 바 없는 식으로 인원의 보충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도살장에 끌려온 어린양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나는 대충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서 사람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두 시간 정도 기다렸을까. 문이 열리고 병사가 외쳤다.

“전원, 자리에서 일어나!”

나는 그 말에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앉아있던 다른 녀석들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린 문 너머에서 갑옷을 차려입은 남자 한 명이 병사 몇 명과 함께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 앞에 섰다.

“국경 수비대에 온 것을 환영한다.”

그 말에 몇몇 녀석들이 억울하다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각자 꼭 필요한 장소에 배치되어 쿠르스트 산맥에 존재하는 위협으로부터 정명하신 국왕 폐하와 그 신민들을 보호하는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게 된다.”

말을 마친 병참 장교가 옆으로 손을 내밀자, 병사가 명단을 그의 손 위에 올려주었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진행하기에 앞서, 명단에 적힌 자들의 이름을 확인하겠다.”

병참 장교가 명단에 적힌 이름을 하나씩 읽어내리고, 거기에 맞춰 이름이 불린 사람이 대답한다.

“마틴 레드우드.”

그리고 내 이름이 불렸다.

“네.”

병참 장교의 시선이 내 쪽으로 잠깐 향했다. 명단의 이름을 다 부른 다음 병참 장교가 우리를 슥 훑어보고는 타오르고 있던 화로 속으로 명단을 던져넣었다.

“현 시간부로 여기에 있는 자들은 국경 수비대에 소속되었다. 그전까지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자라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전원, 국경 수비대로 새로 들어온 신병일 뿐이다.”

말을 마친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원, 5열 종대로.”

그 말에 사람들이 주춤거리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던 병참 장교가 입을 열었다.

“귀가 막힌 모양이군. 괜찮다. 선임병들이 자상하게 도와줄 것이다.”

그리고 병참 장교와 함께 들어온 병사들이 허리춤에서 칼집을 풀어 들고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스무 명이 넘어가는 병사들이 칼집을 든 채로 달려들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던 사람들을 마구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슬프게도 남 일이 아니다.

뻑, 하는 소리와 함께 병사가 풀어 든 칼집이 내 머리를 후려갈긴다. 순간적으로 눈앞에 별이 반짝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피하려고 하면 피하지 못할 건 없지만, 피해서 뭐 어쩔 건데.

“그만, 그마아아안!”

멍하니 서 있던 사람들이 그 구타 속에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구타는 5분 넘게 이어졌고, 마침내 병참 장교가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면서 끝나게 되었다.

“다시 말한다. 5열 종대.”

그 말에 엎드려 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허겁지겁 일어나 비틀거리며 5열 종대로 맞춰 선다.

“똑바로 서, 이 새끼야!”

병사 중 하나가 비틀거리고 있는 녀석의 머리통을 다시 한번 칼집으로 후려갈긴다. 커흑, 하는 소리를 낸 녀석이 이내 억지로 자세를 바로잡는다.

“지시가 떨어지면 이행해라.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병참 장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5열 종대로 선 우리를 한번 슥 훑어보고 입을 열었다.

“3열 횡대. 5초 준다.”

그 말에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빠르게 움직인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당연히 병참 장교의 지시는 지켜지지 않았고, 다시금 구타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다섯 번이 넘게 이어진 구타와 명령 속에서, 병참 장교가 다시 입을 열었다.

“5열 횡대. 이후, 하달한 지시는 언제나 복창하고 이행한다.”

“5열 횡대!”

우리는 그렇게 외치고 두들겨 맞은 몸을 이끌고 최대한 빠르게 열을 맞췄다. 시간 제한을 주지 않은 걸 보면 기강은 여기까지만 잡을 모양이다.

“이제 좀 귀가 뚫린 모양이군. 자네들을 도와준 선임병에게 큰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라고 복창한다.”

“감사합니다!”

병참 장교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입을 열었다.

“제군들이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후 일정을 하달하겠다. 각 인원은 건물 밖에 마련된 보급품을 받도록 한다. 이후, 다시 이 자리에 집합할 수 있도록. 이상. 1열부터 나가서 보급품을 받는다.”

우리가 보급된 물품을 다 받고 다시 모이자. 병참 장교가 입을 열었다.

“지급된 물품에 하자가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하도록.”

받은 보급품의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군대 같은 느낌이어서 보급품에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보급품의 상태는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하나같이 새것이고, 지급된 복장 또한 오래된 물건이 아니라 빳빳한 새 물건들이다. 무게는, 한 30kg 정도.

“…….”

몇 명이 보급품의 상태를 보고 작게 감탄한다. 하지만 나는 별로 즐겁지 않았다. 물론 이전 세상의 경험이 이 세상에서 통용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원래 빡센 곳일수록 보급이 잘 나오는 편이잖아. 뭔가 개선된 군용 보급품이 있다면 언제나 제일 빡센 곳에 가장 우선적으로 보급된다.

그걸 생각해보면, 보급품의 질이 좋다는 것을 마냥 즐거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급품에 이상이 없는 것으로 알겠다. 전원 입고 있는 옷을 벗고 보급된 복장으로 갈아입는다. 1분 준다.”

이럴 것 같았지. 양아치 같은 새끼들. 나는 곧바로 옷을 벗은 다음 따로 빼두었던 보급품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급하게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지만, 1분 안에 시간을 맞추는 건 아무리 해도 무리다.

당연히 한 번 더 구타의 시간이 이어졌다.

“이런 씨팔, 작작 좀 패란 말이야 이 새끼들아!”

두들겨 맞던 녀석 중 하나가 제법 성깔이 있는 녀석이었던 모양인지, 마침내 참지 못하고 그렇게 외치며 자신을 향해 칼집을 휘두르는 병사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리고, 병사는 태연하게 자신을 향해 휘둘러진 주먹을 잡고, 그대로 녀석의 옆구리를 칼집으로 마구 후려쳤다.

“커허으……극…….”

그 모습을 확인한 사람들 대부분은 저항 의지를 잃어버렸다. 애초에, 나는 저항할 생각도 없었다. 온 천지에서 끌어모은 온갖 녀석들이 다 모여있는 곳이다. 곱게 말로 설명하면 되지 않냐고?

맞아,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슬프게도 말로 설득하는 것보다 두들겨 패서 말을 듣게 하는 편이 훨씬 더 빠르다. 쉬운 길과 어려운 길이 있다면 쉬운 길을 택하는 건 사람의 본능이다. 실제로, 몇 번 이어진 구타 속에서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지시받은 모든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으니까.

“환복이 끝났으면, 원래 입고 있던 옷은 두고, 보급품을 지급받은 군낭에 정돈해 넣어라. 바로 이동할 예정이니. 10분 주겠다.”

10분이라면 충분한 시간이다. 아니, 애초에 말이 10분일 뿐이지 시간을 재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저런 말은 그냥 최대한 빨리 짐 싸라는 뜻으로 알아들으면 된다. 10분 넘어도 별다른 일은 없을 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두들겨 맞은 사람들은 빠르게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 사이, 커다란 나무통 몇 개가 건물 안으로 굴러들어왔다.

“짐을 다 싼 사람은 수통을 챙겨 앞으로 나와 물을 채우고, 마셔두도록.”

나는 짐을 싸고 앞으로 나와 수통에 물을 채우고 몇 모금 마셔보았다. 그냥 물이 아니다. 맛을 보니, 항염과 진통에 효과가 있는 버드나무 껍질을 우린 물이다. 두들겨 패기는 했지만, 일단 몸이 상하지는 않도록 한다는 건가. 실제로, 그렇게 두들겨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폭행의 후유증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물을 충분히 마신 나는 수통을 채우고 물러났다. 짐을 싼 사람들이 각자 수통을 채우고 물을 충분히 마시고 나자, 병참 장교가 입을 열었다.

“이동한다.”

우리는 지시에 맞춰 이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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