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화
3시간 정도의 이동 끝에 도착한 장소는 쿠르스트 산맥으로 진입하는 입구에 위치한 막사였다.
“기가 막히군.”
거대한 장벽. 처음 먼 발치에서 쿠르스트 산맥을 봤을 때 내가 받은 감상이었다.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로 높게 솟은 땅의 융기는 굉장한 웅장감이 있었다.
막사에 도착한 우리는 숙소를 할당받고, 식사를 한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각자의 기본 체력을 검증할 예정이다. 30분 뒤 막사 앞 연병장에 집합하도록.”
병참 장교는 말을 마치고 나서 돌아갔다.
“……망할. 이렇게 사람을 두들겨 패고 3시간 넘게 걷게 한 다음에 체력 검증은 개뿔.”
한 녀석이 얼굴을 구긴 채 배급된 식사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상황에 어지간히 불만이 있는 모양이다. 뭐, 불만이 있으면 어쩔 건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배급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맛은 잘 모르겠지만, 양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막사 앞의 연병장에 모인 녀석들은 이미 자리잡고 있는 병사들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꼴을 보고 있던 병사 하나가 눈쌀을 찌푸리고 한마디 한다.
“쥐새끼처럼 슬금슬금 눈치 보기는, 시간이 좀 있으니 쉬고 있어 새끼들아.”
쉴 때는 안 건드리는 모양이다. 우리는 그 말에 자리에 앉아 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우리를 인솔했던 병참장교가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전원 기상.”
그 말에 우리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5열 종대로.”
“5열 종대로!”
우리는 병참 장교의 말을 따라 복창한 다음 자리를 잡고 섰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줄이 좀 엉클어져 있기는 하지만 병참 장교는 그 점에 대해서는 딱히 신경 쓰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제식을 핑계로 두들겨 팼던 몇 시간 전과는 꽤 다른 태도다.
“체력을 확인한다. 1열 앞으로.”
병참 장교는 각 열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병사 한 명씩을 붙여주고, 그들을 따라가도록 했다. 나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인솔하는 병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이 팔굽혀펴기를 실시한다.”
병사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우리가 팔굽혀펴기를 하는 횟수를 측정하기 시작했다. 팔굽혀펴기를 포함해서 약 네 가지의 체력 검사를 마친 우리는 다시 연병장에 집합했고, 병참 장교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적성 검사를 실시한다. 이름이 불린 자들은 옆으로 빠지도록. 마틴 레드우드, 조나단 헤서웨이, 카론 루빈스키.”
이름이 불린 나를 포함한 세 명은 옆으로 빠졌다.
“세 명은 적성 검사에서 제외된다. 나머지 인원은 선임병의 인솔하에 이동해 검사를 받도록.”
말을 마친 병참장교는 모인 사람들이 병사의 인솔을 따라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를 바라봤다.
“따라오도록.”
그리고 병참장교는 앞장서서 막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마틴 레드우드, 왼쪽 방으로.”
나는 그 지시에 따라 병참장교가 가리킨 방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에는 남자가 한 명 앉아있다. 한쪽 눈에 안대를 끼고 있었다. 그 이외에도 몸의 여기저기에 흉터가 제법 있다. 책상에 기대놓은 검이 눈에 들어온다.
“게롯에게 이야기 들었다. 국경 수비대, 제7수색대장 도리안이다.”
도리안이라. 그럼 이 친구가 게롯이 말했던 그 녀석인 모양이군. 어차피 이 안에서는 레드우드라는 성에는 큰 가치가 없다. 나는 이제 막 들어온 신병일 뿐이다. 따라서, 도리안이 반말을 하는 건 당연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를 가리켰다.
“앉도록.”
나는 의자에 앉았고, 곧바로 도리안이 입을 열었다.
“제아무리 게롯의 부탁이라고 해도 원래 나는 따로 편의를 봐주지 않는 성격이다. 쿠르스트 산맥은 남의 청탁을 들어줘 가며 유지될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그렇습니까.”
내 말에 도리안이 대답했다.
“하지만 말이야. 게롯이 자신이 청탁을 하게 된 경위를 편지에 꽤 자세하게 써 놓았던 말이지. 그게 흥미를 끌었어.”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고 있던 도리안이 입을 열었다.
“우리의 임무는 간단하다. 하이랜더를 비롯해, 쿠르스트 산맥에 존재하는 잠재적인 위협을 찾아내 보고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격멸한다.”
하이랜더의 흔적뿐이 아니라, 쿠르스트 산맥에 살고 있는 괴물들과 몰래 숨어든 범죄자를 찾아내서 처리하는 것이 수색대의 임무다.
“예방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 말에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우리는 발생 할 수 있는 위협을 미리 찾아내 제거하면서 쿠르스트 산맥의 방어에 이바지한다.”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서류를 훑어보고 입을 열었다.
“고작 한 달 정도 게롯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 치고는 체력 검사 결과도 준수하고, 편지의 이야기를 고려해본다면 이미 발현점을 넘을 정도의 마력을 모았다고 하던데.”
“그렇습니다.”
도리안이 히죽 웃었다.
“사실, 나는 그딴 것보다는 다른 게 더 흥미롭단 말이지. 실력이 뛰어난 기사나, 재능이 있는 녀석들은 쿠르스트 산맥 안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어. 워낙 많은 녀석들이 끌려오는 곳이니까.”
나는 그 말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대충 뭘 말하는지 알 것 같다.
“어부 집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게롯의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겠지만, 그중에 50% 정도만 사실이라고 해도 꽤 탐이 나는 인재란 말이지.”
내 입장에서도 나쁠 건 없다. 애초에, 내 목적은 쿠르스트 산맥의 국경 수비대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게 아니다. 하이랜더 50마리를 잡고 전역할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 올지 모르는 하이랜더가 오기를 기도하며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
수색대는 쿠르스트 산맥을 지키는 게 아니다. 위협을 찾아내서 미리 처리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당연히, 하이랜더를 마주칠 기회도 다른 부대에 비해 많을 것이다. 몸이야 좀 힘들겠지만, 어차피 여기에서 몸 편할 생각은 집어치웠으니까.
“나와 잠시 어디 좀 가지.”
자리에서 일어난 도리안이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도착한 곳은 침대와 생활 도구가 있는 적당한 크기의 방이었다. 방문에 붙은 팻말에는 월버트 웨이틀리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
“내가 아는 기사가 머무르는 거소네.”
나는 도리안의 말을 듣고 잠깐 녀석을 바라보다가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래, 재주 한번 부려보라 그거지?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종이, 잉크 병과 펜은 왼쪽에 놓여있다. 잉크는 절반 넘게 사용한 모양이다. 펜도 많이 사용해서 그런지 펜촉의 끝이 약간 뭉그러져 있다.
책장, 대부분의 책은 먼지가 잔뜩 끼어있지만 몇 권의 책은 그렇지 않다.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침대 시트의 오른쪽 아랫부분이 더럽혀져 있다.
잠깐 방을 살펴본 나는 입을 열었다.
“월버트 웨이틀리. 시인이 되고 싶어 하는 왼손잡이 기사라. 며칠 뒤에는 국경 수비대 소속이 아니게 됩니다. 오른쪽 다리를 잘라내 의족으로 대체했습니다. 전역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겠고.”
전역하게 된 것을 그렇게까지 기뻐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베개에는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남아있다.
“시인이 되고 싶어 한다고?”
나는 그 말에 시선을 돌려 도리안을 바라봤다.
“책장에 있는 책들은 대부분 건드리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몇 권은 여러 번 건드린 모양인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책 한 권을 뽑아서 페이지를 펼쳐보았다. 거기에는, 잉크로 써놓은 필기들이 눈에 들어온다.
“보시다시피, 이렇습니다.”
사실, 굳이 책의 페이지를 열어서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왼손잡이라는 건?”
“잉크와 펜이 왼쪽에 놓여있습니다. 벽에 붙여놓은 침대도 이대로 눕는다면 왼손은 자유롭지만 오른손은 벽에 딱 붙습니다.”
이 정도는 누구나 한다. 도리안도 그렇게 크게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오른 다리의 의족은?”
그래, 그걸 맞춘 게 조금 신기했던 모양이지?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침대 시트 오른쪽 아래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큰 부상이었던 모양입니다. 오른 다리의 무릎 아래를 완전히 잘라내 의족으로 대체한 모양인데. 의족을 벗고 침대에 눕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왼 다리를 먼저 침대 위에 올리고, 그다음에 양손으로 내 오른쪽 정강이를 받쳐 들고 침대 위에 올렸다.
“이런 식으로 침대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의족에 관절이 달리지는 않았을 테니. 당연히, 돌아다니면서 의족에 묻었던 먼지나 흙 따위가 그대로 침대에 남습니다.”
시트 오른쪽 아래는 그래서 더러운 거다.
“더 찾아내야 합니까?”
내 질문에 도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
도리안은 말을 마치고 나서 나를 바라봤다.
“네 말대로, 이 방을 쓰던 기사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오른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시인이 되고 싶어 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도리안 경 아래에 소속되어 있던 기사인 것 같습니다. 만약 제가 제7수색대에 들어가게 된다면 이 기사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겁니까?”
내 말에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그건 어떻게 알았냐는 거겠지.
“도리안 경은 저를 시험해보기 위해서 이리로 데려왔습니다. 문제를 낸 사람이 정답을 모르는 건 말이 되지 않지요.”
당연히 도리안이 잘 아는 사람일 것이다. 국경수비대의 규모는 크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수색대는 임무 특성상 다른 부대 사람들과 함께 있을 시간이 거의 없을 것이다.
고로, 도리안이 나에게 이 방을 쓰는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들을 말해보라는 문제를 내기 위해서는 자신이 통제하는 수색대의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
물론, 확실한 증거라기보다는 정황을 보고 추측한 것이기에 나는 확정적으로 제7수색대에 소속된 인원이 확실하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소속되어 있던 기사인 것 같다고 했지.
“그럴 생각이었네.”
도리안이 수긍하고 나는 잠깐 방 안을 한 번 더 둘러 본 다음에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합격입니까?”
다리를 잃은 사람은 불쌍하지만, 어차피 내가 알고 지낼 사람은 아니다. 중요한 건 합격 여부지. 나는 가능하다면 수색대에 소속되고 싶으니까.
“자네가 받게 될 훈련은 제7수색대에서 전담하게 될 거다. 보통의 병사들이 받는 훈련보다 훨씬 가혹하고, 맡게 되는 임무 또한 막중하니. 마음을 단단히 먹도록.”
합격인 모양이다. 그리고, 도리안은 나를 데리고 막사의 어디론가 향했다. 그리고, 그 장소를 담당하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 잠시 뒤, 도리안이 나에게 와서 입을 열었다.
“따라오도록. 자네는 현 시간부로 제7수색대 소속이다.”
나는 지급받았던 군낭을 짊어지고 도리안의 뒤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가야 하는 겁니까?”
내 말에 도리안이 대답했다.
“그렇게 멀지는 않다. 며칠 이동하면 족히 도착할 거야.”
이야, 나는 그 말에 참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간과 거리 개념이 좀 잘못된 사람 같은데.
“쿠르스트 산맥에는 총 열일곱 개의 산머리가 있다.”
크고 작은 산들이 서로 합쳐져 이루어진 산맥이지만,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고도가 높은 산은 있기 마련이다.
해발 4500m 이상의 높이를 자랑하는 고산은 쿠르스트 산맥에 총 17개가 있다. 그리고 그걸 국경 수비대에서는 '산머리'라고 부른다.
“그중, 우리의 자랑스러운 왕국이 담당하는 구역 안의 산머리는 다섯 개다. 억지로 외울 필요는 없다. 어차피 머지않은 시간 안에 훤히 알게 될 테니까.”
“그러고 보니, 쿠르스트 산맥에 따로 성벽 같은 건 없습니까?”
내 말에 그가 대답했다.
“많은 숫자의 병력들이 통과할 수 있는 협곡이나, 길목 부근에는 따로 관문을 설치해 두었다. 해당 시설의 유지 보수는 우리의 역할이 아니지.”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히죽 웃었다.
“가면 알게 된다. 자네는 아직 이 산맥의 진짜 모습을 모르니. 사실, 국경수비대의 병력 대부분이 모르고 있지.”